라그나로크 종료 이전에는 세스가 몰래 아담의 전투 장면을 보았다.
이브와 카인, 아벨이 아담을 응원하고 있을 때, 군중 속에 숨어들어 아담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세스의 미모가 숨어들어서 가려질 만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철저하게 숨긴 탓인지 아니면 아담의 전투에 정신이 팔려 가족들이 알아보지 못한 건지 다행히도 가족 중 누구 하나 알아보는 이 없었다. 금발이 물결치는 머릿결, 저와 닮은 얼굴, 푸른 눈동자, 이브의 곁에는 아담을 응원하는 카인과 아벨이 존재했다. 경기장 안에서의 아담은 결국 제우스에게 지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고 라그나로크가 끝나고 난 뒤. 아담과 이브의 앞에 나타났다.
사후네 이리저리 아담과 이브를 피해서 홀로 천계 어딘가 들판에서 유유자적 생활만 하던 세스였지만, 이브는 제 아들을 양팔 벌려 환영했다.
" 셋! 오랜만이구나! "
" 어머니... "
라그나로크의 패배자였던 아버지, 아담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이 세스를 볼 뿐이었다.
뺨을 붉게 물들인 이브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세스를 껴안던 이브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에 세스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낯설다는 듯 답했다.
" 형들은 잠시 다른 곳에 있을 겁니다. "
" 어머, 그래? 세스, 아담이 경기하는 걸 봤어야 하는데... "
" ... 봤어요. "
세스의 말에 이브가 화들짝 놀라며 입을 가리고서 세스를 보았다.
삼자대면으로 있는 것이 오랜만이어서 그런 건지 세스는 많이 낯설어했다. 어색한 듯 목덜미를 매만지던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 ... 다른 형들은 불편해서요. "
" 카인과 아벨이? "
" 네. 그리고 그... 아버지와 어머니만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
" 어머... 셋, 무슨 이야기이길래 그러니? "
아담과 이브, 세스까지. 세 명이 있었지만 정작 대화하는 건 두 사람이었다.
세스는 힐끗 아담을 보다가 겨우 눌러놨던 원망이 새어 나오기 전에 말하기로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이나 속에 묵혀두고 있었던 탓일까, 좀처럼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저 입만 달싹거리며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기만 했다. 그걸 지켜보던 아담이 세스를 향해 가벼운 손짓을 했고, 그걸 본 세스는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 제... 삶에 대해서 털어놓고 싶습니다. "
" 무슨... 말이니? "
" 당신들의 사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겁니다. "
" 셋... "
" 많이... 힘들었습니다. "
힘들었다는 말과는 달리 담담하게 하는 세스의 말투에 아담과 이브는 묵묵히 세스를 볼 뿐이었다. 아담은 세스가 그간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힘들었다는 걸 저리 담담하게 말하기 위해 얼마나 참고 또 참았는지 어렴풋이 예상이 갔다. 아담이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발걸음을 옮겨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모닥불 근처에 있는 나무 의자에 앉는 아담의 모습에 이브는 세스의 눈치를 살피다가 그의 곁에 앉았다. 세스 역시 아담과 이브의 맡은 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안 그래도 말하기 힘든데 분위기까지 그럴싸하게 잡히자 더더욱 긴장되고 말았다.
세스는 떨리는 손을 꽉 붙잡으며 묵직한 숨을 후 내뱉었다.
" 제가... 후, 아내를 떠나보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
" 셋... 그게... "
" ... "
" 아내인 누나는 카인 형에게 가버렸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은 수두룩해서 제가 책임지고 먹여 키워야 했고, 지켜야 했습니다. "
" 장하구나, 셋. "
심호흡하던 세스는 제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오는 이브를 보았다.
이브를 보던 시선을 돌려 모닥불로 옮겼다. 타닥타닥, 잿가루가 날리면서 바람에 따라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멍하니 시선을 놓으니 입에서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이 술술 나왔다.
장하다는 이브의 말에도 아무런 감흥 없다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 비록 인류 역사에 제가 딱 한 줄로 남겨지게 되긴 했지만, 형제를 원망한 적은 없습니다. "
" 아, 카인과 아벨... "
" 그렇다고 한들 인류는 제 후손이요, 아담의 핏줄이니. 그것은 변하지 않는 불변의 법칙이겠지요. "
" 네가 유일하긴 하구나. "
" 인류를 사랑하고, 사랑했습니다. 아내인 동생이 저를 버리고 카인 형에게 갔어도 그러려니 했습니다. 오히려 큰 형에게 갔으니 잘 살길 바랐죠. 큰형에게 갔어도 그녀는 제 동생이기에 여전히 아꼈습니다. "
덤덤하게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 말투 속에서 화가 보였다.
눈썹을 늘려트리고 세스를 보던 이브가 카인과 아벨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인류 최초의 살인. 제 자식들이 서로 죽이고 죽인 그 일에 대해서 말이다.
그 이야기만 없었더라면, 세스는 인류 역사에 한 줄이 아닌 몇 장을 써도 부족할 아이였다. 이브는 조용히 글썽거리다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세스는 부드럽게 웃어주며 이브의 눈가에 남은 눈물을 닦아주었다. 후손에 대해 이야기하니 아담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낳은 자식 중 유일하게 제 핏줄을 널리 퍼트린 자식이 세스였다.
세스의 입에서 나오는 아내의 이야기, 형제의 이야기에 아담은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 ... 작은 형인 아벨의 사후에 큰형 카인에게로 재가한 누님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
" 그것도 얼추 들었다. "
" 두 형들에게도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주 약간, 약간이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없다고 할 순 없네요. "
" 셋...!! "
덤덤하게 말하는 입 위로 차분하다 못해 냉정하게 가라앉은 표정이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당신들에게 원망을 두고 있노라 말하니 놀란 이브가 눈물을 보이며 입을 틀어막았다. 자식의 원망에 이브는 눈물을 보였지만, 아담은 그저 세스를 보기만 할 뿐이었다.
세스는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끓어오르는 원망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 제 자식들을 먹이고 지키기 위해 많이 힘들었습니다. 분명 제가 아버지와 어머니께 간청드렸죠. 저에게 땅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
" ... "
" 하지만 아버지는 '하늘의 새를, 땅의 물고기를, 지상에 거니는 모든 동물을 지배하라' 라는 축복만 주셨을 뿐입니다. "
" 그래, 축복을 주었지. "
" 그 축복이! 저와 제 자식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걸 모르셨겠지요. "
" ... 뭐? "
세스의 목소리에는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제 이야기나 형제의 이야기를 할 때만 하더라도 덤덤하던 그 목소리가 자식들 이야기로 바뀌니 확실히 다른 반응을 보였다. 축복의 이야기가 나오자 참았던 울분이 터지는 건지 소리가 커졌다.
세스는 분을 참기 위해 주먹을 꽉 쥔 채 바르르 떨었다.
그의 말에 처음으로 아담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 그 축복이 위협이 된다는 걸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해하지 못하셨죠. "
" 셋, 그러니까... "
" 제 자식인 에노스가 태어나고, 에노스의 아이인 게난이 태어나고, 게난의 아이인 마할랄렐이 태어날 때까지 그 축복은 위협이었습니다. 마할랄렐 이후로도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까지. 노아가 태어나고 나서도 그 축복은 축복이 아닌 위협이였죠. "
" ... "
" 물론 아직도 이해하지 못 하리라 생각합니다. "
세스는 제 부모에게 축복이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 덕분에 아담과 이브의 사후, 제가 930살까지 살고 사망할 때까지 많은 고생을 했다. 정말, 매우 많이.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홀로 자식을 키운 탓이 이유가 되기도 하겠지만, 세스는 지금만큼은 제 부모를 탓하고 싶었다.
세스는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꾹 참아냈다. 몇천 년을 참아낸 눈물인데 이야기 하나 내뱉었다고 흘릴 일은 아니었다.
" 그것도 그거지만, 형의 자식들이 매번 시비 걸어오는 것도 지켜야 했죠. "
" 어머, 카인의 아들이? "
" 네, 카인 형의 자식들이 매번 제 자식들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걸 지키기만 했습니다. 형의 아들이니 섣불리 반격하지도 못했죠. "
" 어머... "
세스의 말에 놀란 이브가 입을 틀어막고서 파르르 떨었다.
세스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생전의 일처럼 뚜렷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 고개를 내저었다. 카인의 첫째 아들이었던 에녹과 에녹의 아들인 이랏, 이랏의 아들 브투야엘, 브투야엘의 아들 므드사엘, 므드사엘의 아들 라멕. 길고 긴 시간 동안 카인의 아들들은 끈질기게 세스의 아이들을 괴롭혔다.
세스는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 제가... 제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에게 부탁한 것이 그리도 힘든 일이었습니까. "
" ... "
" 셋, 그건... 아담이... "
" 어머니! 어머니의 자식들이 힘들어했습니다. 아버지가 내려주신 그 축복 때문에요. "
어머니를 탓하기 싫었던 세스였지만, 무작정 아담의 편만 드는 이브의 모습에 버럭 소리치고 말았다. 제가 소리를 쳐놓고는 흠칫 놀라던 세스였지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아담이 이브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이브는 그 손을 붙잡았다. 아담의 곁으로 가 그의 품에 안긴 채 눈물을 흘리던 이브는 세스를 보자 다시 눈물을 흘렸다.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으며 배려해 주지 못한 부모의 잘못이었다.
항상 이브에겐 사나운 카인과 여린 아벨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런 두 형제들조차 질투하는 게 세스였기에 쉽게 마음을 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아담과 저를 가장 닮은 아이였기에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거니, 싶었던 게 문제였다.
세스 역시나 아이였음에도.
" 셋, 미안하구나... "
" ... 그런 말을 들으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
" 그럼? "
" 그저... 당신들이 떠나고 남아있던 제가 어떻게 버텼는지, 누굴 원망하고 있는지 정도 알아달라고 하는 말이지요. 가족들의 시비에 제 자식을 홀로 지켜야 했으매, 야생의 위협으로 도움을 청하였으나 하나뿐인 아버지는 저를 외면했다는 사실이요. "
" ... "
어느 순간부터인가 세스는 떨지 않게 되었다.
제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은 그저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저렇게 자신의 어머니를 울릴 생각도, 마음도 없었다. 아버지의 표정을 구기게 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제 이야기에 어머니는 울었고, 아버지는 표정을 구겼다.
세스는 미간을 찌푸린 채 양손을 모아 이마에 대고서 숨을 내쉬었다. 미세하게 파르르 떨던 떨림마저도 얼마 가지 않아 완전히 가셨다.
" 제 사후에 저를 찾지 않으신 이유... 있으십니까? "
" 그, 그건... "
" 카인과 아벨은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
세스의 말에 아담과 이브는 할 말이 더욱 없어지고 말았다.
세스의 말대로 아담과 이브는 제 사후에 카인과 아벨을 만났었다. 하지만 정작 세스는 찾지도, 만나지도 않았다.
아담과 이브가 말이 없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세스는 짧지만, 묵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고개를 숙이자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서 말했다. 건조한 말투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넘기는 어조는 상대방이 보기에 아무렇지 않아 보이기 충분했다.
" 그럴 것 같아서 저는 사후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피해 천계의 들판에서 생활했습니다. "
" 셋, 너라면 들판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
" 그곳에 가면 찾기 쉬울 테니까요. "
" 셋... "
어딘가 서글퍼 보이는 미소를 짓던 세스는 제 손을 어루만졌다.
세스는 부러 아버지인 아담과 어머니인 이브를 피해서 홀로 천계 들판을 유유자적 생활했다. 더 이상 도움을 주지 않는 아버지도, 그걸 보며 이해하지 않는 어머니도, 제 자식들을 괴롭히기만 했던 형제들도 보고 싶지 않았다.
말로는 아무렇지 않다고 했지만, 형제들에 비해 적은 애정과 관심으로 자라야 했던 세스는 부모를 원망하고 있었다. 비록 그게 미약했지만.
눈썹의 끝을 축 내리고서 울상을 짓는 이브의 표정에 세스는 적은 죄악감이 들어왔다.
아담이 표정을 구길 때는 아무렇지 않던 죄악감이 이브의 표정에 일렁거렸다.
" 저는 그저... 잘 지내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래서 안 찾았던 거고요. "
" 셋... 우리는... "
" 잘 지내면 된 거겠죠. 비록 아들 하나는 찾지 않으셨지만. "
" ... "
세스는 제 말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미안함을 느끼길 바랐다.
그들의 표정을 살펴보고는 살풋 웃더니 고개를 들어 미안한 것 없다는 듯 웃었다. 어느새 이야기하다 보니 꽉 쥐었던 주먹은 풀려있었고, 미세하게 떨리던 몸은 진정되었다.
이래서 제 자식들이 부모에게 이야기해보라고 한 것이었나, 그 생각이 들었다.
자식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이해해 주지 않던 부모였기에 저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자식들의 이야기는 항상 귀담아들어 왔었다.
" 이건... 그냥 제 푸념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아내는 떠나가고, 홀로 자식들을 먹이고 지키며 키우면서 많이... 많이 힘들었습니다. 부모의 도움 없이 홀로 버티며 위협에서도 가족을 지켜냈죠. "
" 셋... 대견하구나. "
이브의 말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대견하다, 저 말 하나 듣자고 그리 노력한 건 아니었으나 듣고 나니 그간 뭉쳐져 있던 응어리가 단번에 풀려나는 기분이 들었다.
사후 천계의 들판에서 유유자적 돌아다녔던 이야기까지 하고 나니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모닥불 앞에서 이후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니 점점 눈물이 나왔다.
조용히, 그리고 담담하게 이어가던 이야기 끝은 눈물이었다. 세스도 눈물을 흘렸고, 이브도 눈물을 흘렸으며 아담 역시 눈물을 보였다.
" 오늘 이후로 두 분께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
" 셋... 그걸로 된 거니? "
" 네. 저는 형들처럼 무언가를 하고 싶은 게 아니었으니까요. "
" 그래. 네가 그걸로 만족한다면 되었다. "
" 그러면 안녕히. "
이야기를 끝낸 세스는 아담과 이브에게 가벼운 목례를 한 뒤 자리를 떠났다.
왔을 때의 발걸음과는 달리 갈 때의 발걸음은 유난히 가벼웠다. 세스는 이제라도 부모에게 이야기하게 되어 만족한다는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과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 노래를 부르듯 지저귀는 새들.
세스는 이런 날을 위해 그렇게나 힘들게 고생했던 모양이었다. 아담과 이브를 보아야 했을 때 무겁던 발걸음이 아닌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앞을 나아가니 모든 게 좋아 보였다.
완전히 멀어지기 전, 세스는 몸을 돌려 모닥불에 앉아 흐느껴 우는 이브를 다정하게 안아주는 아담을 보았다. 구태여, 부모를 향한 원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담담하던 세스의 표정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웃음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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