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방위 육사 고등학교, 이곳은 괴수 출몰로 인해 맞서 싸우는 방위대를 위하여 만들어진 학교다.
유명하지만 그만큼 위험한 세상 속에서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배우고자 창설된 학교. 4월에 1학년 입학식이 열렸다. 이치카와 역시 오늘부터 이 학교에 재학하게 된 학우였다.
이치카와는 어떤 입학식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 반, 걱정 반이 가득했다.
널찍한 강당에 들어서자, 기대감이 사그라들고 걱정이 크기를 키웠다. 떨리는 눈길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재학 중인 2, 3학년의 선배들은 전부 강당 양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1학년들을 보고 있었다.
입학과 동시에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반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고군분투가 시작되었다.
" 저기, 학생. 서방사단이 잘 어울릴 거 같은데... 오지 않을래? "
" 아니지. 저 학생은 동방사단이야! "
" 다들 조용. "
선배들이 모두 신입생들을 보며 득달같이 달려들 기세였다.
시끌벅적하고 웅성거리는 소음이 강당의 무대 위 단상에 선 사람의 말 한마디에 조용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순식간에 조용해진 탓에 모든 신입생들이 놀라서 무대 위 단상에 선 사람을 보았다.
앞머리가 콧등까지 내려와 덥수룩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이치카와는 그 사람을 보며 신기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치카와의 옆자리에 서 있던 사람은 불만이었는지 인상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치카와의 눈에는 그게 불만으로 보였다.
당황한 이치카와의 시선을 느꼈던 모양인지 옆사람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 아, 안녕. 같은 신입생이가? 잘 부탁한데이. "
" 아... 네, 이치카와 아리스... 라고 해요. "
" 내는 호시나 소우시로라칸다. "
두 사람은 신입생 환영식에서 친해지게 되었고, 그건 교실로 돌아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도쿄 방위 육사 고등학교에서는 입학 이후 1년간 소속 없이 지내면서 2학년 때 지낼 소속을 정하게 된다. 그전까지는 다른 고등학생 1학년과 다를 바 없는 게 특징이었다.
교실로 들어온 이치카와는 자신의 자리 옆에 앉는 소우시로를 보았다.
수업 시작 전에 두 사람은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교실 앞문이 열리고, 선생님으로 보이는 사람 한 명과 교복을 입은 무리들이 우루루 들어와 교탁에 섰다.
이치카와는 교탁에 사람을 보며 살짝 놀란 눈치를 보였다.
" 큼, 지금부터 선배들의 PR 시간이 있겠다. "
" 반갑다. 나는 도쿄 방위 육사 고등학교의 학생회장인 나루미 겐이라고 한다. "
" 와~ "
" Excellent! 반갑데이~ 신입들! 내는 선도부의 부장을 하고 있는 호시나 소이치로라고 한데이. "
" 호시나...? "
" ... 망할 형이야. "
아까 강당에서 모두를 조용히 시켰던 더벅머리 남자가 교탁에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나루미, 학생회장이었다. 나루미의 소개가 끝나자, 뒤에 있던 남자가 불쑥 튀어나와 자신을 소개했다. 옆머리를 길게 늘리고, 앞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긴 채 길게 땋아 내린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소우시로와 성이 같았다.
이치카와가 놀란 표정으로 소우시로를 보자, 소우시로가 고개를 숙인 채 이치카와에게 말해주었다.
사투리를 쓰는 부분이라던가, 얇게 뜬 실눈이 소우시로와 닮아있었다.
선배들의 PR이 끝나자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모두가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을 때 소우시로가 일어나 어디론가 가버렸다. 홀로 남겨진 이치카와는 조용한 탓에 주변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 이치카와, 밥 묵자. "
" 아, 소우시로. 밥은 별관에 있는 식당에서 먹으면 된대. "
소우시로가 돌아왔을 땐 점심시간이었다.
그 사이에 누구와도 친해지지 못한 이치카와는 조금 시무룩해진 상태였지만, 소우시로의 등장에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식사를 마친 뒤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하교 시간이 찾아왔다.
오늘은 입학식이라 별다른 수업을 진행하지 않았기에 일찍 마치게 되었다.
이치카와는 먼저 가버린 소우시로를 보내고, 홀로 하교하게 되었는데 신발을 갈아신고, 신발장에 실내화를 넣을 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껄렁거리는 모습이 딱 보아도 불량한 학생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시시덕거리며 저들끼리 이치카와를 상대로 희롱하기 시작했다.
" 이야~ 신입생이네? 혼자 하교해? "
" 오빠들이랑 하교할까? "
" 아, 저, 저기... "
이치카와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쓴소리조차 내뱉지 못했다.
입술을 꾹 물고서 무서워도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능글맞게 굴며 다가오는 학생들의 명찰은 옅은 회색이었다. 도쿄 방위 육사 고등학교의 규칙 중 하나.
1학년은 하얀색 명찰을, 2학년은 옅은 회색 명찰을, 3학년은 검은색 명찰을 가진다.
그들이 끼고 있는 건 옅은 회색, 즉 2학년임을 말하고 있었다. 당황한 이치카와가 안절부절 못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상황을 정리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치카와에게 있어 도움의 손길이 다가온 것이었다.
" 어라? 이것 봐라? 지금 니들 여서 뭐 하고 있는기고? "
" 호, 호시나 선배... 아, 아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
" 이제 하교하고 있길래 후배 챙겨주려고... "
" 낸테 구라는 안 통하는 기라~ 얼른 가라잉? "
곤란스러운 일을 당하고 있던 이치카와에게 다가온 사람은 소이치로였다.
처음 사귄 친구의 형제. 그의 등장만으로도 불량 학생들은 겁을 먹은 듯 움찔거리며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장난스럽게 말하는 소이치로의 태도에도 불량 학생들은 움찔거리더니 후다닥 멀리 가버렸다.
이치카와는 곤란하던 상황이 그의 등장만으로 정리가 되어버리자, 신기하다는 듯 소이치로를 보았다.
소이치로는 몇 마디 하지 않았는데도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학생들을 보고서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다 그들이 전부 사라졌을 때, 발걸음을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곁에 남아있는 이치카와의 모습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살짝 당황한 소이치로가 이치카와를 보았다.
" 여즉 안 가고 뭐하고 있는기고? "
" 아, 안녕하세요. 감사하다는 인사... 드리고 싶어서요. "
" 됐다, 마. 그 뭐시라고. "
" 감사합니다! "
이치카와는 허리를 숙여 소이치로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다급한 표정으로 어설퍼 보이는 이치카와의 모습에서 소이치로는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함께 그녀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이런 적은 또 처음인지라 무엇인지 정의를 내릴 수 없었다.
이치카와가 돌아간 뒤에도 학교에 남은 소이치로의 머릿속은 여전했다.
단정하면서도 조용한 그 소녀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도쿄 방위 육사 고에 입학한 이례 처음 보는 스타일의 여학생이라서 관심이라도 가는 건가,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치카와는 운동장을 건너 달려가는 내내 두근거리는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몇 달간 두 사람 사이에서 접점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이치카와가 교실에서 소우시로에게 입학식 날 있었던 이야기를 하며 소이치로가 도와주었다는 것을 알려주기만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소우시로가 소이치로에게 전하면서 이치카와가 고마워하더라, 하고 전달만 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었다. 대신 이치카와의 내면에서 소이치로를 향한 마음이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달라진 게 있다면 소우시로는 학생회에 들어갔고, 이치카와는 어디로 갈지 아직 고민하고 있었다. 소우시로가 학생회는 어떠냐고 권유를 해주기는 했지만, 여전히 고민이었다.
" 아니믄 선도부에 드가볼래? "
" 내 성격에...? "
" 학생회에서 같이 하니까 내랑 같이 있을 수 있다아이가. "
" 으음... 체험은 가능하지? "
" 하모! 지금 당장 가자! "
이치카와와 소우시로는 몇 달 동안 함께 지내면서 친해졌다.
그 예로 처음에 만났을 때, 존댓말을 하던 이치카와가 어느 순간부터 소우시로에게 반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다른 학생들에게는 아직까지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는 그녀였지만, 유일하게 소우시로에게만 반말을 썼다.
선도부, 그곳은 학생회의 직속 그룹으로 교내의 모든 규율을 살피는 곳이었다.
등교 시간에 교문에서 학생들의 복장 검사는 기본이었고, 반에서 수업을 듣지 않고 땡땡이를 치는 학생을 잡는 것도 그들의 일이었다. 수업 시간 중에 로테이션으로 돌아가며 교내와 교외를 돌아다니는 것도 포함이었다.
무엇보다 소심하고 말이 적은 이치카와가 처음으로 체험을 꺼낸 이유는 그곳에 소이치로가 있기 때문이었다.
" 뭐고? 소우시로 아이가? "
" 그러네. 야, 넌 여기 왜 왔냐? "
" 나루미 회장님이 알 필요 없습니데이. 형, 선도부에 신입 데꼬왔다. "
" 시, 신입이라니? 소우시로... 난 분명 체험이라고... "
" ... 이치카와? "
" 아, 안녕하세요! 호시나 선배! "
두 사람은 곧장 학생회실로 향했다.
문을 여는 순간 그 안에는 나루미와 소이치로가 함께 서류를 보고 있었다. 소우시로는 문을 열자마자 시비를 걸어오는 나루미의 말을 깔끔하게 답을 함으로서 무시를 한 뒤 자신의 형을 보았다.
신입이라는 말에 당황한 이치카와가 소우시로의 등 뒤에서 나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너무 당황한 탓인지 이치카와의 눈이 동그랗게 뜬 채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말까지 더듬고 있을 때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소우시로가 고개를 들어 이치카와를 보았다.
이치카와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이치로의 목소리에 얼굴을 붉히며 다급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 소우시로? 신입이라니 뭔 말이고? "
" 말 그대로 신입. 야 좀 데꼬 댕기라고. "
" 이치카와, 선도부에 들어오는기가? "
" 아, 아니... 그게... 네에... "
" 잘 부탁한데이! "
이치카와를 보던 소이치로의 시선이 소우시로에게로 옮겨갔다.
그의 시선이 멀어지자, 이치카와가 다급하게 소이치로의 뒤로 숨어버렸다. 짧게 한숨을 내쉬던 소이치로가 자신의 뒤로 숨어버린 이치카와를 소이치로의 앞으로 밀어주며 말했다.
그러자 소이치로의 시선이 다시 이치카와에게로 향했다.
선도부에 들어오냐는 소이치로의 말에 이치카와가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잔뜩 붉힌 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치카와가 선도부에 들어온다는 말에 소이치로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조금 떨어져 있던 나루미가 소이치로의 표정을 보더니 소우시로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속삭였다.
" 야, 솔직하게 말해. 너 다 알고 붙인 거지? "
" 무신 소립니꺼? 지는 모르겠네예. "
" 허참... 그나저나 너 왜 요즘 우리 집에 왜 안 놀러오냐? "
" ... 하, 둔한 바보천치가 하나 있어가 안 갈랍니더. "
" 뭐? 우리 집에 그런 게 있다고? "
나루미는 재밌다는 듯이 속삭였지만, 소우시로는 끝까지 모르는 척하며 넘어갔다.
그러다가 왜 집에 안 놀러 오냐는 말에 소우시로가 묵직한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소우시로의 말에 무슨 뜻이냐는 듯 나루미가 반응했다. 그의 반응에 소우시로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나루미를 보던 소우시로의 시선이 소이치로와 이치카와에게로 향했다.
그는 자신의 연애가 생각보다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으니, 소이치로와 이치카와의 연애를 응원하기로 했다. 나루미에게는 모르는 척하며 넘겼다고는 하지만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소이치로에 대해 말할 때마다 이치카와가 움찔거리며 얼굴을 붉힌다던가.
아니면 이치카와에 대해 말해줄 때의 소이치로 반응을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소이치로의 모습을 보면 아직 자각하지 않았다는 게 보여서 이치카와의 고생이 눈에 불 보듯 뻔했다.
' 결국 니도 나랑 같은 길을 가겠지만서도... 그래도 니는 가능성이라도 있다아이가. '
심지어 가족인 자신이 살짝 등이라도 밀어주면 보기 좋게 넘어갈 소이치로이기에.
적어도 자신보다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두 사람을 살피던 소우시로의 시선이 아직까지도 궁금증에 생각하고 있는 나루미에게로 향했다. 그를 볼 때마다 소우시로는 절로 한숨이 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 내일부터... 바로요? "
" 그렇지, 내일도 등교한다아이가? "
" 네... 그렇죠...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
" 걱정하지 말그레이. 일단 내도 있을기고, 점마도 있을기라. "
" 소우시로도요? "
이치카와와 소이치로는 대화하는 내내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이치카와의 뺨은 붉게 수줍음이 물들기도 했다. 이치카와는 소이치로를 보며 '나, 이 사람 좋아하고 있어요.' 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티 내는 듯했고, 소이치로는 자신의 감정을 여전히 자각하지 못한 채 이치카와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당장 내일이라는 말을 듣고서 집으로 돌아온 이치카와는 자신의 휴대폰을 뚫어지게 보았다.
전화번호가 등록된 사람의 숫자가 고작 5뿐이었지만,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워낙 조용한 성격 탓에 친구를 사귀는 게 쉽지 않았다. 그나마 말랑한 부분 덕분에 인사를 하고 다니는 사람은 있었지만, 가까운 친구는 없었다.
부모님 두 분을 제외하고서 등록된 3명에게 너무 고마웠다.
" 잘... 부탁... 드립니다... "
[ 19 : 24
받는 이 : 호시나 소이치로
제목 : 1학년 이치카와 아리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이치카와는 나루미와 소이치로 중에서 누구에게 문자를 보내야 할지 고민이었다.
중도 편입임을 봐준 나루미에게 보내야 할지 아니면 흔쾌히 자신을 선도부에 받아준 소이치로인지. 결국 그녀가 택한 건 소이치로였다. 아직은 나루미를 상대로 문자를 보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솔직히 나루미가 조금 무섭기도 했다.
물론 소이치로에게 문자를 보내는 것도 엄청나게,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긴 했지만, 나루미보다는 아니었다. 적어도 소이치로에게 문자를 보내면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으니까.
[ 19 : 26
보낸 이 : 호시나 소이치로
제목 : 나도 잘 부탁한데이~
내일 위해서 힘내보드라고~ 잘 부탁한데이! ]
" 허억... 바로 답장 주셨어... "
띠링, 휴대폰에서 나는 소리에 이치카와가 다급하게 폰을 보며 어떤 알람인지 확인했다.
답을 기대하지 않고 문자를 보낸 것이지만, 이리 친절하게 답을 주는 그의 마음에 감정이 격하게 차올랐다. 잘 부탁한다는 말에 어떤 답을 이어갈지 한참 고민하며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자신의 말에서 좋아하는 감정이 묻어나와 버리면 어쩌지?
묘한 불안감과 함께 은근히 그가 알아주길 바랐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기쁘면서도 힘들다는 걸 알았다. 만화에서나 보던 그 감정을 직접 느끼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고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잠들 시간을 훨씬 넘어버리고 말았다.
" 아... 헉, 지각이네...?! "
편지 답도 하지 못한 채 늦은 시간까지 고민한 탓에 늦잠 자버리고 말았다.
이치카와는 지각이라는 사실에 다급하게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고 양치를 급하게 끝낸 뒤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헐레벌떡 다급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교문에 도착했을 땐 이미 선도부와 학생회가 나서서 복장 확인을 하고 있었다.
이치카와는 달리던 다리를 멈추고 다급한 손길로 흐트러진 옷을 정리했다. 옷 정리까진 좋았지만, 어떻게 나서야 할지 몰라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등 뒤에서 툭툭 두들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치카와의 고개가 뒤로 돌아가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 이치카와, 니 여서 뭐하는데? "
" ... 호시나 선배! "
" 니 지금 온기가? "
" 어제... 늦잠 자고 말았어요. "
" 그카믄 혹시 혼날까 봐서 몬 드가고 있는기가 "
" 네... "
이치카와를 툭툭 건든 사람은 바로 소이치로였다.
소이치로는 정리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어딘가 묘하게 어설픈 모습을 하고 있는 이치카와의 행색에 그녀가 지각한 상태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짧게 한숨을 내쉬던 그는 어설프게 정리된 그녀의 교복을 정리해주었다.
이치카와는 자신의 옷을 정리해 주는 소이치로의 손길에 움찔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소이치로가 상체를 숙여 이치카와의 얼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행동에 이치카와가 움찔거리더니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괜스레 입술을 우물거리기도 했다.
그 순간 소이치로가 이치카와의 머리카락에 묻은 먼지를 떼어주며 서서히 멀어졌다.
" 뭐고, 이치카와. 지금 뭘 기대한기고? "
" 아, 아, 아니에요...!! "
" 인자 드가자. "
소이치로는 이치카와의 반응에 웃다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서 교문으로 향했다.
이치카와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자신의 손을 붙잡고 교문으로 가는 소이치로의 모습을 보았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싶은 생각에 걱정 가득한 눈을 하고 있었다. 소이치로는 교문 앞에 서 있는 다른 선도부 학생들을 보며 웃었다.
자신의 등 뒤로 이치카와를 숨기다시피 하고서 선도부들과 나란히 섰다.
자신의 옆으로 이치카와를 슬쩍 옮기며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조금 뻔뻔하다고도 할 수 있는 그의 행동에 이치카와가 '풋' 하고 웃어버렸다. 그 웃음에 소이치로가 고개를 돌리고서 이치카와를 보았다.
이치카와가 난감해하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치카와? 언제 온기고? 교실에 니 가방 읎던데. "
" 아, 하하... "
" 이치카와가 교실도 안 들리고 여서 하고 있드라. "
" 흠... 어? 나루미 선배, 거기 멈추는 게 좋을 낍니더. "
" 이걸 들키네... "
소우시로가 두 사람에게 다가와 익숙하게 말을 걸었다.
소우시로의 콕 집어내는 말에 이치카와에 어색하게 웃으며 눈길을 돌렸다. 답을 못하는 이치카와를 대신해서 소이치로가 대신 답을 해주었다. 두 사람의 반응에 소우시로가 얇게 뜬 실눈으로 보다가 학생들 사이로 지나가는 누군가를 보고서 말했다.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 나루미가 학생들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이치카와는 나루미의 등장에 놀란 눈으로 소우시로를 보았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소이치로가 이치카와의 머리 위에 나뭇잎이 살포시 내려앉는 걸 보았다. 머리에 뭘 자꾸 붙이고 다니네,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떼어주었다.
이치카와는 주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소이치로를 보았다.
" 야야, 호시나! 적지 마라, 어? 이번에 걸리면 이사장님 면담이랬어. "
" 나루미 겐... 지각과 복장 불량... "
" 몽블랑 사줄까? 어?? "
" 거기다가 선도위원 매수까지 허네. "
" 푸흐... "
이치카와의 시선에 소이치로가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답했다.
이치카와는 다시 시선을 나루미와 소우시로를 향했다.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처럼 교문에서 선도부로서 복장을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잠시 다른 학생을 붙잡고 조용히 말하고 있는 사이에 한 여학생이 소이치로에게 다가갔다.
그 소녀는 가방에서 예쁘게 포장된 선물을 꺼내 소이치로에게 건네주며 수줍게 웃었다. 벌점을 등록한 뒤 돌아온 이치카와의 눈에 하필 두 사람이 붙어있는 모습이 보였다.
벌점 기록을 하는 종이를 붙잡고 있던 이치카와의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 선배... 제 마음이에요. "
" 이기 참... 이러지 마라. "
" 답은... 오늘 점심때 벚나무 아래에서 기다릴게요! "
" 기다리지 말라캤데이. "
" ... "
" 하, 이치카와! 아, 아무것도 아니데이. 오해하면 안 된다. 알긋제? "
" 제가 뭐라고 오해하겠어요. "
이치카와는 웃어야 하는데, 생각하며 입꼬리를 올리려고 했다.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리며 올라가려고 비틀렸다. 예쁘게 잘 웃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당황한 소이치로가 어쩔 줄 몰라 하는 행동을 보였다. 왜지, 싶어서 뺨에 손을 올리니 손끝에 촉촉한 액체가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소리 없이 눈물을 주륵 흘려냈다.
웃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눈물이 하염없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뒤늦게 나루미와 함께 나타난 소우시로가 두 사람을 발견했다. 소우시로의 등장에 이치카와가 멍하니 있다가 발걸음을 돌려 급하게 자리를 피했다.
도망치듯 사라지는 이치카와의 모습에 소우시로가 인상을 구기며 소이치로를 보았다.
" 니... 지금 이치카와 울린기가? "
" 형한테 니라고... "
" 지금 그기 중허나? 어? 그기 중허냐고! "
" ... "
" 야, 무슨 일인데 그래? "
" ... 좀 있다가 보재이, 소우시로. "
가까이 다가온 소우시로가 소이치로의 손에 들린 상자를 보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평소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 소우시로였지만, 자신의 친구를 울린 형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이치로는 자신의 손에 들린 상자를 가만히 보더니 그 상자를 나루미에게 주면서 소우시로를 보고 말했다.
조금 있다가 보자고 말하던 그는 곧장 이치카와가 뛰어간 방향으로 달렸다.
달려가는 소이치로를 발견한 소우시로는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루미는 소이치로가 준 상자를 뜯다가 안에 있는 초콜렛과 몽블랑에 웃었다. 초콜렛은 자신의 입에 넣고, 몽블랑은 소우시로의 입에 넣어주었다.
소우시로는 자신의 입에 들어오는 단맛에 나루미를 보았다.
" 몽블랑? 이기 뭡니꺼? "
" 몰라, 소이치로가 주고 간 상자 안에 있던데? "
" 나루미 회장님! 그걸 함부로 먹으면 우짭니꺼?! "
한순간에 시끄러워진 두 사람을 뒤로하고, 소이치로는 이치카와의 뒤를 계속 쫓았다.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진 그녀의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워낙 조용한 성격 탓에 찾기가 더 어려웠다. 뒷마당까지 와버린 소이치로는 달리느라 흘러내린 식은땀을 닦아내며 숨을 쉬었다.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자, 교실로 찾아갈 생각으로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풀숲 사이로 짙은 고동빛 머리카락 한 갈래가 삐죽 튀어나와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걸 발견한 소이치로는 풀숲을 조심스럽게 벌렸다. 그러자 풀숲에 기대고 있던 이치카와가 뒤로 넘어오면서 그대로 누워버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 호, 호시나 선배... "
" ... 이치카와, 니 와 도망간긴데? "
" 그게... 그러니까... "
" 도망간 이유가 있을 기 아이가. "
" 그... 흡... "
" 우, 울지 말고. 그까네 내가 딴 가시나랑 있어가 도망간기 맞나? "
" 흐윽... "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밀려온 이치카와의 얼굴을 잘 익은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익었다.
발갛게 익어버린 이치카와를 보며 소이치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웃으며 말을 걸었다. 왜 도망간 거냐는 그의 물음에 이치카와는 제대로 된 답을 주지 못했다. 그저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소이치로가 되묻자, 이치카와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금세 눈꼬리에 눈물이 맺히더니 그렁그렁한 눈으로 소이치로를 보았다. 이치카와의 눈물에 당황한 소이치로가 다급하게 울지 말라며 그녀의 몸을 일으켜 주었다.
답을 못하는 그녀 대신 간단하게 답을 할 수 있는 질문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훌쩍이던 이치카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귀까지 빨갛게 익어버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소이치로의 눈에는 그 모습이 매우 사랑스럽고, 귀엽게만 느껴졌다.
" 이치카와. ... 아리스. "
" 네...? 어? "
" 니가 내랑 같은 맴이면 나랑 똑같이 해도. "
그녀의 사랑스러움을 견디지 못한 소이치로가 상체를 숙여 이치카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두 사람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란 이치카와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소이치로를 보았다. 그러자 가볍게 웃던 소이치로가 웃으며 그녀에게 답을 바랐다.
똑같이 해달라는 소이치로의 말에 이치카와의 시선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자신은 짧은 입맞춤조차도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소이치로는 덤덤한 것 같아 괜히 억울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소이치로의 귀 끝으로 향했다.
그 역시나 마찬가지로 귀 끝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 아까는... 거절했다 안 카나. "
" 정말요? "
" 그래, 내 맴에는 니 뿐인데 어데 들어올 자리나 있것나. "
소이치로가 자신에게 보여준 용기에 응하듯 이치카와 역시 용기를 내기로 했다.
두 눈을 질끈 감고서 소이치로의 뺨에 입을 짧게 맞췄다가 떨어졌다.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이 소이치로의 눈에는 그저 사랑스럽게만 보였다.
그는 이치카와에게 손을 뻗으며 들어올 자리조차 없다는 듯이 말했다.
소이치로의 말에 이치카와가 고개를 연신 끄덕거리며 그의 손을 붙잡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치카와를 일으킨 소이치로가 그녀의 옷에 묻은 풀을 털어주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왔던 길이 아닌 1학년 교실로 향했다.
" 낸중에 보자, 아리스. "
" 네에... 소이치로 선배. "
" ... 뭐고? 니 형이랑 사귀나? 이어진기가?? "
" 으응! 소이치로 선배가 날... 좋아한대. "
두 사람의 등장에 반 전체가 술렁거렸다.
소이치로가 자신의 교실로 돌아갔을 때 모두의 시선은 오로지 이치카와에게만 향했다. 질문하고 싶어서 안달 난 이들의 시선은 이치카와가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걸 알고 있던 소우시로가 시선을 물렸다.
잠깐의 정적 이후 이치카와에게 소이치로와 사귀냐고 물어보았다.
이어진 거냐는 물음에 이치카와가 빨개진 얼굴로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우시로는 놀라긴 했지만, 잘 이어질 거라 생각했기에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이치카와가 걱정되진 않았지만, 이제 걱정해야 하는 건 자신이었다.
하필 이치카와가 울었다는 사실에 열이 확 받아서 소이치로에게 대든 것이 화근이었다.
" 윽... "
" 왜 그래? 소우시로. "
" 아까 니 우는 거 봐가꼬... 형한테 한 소리 했그든. "
" 아... "
" 혼날 생각허니 끔찍허네... "
" 내, 내가 혼내지 말라고 말할까? "
이치카와의 말에도 소우시로는 애처로운 미소를 보여주기만 할 뿐이었다.
이치카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한 모습을 보였는데, 소우시로는 되레 당황해 하고 있는 이치카와에게 괜찮다며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사귀게 된 부분은 축하한다며 응원까지 덧붙였다.
소우시로는 이치카와가 말해준다고 해서 바뀔 게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분명 이치카와의 앞에서는 혼내지 않겠다고 하겠지만, 집에서는 잔뜩 괴롭히고 놀려댈 게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나, 짧게 중얼거리던 소우시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이치카와가 소우시로를 보았다.
" 내 잠시 학생회실에 다녀온데이 "
" 어, 어? 으응... 다녀와. "
이치카와의 반응이 영 떨떠름했지만, 소우시로에게 중요한 건 당장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찾는 것이었다.
당장 간다고 하면 받아줄 수 있는 곳, 소이치로가 달려와도 막을 수 있는 사람, 부모님이 인정하고 외박을 허락할 만한 곳. 거긴 딱 한 군데였다. 조금 긴장한 소우시로가 성큼성큼 학생회실에 도착해 벌컥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학생회실 소파에 앉아 여유롭게 게임기를 만지며 흥얼거리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소우시로는 멈추지 않고 곧장 그 사람에게로 다가가 그의 앞에 섰다. 게임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누구냐고 물어보는 그 목소리가 얄밉게 느껴지긴 했지만, 당장 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짧은 한숨을 내쉬고서 그가 혹할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 하... 나루미 회장님, 오늘 집에 가서 게임 좀 하실랍니꺼? "
" 누구냐니... 뭐? 게임? 뭐야, 호시나잖아. 진짜야?? "
" 그럼, 구라겠습니꺼. "
" 웬일이래? 지금 갈까? "
온종일 게임기만 바라보고 있던 나루미의 시선이 드디어 소우시로에게로 향했다.
나루미의 시선에 소우시로는 괜히 마른침을 삼켜냈다.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보이는 그의 모습에 나루미는 의문스러웠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저 게임이라는 말에 신나서 소우시로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웃었다.
지금 가자는 말에 평소라면 뱀처럼 웃으며 신경이나 긁어댈 소우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살짝 걱정되는 마음이 들었지만 별로 티를 내진 않았다. 그저 게임만 하면 될 뿐이라는 생각만 가득 안고서 뒷문의 구석진 곳에 있는 개구멍을 통해 학교를 벗어났다.
두 사람은 곧장 나루미의 집으로 향했다.
" 어떤 게임을 할까~ 야야, 호시나. 하고 싶은 게임 있냐? "
" 상관없으니께 아무거나 합시더. "
" 흠... 일단 시작은 가볍게 가볼까? "
점심이 막 지난 시간부터 저녁 시간이 될 때까지 소우시로는 나루미의 게임 상대가 되어야만 했다.
종일 게임을 하다 보니 머리가 아픈 건 둘째 치더라도 상대가 자신과 둘만 있는 공간인 걸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게 더 짜증이 났다. 이치카와가 성공적으로 연애를 시작해서 그런 건지 덩달아 저까지 욕심이 나버렸다.
그래서 그런가, 평소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 절로 나왔다.
잡고 있던 패드를 내려두고, 나루미의 멱살을 붙잡아 확 당긴 후 입을 맞췄다.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나루미는 놀란 눈을 뜨고서 소우시로를 보았다. 그의 시선에 소우시로의 붉어진 귀가 들어왔다.
멀뚱히 바라보던 것도 잠시 소우시로가 점점 입술을 떼어내자, 가만히 그를 보았다.
" ... "
" ... 왜 말이 없슴니꺼. "
"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
두 사람의 입술이 조금씩 멀어지면서 시선이 닿았다.
한동안의 정적, 그 정적에 당황한 건 소우시로였다. 소우시로는 조용히 있다가 답을 주지 않는 나루미의 모습에 왜 말이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조용하던 나루미가 곧바로 답을 주었다.
그의 단조롭고 냉정한 태도에 소우시로가 상처를 받았다.
나루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소우시로의 표정에 살짝 당황했다. 그 모습을 보자, 아무 반응도 없던 그조차도 반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움찔거렸다.
나루미의 손이 제멋대로 소우시로의 뺨을 쓰다듬었다.
" ... 이건 무슨 의미 입니꺼? "
" 나도... 모르겠다. "
소우시로의 물음에 나루미는 멍하니 자신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가만히 소우시로의 표정을 살펴보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이 감정을 무어라 정의를 내릴 수가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소우시로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말을 듣는다면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제게 입을 맞추고 금방이라도 일그러지는 소우시로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래서 모르겠다는 답을 하고 말았다. 그 답이 생각하고 있던 답이 아니라서 정말 알 수 없었다. 나루미는 소우시로의 뒷목을 감싸 잡더니 당겨 입을 맞췄다. 또 짧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감촉에 두 사람은 멍하니 시선을 교환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아직 그 어떤 것으로도 정의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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