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원후이는 부모의 부재가 이어진 이후 홀로 모든 걸 감당해나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힘들어했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기에 견디는 걸 버거워하지 않았다. 다만 문제라면 그 성격으로 인해 원후이는 저 스스로를 돌보지 않았다.
힘든 걸 힘든 줄 모르고, 내색하지도 않았다.
그 탓인지 아니면 천성인지는 몰라도 천뤄민은 상당히 삐뚤어진 삶을 살고 있었다.
무엇보다 부모의 부재에 힘들어하는 건 그였으니, 어린 동생이 있긴 하지만 그건 별개의 문제였다.
" 뤄민. 적당히 해. "
" 뭘? "
" 알아들으면서 모르는 척 그만하고. "
" ... 그러니까, 뭘? "
" 그 망할 남자랑 헤어지라는 거잖아.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니. "
" 언니가 무슨 상관이야, 내버려 둬. "
" 가족이니까 걱정하는 거잖니. "
원후이의 말에 뤄민은 고개를 숙이고서 중얼거렸다.
언제부터 가족을 신경 쓰기는 했다고, 뤄민은 제가 중얼거리고도 아차 싶었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원후이였다. 그걸 뤄민도 알고, 막내인 원루도 알고 있었다.
아차 싶었던 뤄민은 힐끗 제 언니의 눈치를 살폈다.
뤄민의 중얼거림을 들었던 모양인지 원후이의 표정은 서글픈 표정으로 변했다. 뤄민은 제 언니의 표정에 다급하게 말을 마무리하고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갔다.
" 아, 아무튼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
" 하... 언니, 뤄민 언니는 그냥 내버려 둬. "
" 원루, 하지만... "
" 언니도 알고 있을 거야. 조만간 정리하지 않을까? "
" 그렇겠지? 누구보다 똑똑한 게 뤄민이니까... "
뤄민은 문을 닫고서 등을 기댄 채 주르륵 흘러내렸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두 자매의 대화에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사실 알고 있었다. 남자친구가 일도 안 하고 제게서 기생충 같은 생활을 한다는 것은. 거기다 저보다 더 어린 여자를 옆에 끼고서 거리를 걷는 모습도 하필이면 원후이와 있을 때 들켰다.
그때의 심정은 차마 말하지 못할 정도로 암담하고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뤄민은 심호흡하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탈색으로 인해 버석거리는 머릿결이 손끝에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남자친구가 있기에 그럴 때마다 제가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걸 자각한다.
이 사실은 남자친구도, 원후이도, 원루도 모를 테지만.
" 하... 아빠... 보고 싶어... "
뤄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 인형을 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사주셨던 인형은 이제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애착 인형이라 생각해서 그런지 불안하거나 짜증 나거나 슬플 때마다 안고 있으면 그나마 기분이 풀렸다.
인형을 끌어안고서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뒤적거렸다.
그러고는 전화 목록에 떠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 화면에는 '아부지' 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뤄민은 가끔 기분이 우울하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돌파구를 찾는 것처럼 받지 않을 아빠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가지만 상대는 끝까지 받지 않는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뤄민은 다급하게 전화를 껐다.
" 뤄민아. 언니는 일 가야 하니까, 너랑 원루 밥 챙기고 너도 출근해. "
" ... 알았어. "
" 그럼 언니 출근한다. "
세 사람의 일상은 어찌 보면 단조로워 보였지만, 누구보다도 위태로웠다.
첫째인 원후이는 임상심리학자로 일하고 있지만, 자신을 돌보는 걸 잊었고 뤄민은 패스트푸드에서 일하며 일상을 보내지만 무언가 부족해 보였다.
가장 위태롭다고 할 사람 없이 모두가 위태로웠지만, 유독 괜찮은 척하는 원루가 있었다.
고등학생 3학년이기에 항상 열심히 공부도 하고, 말썽도 피우지 않는 모범생이었지만 학교에서 행사가 열리면 참여하지 않는 학생이었다.
모두가 원루를 왕따시킨다기보단 원루가 모두를 왕따시키는 것에 가까운 학교생활도 포함이었다.
" 야, 원루. 밥 먹고 학교 가. "
" 안 챙겨줘도 되는데. "
" 언니가 먹고 가라잖아. "
" 아! 알았어... "
원루는 교복을 갈아입고 나오자 밥을 먹으라는 뤄민의 말에 투정 부리듯 답했다.
뤄민이 말하는 언니가 자신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원후이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밥상 앞에 앉아야만 했다. 결코 뤄민의 눈빛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먹고 가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어쩔 수 없이 원루는 밥을 다급하게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 안에 있는 음식을 우물거리며 씹다가 삼키고는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외투 주머니를 뒤적거려 워크맨을 꺼내 이어폰을 연결하고 귀에 걸었다.
" 뤄민 언니. 언니도 잘 생각해봐. "
" ... 뭘? "
" 하... 원후이 언니의 말 말이야. 언니가 더 아까운 거 알지? "
" ... "
" 언니는 잘할 거라고 믿어. "
" 얼른 가기나 해. "
원루는 등교하기 전, 뤄민에게 충고에 가까운 말을 건넸다.
분명 원후이 언니는 출근하면서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뤄민 언니의 남자친구로 가득 차서 걱정할 게 뻔했다. 언니가 더 신경 쓰기 전에 알아서 처리하라는 말이었다.
그 말의 뜻을 알아차린 뤄민이 숟가락을 움켜쥐며 들어 올리며 얼른 가버리라는 말에 원루는 웃으며 다급하게 뛰어나갔다. 집에 남겨진 뤄민은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밥그릇을 보았다. 이렇게까지나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문제가 있는 건 제 남자친구인 건지, 아니면 저인 건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묵직한 무게의 숨을 푹 내쉬었다.
" 원후이 씨, 이 파일 좀 봐주시겠어요? "
" 아, 네. 잠시만요... "
원루의 예상대로 원후이는 뤄민의 남자친구에 관한 걱정으로 일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같이 일하는 직원이 내민 파일이 아니었더라면 계속 고민하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이제 생각을 그만하고 일에 집중하자며 속으로 스스로를 다독인 원후이는 파일을 살펴보았다.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며 범죄 위주의 심리 상담을 진행하는 임상심리학자인 원후이는 동료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유명한 이유는 다양했다. 소녀 가장, 다정한 사람, 강한 사람, 검사의 여자친구, 힘들 줄 모르는 사람.
파일을 전부 확인한 원후이는 다시 동료에게 파일을 넘긴 뒤 휴대폰을 보았다.
" ... 요즘 많이 바쁜 모양이네. "
사실 원후이는 뤄민을 걱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물론 가장 걱정되는 동생이었지만, 요즘 검사인 남자친구가 너무 바쁜 건지 연락조차 늦어져서 서운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그에게 티를 내지 않고 오롯이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뤄민의 걱정과 남자친구의 기다림 탓인지 이상하게 오늘따라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걸 알아차린 원후이의 상사이자 교수인 사람이 원후이에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 원후이 씨. 오늘은 더 일이 없을 것 같으니 이만 가서 쉬는 건 어떤가? "
" 아. 그러면 남아있는 일을... "
" 아니, 이만 가서 쉬라니까? "
" 내일 해야 할 일을 미리... "
" 거 참, 이제 일 없으니 가보게. 내일 일은 내일 해. "
" 네... "
가보라는 교수의 말에도 원후이는 남아서 다른 사람의 일을 도와주려고 했다.
하지만 호통에 가까운 말에 결국 퇴근하기 위해 짐을 싸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이른 퇴근 시간 탓이었는지 원후이는 빈 시간에 아침에 있었던 일이 신경 쓰여 뤄민에게 가기로 했다.
차에 올라타고 짐을 조수석에 둔 채 뤄민이 일하는 패스트푸드 가게로 향했다.
가게 앞에 잠시 주차를 하고는 가방을 들고서 내렸다. 패스트푸드 가게로 들어가려던 찰나 카운터에 있는 익숙한 얼굴이 보여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지만, 이내 앞에 있는 손님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모습에 멈추었다.
" 뤄민. 돈 좀 줘. "
" 뭐? 어제도 받아 갔잖아. "
" 그건 어제고. 오늘 모텔 갈 돈이 없다고. "
" 어머, 오빠. 이 사람이 오빠가 말한 사람이야? "
" 엉~ 내 돈 지갑. 달라면 주거든. "
" ... "
원후이는 제가 듣고 있는 내용이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그녀의 직업이 심리학자이다 보니 습관적으로 뤄민의 남자친구와 그 옆에 있는 어린 여자의 심리를 파악했지만, 그들은 양심이라는 게 티끌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말함으로서 뤄민이 상처를 받을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껴 가까이 다가갔지만, 그 순간 뤄민의 표정이 충격에 빠진 듯 창백해지며 어두워지자 원후이의 분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누구보다 눈물이 많은 제 동생, 부모의 부재를 가장 힘들어하는 동생.
원후이는 사실 알고 있었다. 뤄민이 얼마나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는지. 하지만 저뿐만 아니라 막내인 원루도 부모를 그리워할 게 분명하기에 애써 외면해왔었다. 그렇지만 오늘 뤄민의 표정을 보고 나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 당신, 큰코다치기 싫으면 이만 가는 게 좋지 않을까. "
" 어엉? 넌 또 뭐야? "
" 오, 오빠... "
" 나? 얘 언니인데. 문제라도 있어? "
" 하, 뤄민. 너 언니까지 불렀냐? "
" 부른 적 없어. "
지금이라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보기 위해 세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원후이는 제 등장에 겁을 먹은 어린 여자와 건방진 남자의 모습에 코웃음 쳤다.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강하게 나가야만 했다. 남자가 뤄민에게 시비를 부치자 뤄민이 답했다.
뤄민은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남자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녀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 됐지? 당분간 찾아오지 마. "
" 진작에 줄 것이지. "
" 오, 오빠~ 우리 이제 가자. 응? "
" 뤄민, 우린 간다~ 언니 간수나 잘해. "
" 뤄민아. "
" ... 왜 왔어? "
돈을 건네주던 뤄민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남자는 겁을 먹은 듯 움찔거렸다.
애써 괜찮은 척 웃으며 돈을 쥐고서 주머니에 넣은 뒤 어린 여자와 함께 원후이의 옆을 지나갔다. 지나가면서 비꼬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원후이는 화가 나는 걸 참으며 뤄민을 불렀다.
정작 돌아온 뤄민의 말은 왜 왔냐는 타박이었지만, 원후이는 가만히 뤄민을 보았다. 가게 내에서 직장 동료들의 눈치를 보고만 있던 동생이 신경쓰였다.
" ... 오늘 마치면 바로 집으로 돌아와. "
" 안 그래도 그럴 거야. "
" 네가 추천하는 세트 3개만 부탁할게. "
" 어? "
" 지금은 손님으로서 주문이야. "
" 아, 세트 3개. "
원후이는 뤄민이 조금 있으면 마친다는 걸 알고 있기에 미리 밥을 사 들고 갈 생각이었다.
금방 나온 버거 세트를 받고서 돌아 나왔다. 차량에 탑승한 뒤 조수석에 봉투를 올려두었다. 뤄민에게는 바로 집으로 오라고 해놓고는 원후이는 가게 앞에서 벗어난 이후 도로 갓길에 주차해 두고서 한참을 고민했다.
언니로서 뤄민에게 충고만 하고 끝낼 생각이었다.
뤄민도 성인이었고, 야무진 아이였기에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잘 버틸까 그 생각뿐이었지만 그것이 전부 제 오판이었고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뤄민은 아직도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적에 머물러있었다.
" 어? 어, 언니. 오늘 일찍 마쳤네? "
" ... 원루, 너는 왜 이 시간에 집에 있니? "
" 그, 그게... "
" 학교 안 갔어? "
" 아니! 갔어! 오늘 행사가 있는 날이라 일찍 마쳤어. "
" 그래? "
집으로 돌아온 원후이는 소파에 늘어진 채 티비를 보고 있던 원루를 발견했다.
뤄민에 이어 원루까지 이런 일이라니, 이마를 짚고서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들고 올라온 가방과 서류, 버거가 담긴 봉지를 식탁 위에 올려두며 원루에게 말했다.
오늘 행사가 있는 날이라 일찍 마쳤다는 말에 원후이는 그대로 믿었다.
원루라면 저에게 거짓말을 할 리 없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원후이의 생각대로 원루는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그게 비록 행사에 참여하지 않고 교정을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온 걸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 이건 뭐야? "
" 햄버거 세트. 조금 있다가 뤄민이 오면 같이 먹을 거야. "
" 정말? 뤄민이 언니가 일하는 가게 햄버거 맛있다던데. "
" 그래? 뤄민이가 알아서 맛있는 걸로 추천해줬겠지. "
" ... 설마 뤄민이 언니가 추천하는 걸로 사 온 거야? "
" 응. "
원루는 원후이의 말에 충격에 빠졌다.
이유는 뤄민은 세 자매 중에서 막입에 가까운 사람이라 맛있는 것과 맛없는 걸 가리지 않았다. 분명 원후이라면 그냥 먹겠지만, 유독 먹는 걸 예민하게 가리는 원루라면 달랐다.
원루는 충격에 잠겨 식탁에서 벗어나 다시 소파에 드러누웠다.
원후이 역시 주방을 뒤로하고 방으로 돌아가 간편한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지금 어떻게 엉킨 실타래를 풀어야 할지 계획을 짜고 있었다. 쉽게 풀리진 않겠지만, 가족이니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 뤄민 씨. 앞으로 남자친구에게 가게로 오지 말라고 해주세요. "
" 아, 네... 죄송합니다. "
" 뤄민 씨가 일을 잘해서 자르진 않겠지만, 그 남자는 너무 민폐네요. "
" 알겠습니다. "
뤄민은 퇴근 준비를 하면서 매니저의 말에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남자친구가 매번 바뀌는 어린 여자를 옆구리에 끼고서 가게를 찾아오는 게 한두 번의 일이 아니었지만 계속 반복되니 손님들에게 폐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 정도는 처음에 찾아왔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매번 찾아오지 말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뻔뻔하게 적반하장 하는 사람이 남자친구였다. 뤄민은 또 어떻게 달래고 못 오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아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 뤄민 씨. 궁금한 게 있는데... "
" 네, 말씀하세요. "
" 도대체 뤄민 씨. 왜 그런 남자랑 사귀는 거야? "
" 네? "
" 아니, 그렇잖아. 뤄민 씨가 너무 아까운데. "
" 아... "
같이 일하는 직원의 질문에 뤄민은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무마하려고 했다.
주저리 이야기가 길어지기 전에 인사하고서 가게를 벗어났다.
아버지의 20년 된 스쿠터에 올라타면서 헬멧을 쥐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남자친구와 사귀면서 그가 저보다 어린 여자를 옆구리에 끼고서 다니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걸 가족에게 들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이미 한 번 들키긴 했지만, 그보다 더한 걸 들켰다는 창피함과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이럴 때면 뤄민은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다.
" 저 수많은 별 중에 아버지도 계시겠지... "
어릴 적 들었던 말 중에 유달리 기억나는 구절이었다.
죽은 사람은 별이 되어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준다는 이야기. 뤄민은 가볍게 숨을 내뱉은 뒤 헬멧을 쓰고 스쿠터 시동을 켰다.
오래된 스쿠터이다 보니 시동을 켜는 것도 오래 걸렸고,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가는 중에도 수시로 꺼지기도 했고, 배기음으로 털털거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하지만 뤄민은 그 오래된 스쿠터를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더 아끼고 월급을 털어서 정비하곤 했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스쿠터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 언니, 이제 와? "
" 어? "
" 기다리다가 뱃가죽이 허리에 붙는 줄 알았어. "
" 먼저 먹지... "
" 원후이 언니가 다 같이 먹을 거래. "
원루의 말에 뤄민은 움찔거렸다.
가끔 먹는 걸 제외하고는 항상 밖에서 먹고 오거나 아니면 집에 와서도 혼자 밥 먹는 게 일상이었던 원후이였다. 뤄민은 가게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려고 그러는구나, 짐작했다.
뤄민은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원후이가 신경 쓰여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려 했으나 원루의 투정에 당장 코 앞까지 오고 말았다. 잔뜩 긴장한 뤄민이 식탁에 느릿하게 앉았다. 평소보다 더 느려진 그녀의 행동에 원후이와 원루는 이상하다는 듯 보았다. 모두가 식탁에 앉자 원후이가 봉투 안에서 세트를 하나씩 꺼내 각자의 앞으로 내밀어 주었다.
원후이가 덤덤하게 버거를 까면서 말했다.
" 먹자. 먹고 나서 이야기할 게 있으니까. "
" 응, 잘 먹겠습니다~ "
" ... 잘 먹을게. "
" 어? 뭐야. 진짜 맛있는 거네. "
" ?? "
" 난 또 뤄민이 언니가 이상한 거 추천하지 않았을까 했지. "
" ... 그냥 먹어. "
식탁 위에서 흐르는 이상한 기류에 원루가 눈치를 보다 분위기를 바꾸고자 장난스레 말했다.
그걸 알아보지 못한 뤄민이 원루를 보다가 식은 표정으로 답하고는 원후이를 뒤따라 버거를 먹었다. 원루는 분위기를 바꾸려다가 괜히 더 이상해진 분위기에 머쓱해져선 버거를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가족들의 식사라고 하기엔 너무 조용하고 대화조차 없는 식사가 이어졌다.
가장 먼저 먹은 사람은 뤄민이었다.
그녀가 아무래도 원후이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절로 빠르게 먹을 수밖에 없었다. 소스가 묻은 입가를 닦아내며 먹어 치운 쓰레기를 정리했다. 은근슬쩍 일어나려고 하자 원후이가 버거를 먹으며 말했다.
" 앉아. 나 다 먹고 나서 할 이야기 있으니까. "
" ... 으응. "
" ... 근데 무슨 이야기야? "
" 일단 먹고. "
원후이의 말에 바깥으로 빠져나갔던 뤄민의 다리가 다시 식탁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던 원루가 용기 내 원후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일단 먹고 이야기하자는 원후이의 말에 무참히 씹히긴 했지만, 원루는 얼마 남지 않은 버거를 입안에 털어 넣고는 우물거렸다. 원후이 역시 남은 버거를 다 먹고 나서 쓰레기를 정리했다.
정리를 다 하고 나서도 조용한 원후이의 모습에 뤄민은 괜히 긴장감에 입안이 말라갔다.
또 잔소리하면 어쩌나, 남자친구와 헤어지라고 하면 어쩌나 그런 걱정들이 앞섰다. 그런 뤄민의 고민에 비해 원후이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 앞으로 주말마다 가족회의를 할까 해. "
" 갑자기? "
" 응. 예를 들자면 일상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한다거나. "
" 한 게 없으면? "
" ... 뭘 먹었고, 무엇을 보았고, 그런 거라도 좋아. "
" 음... 재밌을 거 같은데? "
" 슬픈 거라던가, 힘든 것도 포함이야. "
" ... 그거, 나 때문에 하는 거야? "
" 아니, 모두가 힘들어하니까. "
원후이는 모두라는 단어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포함된 척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가장으로서 일을 하면서 한 번도 힘들다고 여긴 적 없었다. 동생들의 의식주를 챙기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고, 그 덕분에 불편함 없이 지냈다.
오히려 뿌듯하면 뿌듯했지, 힘든 적은 없었다.
원후이의 말에 뤄민이 고민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뤄민이 허락하자 원루가 화색이 돌며 화사하게 웃더니 저도 따라 고개를 끄덕거렸다.
"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은... 가족 여행을 할까 해. "
" 가족 여행? "
" 응. 가볍게라도. 공원에 산책하러 간다거나, 강가에 돗자리 깔고 논다던가. "
" 그거 재밌겠는데? "
" 그리고 뤄민. 너의 문제는 네가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만약 너무 힘들어지면 언니에게 말해. 나는 기꺼이 도와줄 테니까. "
" 언니... "
" 뭐야, 감동이잖아... "
" 그건 원루, 너도 포함이야. "
가족 여행이라는 말에 가장 큰 반응을 보인 사람은 원루였다.
의외로 무감해 보이던 아이가 반응을 보이자 원후이는 제가 한 선택이 맞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뤄민도 걱정이었지만, 원루 역시 걱정이었기에. 아직 학생이라는 어린 동생이 말썽 한 번 부린 적 없이 크고 있다는 건 어찌 보면 좋은 반응은 아니었다. 그 나이대의 학생이라면 한 번이라도 일상 탈출을 하고 싶을 텐데, 분명 원루는 제가 힘들까 싶어 그러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원후이는 뤄민이 고민하는 모습에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붙잡고서 말했다.
앞으로 일체 이야기 꺼내지 않겠다는 말이기도 했지만, 힘들 때 기대게 해줄 가족이 있다는 걸 잊지 말라는 말이기도 했다. 그 말뜻을 알아차린 뤄민이 울먹거리자 지켜보던 원루가 장난치듯 말했다. 그에 원후이가 원루의 손을 잡아주었다.
" 언니, 미안해. 고마워. "
" 나는 언니들이 너무 좋아! "
" 나도 고마워, 이제까지 신경 써주지 못해서 미안해. "
세 사람은 식탁 위로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우는 얼굴로 웃었다.
그날 세 사람은 오랜만에 생긴 여유로움과 간만의 휴식이라는 시간에 단란한 가족끼리의 시간을 보냈다. 서로 바빠서 신경 쓰지 못했던 만큼이나 더 값진 시간이었다.
밤새 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들기도 했다.
다음 날, 원후이와 뤄민은 처음으로 아침에 화가 없는 대화를 나누어 어색했고, 원후이가 출근 후 뤄민을 지켜보던 원루가 뤄민을 처음으로 끌어안아 주고서 등교했다.
뤄민은 사랑스러운 제 가족들이 아직 곁에 남아있음을 새로이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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