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 차일드 타입

[HL/드림/241231] 사랑하는 나의 □□□을 위해서

나비의 보관함 2025. 2. 19. 19:53

 

에스티니앙은 마치 꿈같은 지금의 상황에서도 그저 웃었다.

평소에 웃음을 잘 보이지 않는 자신이었지만, 지금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툭툭 내뱉고, 화를 내며 성질부리기 바쁜 제 친우이자, 짝사랑 상대가 오늘 하루 종일 자신을 향해 웃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리라. 

그 이유가 매우 단출하고 허접하기 그지없었지만, 그에게 있어서 더없이 좋은 것이었다. 비록 그 상대가 화사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독을 권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도, 분간도 되질 않았다.

그저 네가 내 앞에서 웃고 있는 것만큼 좋은 게 없으니까.

 

 

" 에스티니앙, 왜 웃어? "

" 네가 웃고 있으니까. "

" 내가 네 차에 독을 탔는데도? "

" 그래. 네가 내 차에 독을 탔어도. "

" ... 날 사랑해? "

" ... "

 

 

에스티니앙의 앞에 있던 소녀가 테이블 위로 팔을 올리고 턱을 괴자, 하얀 백발이 부드럽게 내려왔다.

그를 향해 상냥하게 웃고 있는 소녀의 미소는 어딘가 어색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질적인 느낌이 가득 들었지만, 사내는 그마저도 아무렇지 않은 듯 소녀와 대화를 이어갔다.
이체조차 돌지 않는 탁한 눈동자가 곱게 휘어지며 웃었다.

소녀가 사내 앞에 있는 찻잔을 가리키며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에스티니앙의 미소에 소녀가 움찔거리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에스티니앙은 답하기를 포기한 듯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찻잔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들어 소녀를 보았다.

소녀의 물음에 답을 주듯 팔을 움직였다. 여태껏 움직이지 않는 줄 알았던 팔이 올라가며 찻잔을 잡고서 천천히 차를 마셨다. 에스티니앙이 차를 마시는 내내 주변은 조용했다. 조용함을 넘어 고요하기까지 했다. 

그의 행동에 소녀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많은 감정을 담아냈다.

 

 

" 방금 그걸로 답을 했다고 생각해도 돼? "

" ... "

 

 

찻잔을 천천히 내리던 에스티니앙의 눈길이 소녀에게로 향했다.

답이라고 생각해도 되냐는 물음에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소녀의 오드아이 눈동자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평소에 날카롭게 올라가 있던 눈꼬리가 지금은 편하게 내려가 있었다.

소녀의 눈동자에는 슬픔과 연민, 두려움과 불안함이 뒤섞였다.

턱을 괴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리며 입을 꾹 다물더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에스티니앙을 보았다. 흐릿하게 지어지는 그 미소가 에스티니앙의 마음을 쿡쿡 찔러댔다.

 

 

" 왜... 마셨어? "

" ... 사랑하는 나의 □□□을 위해서 "

" ... "

" 비, 비안... 미안하다, 널... 사랑해서. "

" 에스티니앙...!! "

 

 

어딘가 슬픈 감정을 품고서 일그러진 소녀의 표정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에스티니앙은 왜 마셨냐는 질문에 고민할 것도 없이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그가 생각하지 않아도 바로 답할 수 있는 건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서였다. 

그 답에 소녀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서 에스티니앙을 보았다.

에스티니앙이 작게 기침하며 피를 토해냈다. 쿨럭, 기침 소리와 함께 그의 입가를 따라 흘러내리는 피가 하얀 테이블보를 적셨다. 미안하다는 말을 끝으로 에스티니앙이 테이블 위로 털썩 쓰러졌다.

죽어버린 듯이 숨조차 쉬지 않고 테이블 위로 엎어진 에스티니앙의 모습에 소녀가 옅게 웃었다.

곧이어 표정이 순식간에 변하고, 일그러지더니 비명을 지르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 아, 안 돼...!! 에스티니앙, 제발... 제발! "

" ... "

" 이렇게 가면 안 돼... "

 

 

마치 아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에스티니앙을 불렀다.

차분하고 조용하던 아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다급하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 에를린은 에스티니앙의 곁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그의 상태를 살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는지, 에스티니앙은 적은 피를 토하고 기절했을 뿐이었다.

 

 

 

In said
 

 

에를린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나처럼 원래 그랬던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고, 매일 익숙해진 말을 꺼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눈앞의 상황을 지켜보기만 할 수 있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어제부터 몸이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그걸 문제라고 삼기엔 모험에서 무리할 때면 항상 그랬기에 가볍게 무시했었다.

당혹스러움도 잠시 더 큰 당혹감을 안겨준 것이 문제였다. 움직이지 않는 몸이 절로 움직이더니 잠옷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누군가를 찾는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했다.

 

 

" 에스티니앙, 있어? "

" 에를린? "

" 아, 가볍게 차나 한잔할까 해서. "

" 나쁘지 않지. "

 

 

에를린은 눈앞에 보이는 제 오랜 소꿉친구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사용하고 있노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몸을 다시 돌려받으려고 하니 투명한 막이 형성된 듯 팔을 휘두르는 순간 튕겨져 나갔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몸 안에 있었다는 느낌이었다면 튕겨져 나간 지금은 몸 밖에서 3자의 시선으로 보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몸을 차지한 누군가와 에스티니앙이 테이블에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차를 타는 모습에 초조함이 생겼다. 에스티니앙, 저 바보 같은 남자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게 분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한 번도 웃는 얼굴을 보여준 적 없던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이었다.

 

 

" 에스티니앙, 왜 웃어? "

" 네가 웃고 있으니까. "

 

' 안 돼, 에스티니앙! 그 차 마시지 마! '

 

" 내가 네 차에 독을 탔는데도? "

" 그래. 네가 내 차에 독을 탔어도. "

 

' ... 왜? '

 

" ... 날 사랑해? "

 

 

에를린은 자신이 에스티니앙에게 보이지 않고,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지만, 허우적거리며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그 외침도 잠시. 독을 탔다는 말에 마실 거라는 에스티니앙의 말에 에를린이 되레 당황하고 말았다. 멍하니 에스티니앙을 보고 있을 때 □□□의 눈동자가 허공에 떠 있는 에를린에게로 향했다가 에스티니앙에게로 갔다. 

에를린은 사랑하냐고 물어보는 질문에 조용히 차를 마시는 에스티니앙의 모습을 멍하니 향했다.

 

 

" 왜... 마셨어? "

" ... 사랑하는 나의 에를린을 위해서 "

 

' 사랑하는...? 왜...? '

 

" 비, 비안... 미안하다, 널... 사랑해서. "

 

 

왜 마셨냐고, 독인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평소라면 웃어주지도 않는 사람이.

따질 건 많았지만, 미안하다는 그의 말과 동시에 입에서 흐르는 피를 보자 제정신이 아니었다. 속에서부터 들끓어오는 무언가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의 이름을 외쳤다.

이제까지 움직일 수 없었던 몸이 경련을 일으키듯 파르르 떨었다.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겼고,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건 온전히 뒷전의 일이었다. 당장 눈앞에 쓰러진 에스티니앙의 상태를 살피는 게 가장 급한 일이었다.

에를린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향해 사랑해서 미안하다는 말이 뇌리에 남았다.

 

 

" 하... "

 

 

에를린은 에스티니앙이 피를 흘리긴 했지만, 죽은 게 아닌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안절부절못하고 떨면서 그의 상태를 살필 때와는 달리 안심하고 나니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에를린의 몸이 휘청거리며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그대로 테이블 위에 엎어진 에스티니앙의 바짓단을 붙잡고 눈물을 보였다.

 

 

" 일어나면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

 

 

자신에게 이제 온전히 남은 것이라고는 에스티니앙, 한 사람뿐이었다. 

그조차 잃을 수 없어서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고, 그의 감정을 무시했었다. 하지만 에스티니앙이 목숨을 걸 정도로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아버린 이상 무시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에를린은 서럽게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참아내며 눈을 감고 있는 에스티니앙을 보았다.

에스티니앙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이 눈에 띌 정도로 파르르 떨려왔다. 잃는다는 것의 두려움을 아는 사람으로서 견딜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그 감각이 미치도록 선명해서 소름 끼쳤다.

다시는,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