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이는 이자요이와의 관계를 친구와의 우정, 함께 힘든 시간을 버텨낸 유대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감정이 결코 유대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유세이의 내면 속 황량하기 그지없는 무법지 속에서 감정이 조금씩 형태를 잡고 뿌리를 내렸다.
메마른 대지에 물 하나 없고, 거름이 될 무엇 하나 없는 곳에서 꽃은 뿌리를 내리고 크기를 키웠다.
유세이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점점 커지는 감정을 거두고, 꽃이 뿌리를 내릴 때마다 짓밟고 뿌리를 뽑아 두 번 다시 살아남지 못하게 했다. 다시는 뿌리를 내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유세이의 마음과는 달리 감정은 여전히 뿌리를 내렸다.
감정이라는 꽃은 물 하나 주지 않고, 거름조차 없는 황량한 메마른 대지에 기어코 뿌리를 내렸다.
유세이가 잠시 방심한 틈에 싹을 틔운 꽃은 물 하나 없이도, 거름 없이도 쑥쑥 자라나 어느새 봉오리가 맺혔고, 그 꽃은 활짝 피어올라 황야를 푸르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 꽃의 이름은 선명할 정도로 붉은 장미였다.
" 이 감정이 온전히 내 것이던가. "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건물들 사이에서 유세이가 중얼거렸다.
이자요이와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잡기 하루 전날이었다. 그는 이제야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지만, 그게 정녕 자신의 감정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단순히 보고 있지 않아서 보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기계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설렌다는 건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부정했다.
보고 있을 때는 몰랐지만, 막상 곁에 없으니 보고 싶고 그리워지고 싶은 건 처음이었다. 그녀를 향한 감정이 고작 유대가 아님을 알아차렸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그땐 그녀가 이미 곁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에 쿨하게 웃으며 서로의 길을 응원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 내일 보면... "
다음 날 마주 보게 될 것을 생각하니 심장이 떨려왔다.
마지막으로 헤어진 이후 갈수록 그녀를 향한 마음이 선명해져서 문제였다. 그럴수록 내면 속의 붉은 장미는 더 색을 뽐내며 잎을 흔들어댔다. 이젠 솔직해질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너무 아름답게 자리 잡아버리는 탓에 이젠 짓밟지도, 뿌리를 뽑아버리지도 못했다.
유세이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고 선명한 색을 띄는 붉은색의 장미를 처음 만났던 그날을 떠올렸다. 계속 부정하고 있었지만, 알고 보니 그 감정이라는 게 사랑임을 알게 되는 건 그리 길지 않았다.
다만 그걸 자신이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었지.
정말 신기하게도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보고 싶다는 마음에 애절함이, 그립다는 마음에 무거운 이기심이 들어섰다.
" 마녀... "
" 흑장미의 마녀가 진짜 존재했군. "
" 흑장미의 마녀...! "
유세이는 가장 먼저 이자요이가 흑장미의 마녀였던 시절,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가면을 가리고 있었으나, 자신의 팔에 있던 시그너의 증표인 용의 반점을 발견하고 보이던 반응까지. 사라져야 할 징표라더니 정작 본인이 빛기둥을 뿜어내며 사라졌던 그 행적,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이었다.
제일 큰 건 용의 반점이 이자요이와 만났을 때 공명하듯이 빛을 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에는 모두를 공격하던 그녀가 반점을 보고서 사라졌던 이유, 흑장미의 마녀에게도 반점이 있다는 사실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 한몫했다.
이후로 다시 만난 건 포츈 컵에서였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으나, 그녀의 시합을 보고서 알아차렸다. 유세이는 용의 반점이 공명했다는 것에서 이미 알아보았다. 이자요이가 블랙 로즈 드래곤을 소환했을 때, 공명한 것이 컸다.
어찌 보면 파괴와 무효의 상관관계에 있어 이미 예견된 운명이었을지도 몰랐다.
" 난... 이 증표를 가진 자들을 증오하고 혐오한다. "
" ... "
듀얼이 끝나고, 복도에서 처음으로 마주쳤을 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던 게 분명했다. 유세이는 어디에서 이런 마음이 생겨난 건지 의문이 들었다. 도저히 생각을 되짚어봐도 감정이 생겨날 만한 건 전혀 없었던 게 분명한데도.
증표를 가진 자들을 증오하고 혐오한다던 이자요이의 말에 유세이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다음은 준결승 전이었다. 듀얼 도중에 드래곤을 소환하고서 유세이와 이자요이의 대화가 이어졌다. 유세이는 이 듀얼로 이자요이의 마음속에 다가갈 생각이었다.
유세이는 지금 와서도 자신이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홀로 외롭게 버티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이자요이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 스타더스트 효과 발동! "
" ... 아직이야. "
유세이는 계속해서 이자요이의 마음속에 다가가려고 했다.
이자요이가 우는 모습에 더욱 그렇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가득해졌다. 이자요이의 가면이 깨지고, 도와달라는 그 말에 유세이가 나서려고 했으나 갑자기 나타난 디바인에 의해 그러지 못했다.
디바인과 함께 나가는 이자요이의 모습을 보며 유세이는 괜히 마음이 쓰였다.
포츈 컵이 끝나고 난 뒤로는 한동안 보지 못했고, 바쁜 탓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다만 여전히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째서 그녀의 슬픔을 다 감당하겠다고 한 건지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심장 위로 무겁게 앉고 있는 이 묵직함의 정체를 애써 외면했다.
다음으로 자각했던 건 국회의원인 이자요이 히데오, 아키의 아버지에게서 그녀의 과거를 들었을 때였다. 당시에 이자요이를 도와줄 힘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움을 요청해 왔다.
많은 생각이 오갔지만, 마사가 한 말이 가장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 유세이, 너... 그 아키라는 애 좋아하는 거 아니니? "
" 아, 아니에요! "
마사의 말에 크게 당황한 유세이가 다급하게 아니라고 말해보지만, 소용없었다.
처음에는 당황했다고는 하지만 아키에게 가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다른 녀석들을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그리하진 않았으면서 어째서 아키만큼은 도와주고 싶었던 걸까.
묵직하게 누르고 오는 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이지?
묘하게 따끔거리면서 눈앞에 아른거릴 때마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이 감정은 듀얼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것 또한 동료의 유대일 수도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 아키... "
이때 울고 있는 아키의 모습을 보고서 무슨 생각으로 장갑을 벗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그런 것뿐이었는데, 증표가 공명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증표는 언제나 듀얼을 할 때만 반응을 했었다.
줄곧 잠들어 있던 아키가 천천히 눈을 뜨더니 유세이를 보았다.
유세이는 아키가 눈을 떴다는 사실에 안도감과 함께 그저 웃음만이 나왔다. 구하러 왔냐는 아키의 말에도 여전히 웃음이 머물렀고,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주기까지 했다.
외면하지 않고 그녀를 도와주러 오길 잘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다시 그녀가 울기 시작하며 하소연하는 말에 애써 진정시키려고 노력까지 했다. 그렇게 듀얼이 시작되고, 끝을 맺을 때. 우리는 동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아키에게 해주었다.
이날 이후로 유세이는 아키를 이자요이가 아닌 아키라고, 불렀다.
" 아키. "
" 그래도 상관없어. "
아키가 믿고 있으며 심적으로 가장 크게 의지해왔던 옛 동료인 디바인에 관한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된 이후였다.
아키는 큰 충격으로 인해 진실에게서 멀어지고자 그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유세이는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대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래도 상관없다며 디바인을 여전히 소중한 존재라고 말하는 아키의 모습에 조용히 인상을 찡그렸다.
알고 있다고, 평가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상하게 분노가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더럽고 질척거리며 축축한 이 감정을 애써 무시하며 아키에게 동료임을 강조했다.
사실상 우리가 동료라고 말하는 건 스스로에게 하는 말과도 같았다.
그녀와 자신은 동료이며, 앞으로도 동료일 것이라고. 그러니 쓸데없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지 말라고. 동료와의 유대에서 쓸데없는 감정이고, 느낌일 뿐이라며 스스로에게 말한 것이었다.
" 아키!! "
" 유세이. 무사했구나. "
그러던 중, 감정을 조금 깨닫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 생겼다.
납치를 당해버린 탓에 나가지도 못하고, 도망치지도 못하게 되어 어떻게 해결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두꺼운 쇠문을 부수는 소리에 문에서 조금 거리를 두었을 때였다.
로즈 텐터클스가 트럭의 문을 부수었고, 부서진 문틈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어둠에 의해 빛이 너무 환하게 느껴져 잠시 앞이 보이지 않다가 적응하기 시작하니 조금씩 주변이 보였다.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자신을 구하러 와준 아키의 얼굴이었다.
그녀가 무리하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에 급해지는 자신의 감정을 알지 못했다.
" 아키, 무리하지 마! "
" 유세이...! "
트럭이 갑자기 빠르게 달리는 순간, 무리해서 문을 연 것까진 좋았다.
벗어나려던 순간 아키가 뻗어오는 손을 보고 마음이 크게 술렁거렸다. 열이 조금씩 오르고, 걱정이 가득 묻어나오는 그녀의 얼굴이 뇌리에 박혔다. 흔들리는 트럭에 중심을 잡는 게 고작이었던 것도 까먹을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겁도 없이 트럭을 향해 달려드는 아키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아마터면 큰 부상으로도 이어졌을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아키를 안전하게 트럭 안으로 데리고 오고 나서는 더 큰 일이었다. 트럭의 문 한쪽이 부서지면서 아키의 듀얼기기까지 떨어져 나갔다.
그 사실에 욱한 감정이 올라와 한마디 하고 말았다.
" 무리하지 말라니까! "
" 누구 때문에 이러는데?! "
걱정되는 마음은 잘 알았으나, 무리하지 말았으면 했다.
내가 다치는 것보다 아키가 다치는 게 더 신경 쓰였으니까. 급격하게 상황이 계속해서 바뀌기 시작하니 내 감정에 대해서도 무어라 정의를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일단 급한 대로 D-휠에 탑승해서 내리기로 했다.
내려가기 전까지 조금 실랑이가 있긴 했으나, 결국 아키를 뒤에 태우고서 달렸다.
마주한 적과 강제 듀얼을 진행하게 되면서 꼭 승리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듀얼에서 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가장 큰 건 내 뒤에 앉아 있는 그녀를 지키겠다는 마음이 가장 컸다.
이게 무슨 마음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지켜야겠다는 마음만큼은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 유세이... "
" 저녀석, 듀얼을 즐기고 있어! "
구해야 한다는 것, 지켜야 한다는 것.
그게 어떤 마음에서 나오는 건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저 끝까지 지키고 구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듀얼 상대가 나쁜 상대도 아니었고, 듀얼을 즐기는 녀석이었다.
그렇게 무사히 돌아오고 난 후 며칠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고스트의 등장, 전투, 듀얼...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러다 아키가 처음으로 라이딩 듀얼 라이센스를 따고 싶다는 말을 해왔다. 그 말에 여러 준비를 도와주기도 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알고 싶다며 내가 보고 있던 세상을 보고 싶다고 한 게 너무나 큰 기쁨이었다.
물론 그걸 티를 내진 않았지만. 이후 조금씩 고물상에서 챙겨온 부품들로 아키가 쓸만한 D-휠을 만들어 주었다. 고물인지라 연습용으로만 사용하기 적합하다는 게 단점이었다.
" 너무 딴판이지...? "
" 잘 어울려. "
" 고마워, 유세이!! "
개인적으로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에 마련해준 것이긴 했지만, 감격한 아키의 표정과 고맙다는 말은 심장을 울렸다.
연습용으로 마련해준 걸로 라이딩 듀얼 라이센스를 따내겠다는 그녀의 다짐을 응원했다. 그러다가 루아와 루카에게 들은 말에 심장이 요동쳤다. 반점이 울렸을 때보다 더 격한 감정이 느껴졌다.
아키가 동료들과 같이 달리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을 때의 감정은 색다르게 다가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넘어지고, 다치던 걸 이제는 점점 제법 듀얼 라이더의 티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계속 넘어지는 모습에 다른 도움을 주기로 했다.
인라인스케이트장으로 데려가 타는 걸 도와주었다.
" 뭔가 좋은 분위기인데? "
" 역시 데이트인 건가? "
인라인스케이트장에서 연습을 도와줄 때도 주변에서 들리는 말은 애써 무시했다.
이때의 유세이는 이게 데이트인지도 몰랐다. 아키가 듀얼 라이센스를 따기 위한 연습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넘어질 뻔한 아키를 부축하면서 순간적으로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애써 무시하려고 했지만,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온기와 향기는 무시하기 힘들었다.
귓가에 울릴 정도로 쿵쿵 울려오는 소리와 뜨거워지는 얼굴을 무시했다.
오랜만에 인라인스케이트를 타서 긴장한 결과라고 생각하며 괜찮은 척하기는 했지만, 심장은 여전히 울렸다. 며칠 몇 날을 거절하고, 뿌리를 도려내고, 싹을 짓밟았다. 다시는 피어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하지만 잡초처럼 끈질기게 뿌리를 내리고 자라났다.
" 그래, 그런 기분으로. "
" 중심이동에 집중하면 되는 거네? "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루아와 루카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봐도 데이트였다.
데이트 아닌 데이트 이후로는 크로우와 잭의 도움을 받아 D-휠을 조금 더 전문적으로 바꾸었다. 아키가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살짝 움찔하긴 했지만, 라이센스를 따기 위해 감동한 것이라 생각했다.
무사히 라이센스를 따낸 이후, WRGP 참여로 인해 5D's가 결성되었다.
문제는 팀 카타스트로프의 뒷공작으로 인해 사고가 발생했고, 그로 인해 크로우가 부상을 당해서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게 문제였다. 아키가 나서서 참여하게 해달라고 했을 땐, 상당히 놀라웠다.
함께 달릴 수 있다는 것, 같은 시선으로 세계를 본다는 것.
크로우에겐 미안했지만, 아키와 달릴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아키가 긴장하는 모습을 보고서 못 견디고 스타더스트를 건네준 것은.
" 이 카드를 들고 가. "
" 유세이! 이건...!! "
" 상대는 네가 이 카드를 쓸 거라곤 전혀 생각 못 할 거야. 그게 찬스야. "
하지만 정말 아키가 스타더스트를 소환해 낼 줄은 몰랐다.
소환까진 괜찮았다. 다만 썬더 유니콘의 공격력이 4600이나 되는 탓에 소환하자마자 스타더스트가 사라지게 되긴 했지만. 함정 카드를 발동하긴 했다지만 LP가 800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가 걱정되었다.
걱정과 동시에 긴장감으로 인해 손바닥에 땀이 가득 찰 정도였다.
결국 자멸을 택하고 스타더스트를 소환한 아키의 선택에 표정이 걱정이 앞섰다. 스타더스트만큼은 빼앗길 수 없었고, 그걸 나에게 전달하려고 택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미안, 유세이... 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
" 너의 마음은 잘 받았어. 뒤는 내게 맡겨. "
아키의 복수를 해줄 마음이 가득했다.
안드레를 보내고, 브레오를 상대한 뒤 마지막으로 쟝을 상대했을 때. 이기고 돌아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다는 아키의 말에 부끄러워진 건지 괜히 고개를 돌려 잭을 보았다.
그 뒤로 많은 일이 있었다. 아키가 나를 향해 기도를 해준다거나, 응원을 해주는 모습도.
WRGP 이후 아크 크레이들에 들어가면서 결전을 맞이하기도 했다. 아크 크레이들에 들어가기 전에는 아키가 초능력이 사라졌다고 고백을 하기도 했다. 마음속의 어둠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는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녀의 마음속에 어둠이 걷혔다는 사실이 크게 기뻤다.
왜 기뻤는지, 그것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결전 이후 모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찾아 나섰다.
" 아키, 미소를 잊지 말도록 해. 너의 미소는 이 세상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 "
" 그 미소를 준 건 너야, 유세이. "
어느새 완전히 뿌리를 내려버린 꽃은 점점 자라기 시작했고, 싹을 틔우던 장미는 꽃봉오리를 맺었다.
유세이는 그마저도 외면한 채 잭과의 듀얼을 마치고 폿포 타임의 차고로 향했다.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아키와 마지막 작별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어둠 속에서 겨우 비친 달빛 사이로 보이는 아키의 붉은 얼굴이 보였다.
처음 아키가 얼버무리며 뜸을 들이는 목소리에 손끝이 떨려왔다.
혹여나 그녀가 자신에게 고백이라도 하면 어떻게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서. 하지만 문득 정말 그래서 손끝이 떨리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눈동자를 통해 서로의 모습을 볼 때까지도 의문은 여전히 똑같았다.
마지막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는 말에 서로를 응원하기로 했다.
처음 봤을 때와 다르게 지금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대하며 다가오는 아키의 모습이 색달랐다. 그녀가 이렇게 행복하게 웃을 수 있다는 것에 안도감과 동시에 가슴 한쪽이 욱신거려왔다.
애써 무시하며 서로의 손을 붙잡고 악수를 건넸다.
" 정말 신기해. 이걸 무슨 감정이라고 부르지? "
유세이는 모두와 헤어지고 나서 문득 깊은 생각에 잠겼다.
멍하니 손바닥을 바라보며 자꾸 떠오르는 몇 주 전의 장면에 절로 인상을 찡그렸다. 모두와 달리면서 하이 파이브를 하던 장면이 잊혀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맞닿은 손은 전부 괜찮았지만, 아키는 남달랐다.
묵직하게 다가오는 감정과 아릿하게 느껴지는 애절함은 무겁게 다가왔다.
그 케케묵은 감정들이 발 아래에서부터 어두운 구렁텅이로 빠트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수렁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는 듯 감정을 끌어안기만 했다. 뒤늦게 자각한 감정이 이다지도 힘들고 괴로울 거라는 걸 몰랐다.
나는 몇 주간 아키를 향한 마음이 유대가 아니라 사랑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 하하... 멍청한 놈. "
사랑이 처음이어서, 이런 감정이 낯설기만 해서 계속해서 외면하고 무시했었다.
그녀를 향한 그리움이 점점 깊어지기 시작할 때 애써 시간을 보내며 더더욱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묵은 감정이 제 발목을 붙잡게 될 줄도 모른 채.
어쩌자고 이제 와서 자신의 감정을 자극하는 건지.
아키가 먼저 용기를 내어 자신에게 솔직한 감정을 드러낼 때, 거절했던 건지. 후회를 떠올려봐야 뒤따라오는 건 미련이었다. 미련은 검고 질척해서, 그것이 그녀를 향한 그리움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나는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감정 자체가 처음이었던 사람이었기에 이게 사랑인지, 그리움인지, 무엇인지 모르고 착각하고 지난날을 후회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려 했다.
" 유세이, 너 정말 괜찮은 거냐? "
" 맞아. 상태가 안 괜찮아 보이는데... "
" 나는 괜찮아. "
아키를 향한 감정을 다시 무시하기 위해서, 모르는 척 넘어가기 위해 시간을 불태웠다.
몸을 무리해 가면서까지 잊으려고 한 행동에 다른 사람들조차 나를 말리고 걱정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꾸 아키가 생각나서 미칠 노릇이었으니까.
조금이라도 부정하고, 밀어내려고 했다.
애써 외면까지 해보았지만, 그 잠깐의 외면 사이에 마음속에 뿌리를 깊게 내려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사이에 며칠, 몇 주, 몇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 어느새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때. 그때가 되어서야 나는 내 감정에 지고 말았고, 결국 인정하기로 했다.
지독하게 얽히고 묵직하게 짓누르고 오는 이 감정이 사랑이라고.
사랑이 아니라면 그 무엇도 될 수 없다고 인정했다. 이 애틋하고 그리운 감정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나를 괴롭혔다. 전날에 했던 후회보다 더 깊은 후회로 다가왔다.
" ... 아키는 뭘 하고 있으려나. "
공부를 하다가도 멍하니 있게 되는 날이면 문득 아키가 떠오른다거나, 밥을 먹다가도 떠오르기도 했다.
듀얼 덱을 구상하다가도 스타더스트 드래곤을 볼 때면 아키가 떠올랐다. 해맑게 웃고 있는 그녀의 미소라던가, 달빛에 비추어 반짝이던 눈동자라던가, 수줍게 붉어지던 뺨이 계속 눈앞을 맴돌았다.
솔직히 말해서 탐스럽던 입술까지 떠올랐지만, 재빠르게 고개를 내저어 물리쳤다.
성인이 되었어도 이런 부분은 부끄럽기만 했다. 무엇보다 아직까지 아키가 자신에게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도 불분명한 현재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그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그러다가 안 떠올리려고 노력하고, 묻어두려고 애썼다.
" ... 아키. "
처음에는 가만히 있다가 떠오른다 싶으면 지우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게 점점 커져가면서 일상 속에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가장 지독했던 때는 밥을 먹을 때도, 가만히 떠올리던 때도 아니었다. 하필 감기에 걸렸을 때였다.
확 올라오는 열감기에 머리가 어지러웠을 때조차도 아키의 모습은 계속 맴돌았다.
이 지독하리만큼 아프고 시린 감정에 처음으로 진절머리가 나기도 했다. 열감기로 인해 아픈 건지, 그녀를 잊지 못해 그리워서 아픈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너무 절절하고 또 절절해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그때서야 사랑이라는 게 이다지도 무겁고, 아픈데도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구나 라는 걸 깨달았다.
하필 자각했을 때 느낀 사랑이 이렇게 아프고 무거운 사랑이라니, 세상에 수많은 사랑들 중 하필 이런 사랑이라니. 과하게 올라온 열로 인한 건지 아니면 답답함에 흘리는 눈물인 건지.
유세이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아키를 향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방울 맺혀 흘러내렸다.
" 하아... 하... "
점점 숨이 막힐 정도로 올라오는 열 기운에 제대로 된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아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정말 내가 아키를 사랑하고 있구나, 그리워하고 있구나. 라는 걸 느끼게 해줄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와 이 감정을 아키에게 보일 순 없었다.
이미 한 번, 알고도 받아주지 않아놓고서 무슨 염치로 보인단 말인가.
철저하게 느껴지는 그리움과 아슬한 죄책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다가오는 후회에 기절까지 하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메마른 땅 위로 장미가 완전히 피어올랐다.
선명한 붉은 빛을 뽐내며 자신의 위용을 마음껏 자랑하고 있었다.
" ... 아키, 보고 싶어. "
[ ... ...어? 유세이, 방금 뭐라고... ]
" ... ... 급하게 할 일이 생겨서, 이만 끊을게. "
[ 유세이...!! 유... ]
뚝, 하필 자각을 하고 난 다음에 무의식적으로 사고를 치고 말았다.
오랜만에 연락을 하게 된 아키와의 대화가 신나서인 건지 아니면 익숙한 목소리가 그대로라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린 건지. 나도 모르게 깊은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말이 생각도 없이 툭 튀어나와 버리고 말았다.
10초간의 짧은 정적, 그 정적 사이에 실수를 깨닫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나는 실수를 얼버무리기 위해 아키에게 말을 돌리며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한순간의 실수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실수했다는 걸 깨닫자, 순간이긴 했으나 눈앞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저 머나먼 시공 너머로 빨려 들어갔다가 순식간에 돌아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다급하게 제 이름을 불러오는 아키의 목소리는 애초에 들리지 않았다. 망신살도 이런 망신살이 없다는 생각에 물들어선 그녀의 반응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걸 뒤늦게 떠올렸다. 묵직한 한숨이 절로 올라왔다.
" 하... 진짜 멍청한 녀석... "
이렇게 망한 짝사랑을 하는 건 저뿐일 게 분명했다.
그 전화를 마지막으로 몇 달이 흐르고 나서야 5D's가 만나기로 한 날이 잡혔다. 회상을 끝낸 유세이가 천천히 눈을 뜨며 고개를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액자를 보았다.
그 액자 안에는 나를 포함한 5명이 함께 웃으며 찍은 사진이 들어가 있었다.
몇 년 만이더라. 오랜만에 만날 생각을 하니 감회로웠다. 곧 다시 보게 될 잭도, 루카도, 루아도, 크로우도. 무엇보다도 아키랑 다시 본다는 게 가슴을 뛰게 했다. 가장 최근에 들은 소식에 괜한 기대감이 생겨났다.
잭은 전국을 재패하는 중이었고, 루카는 대학생이 되었다고 들었다.
루아와 크로우는 프로 라이딩 듀얼리스트로 활동 중이라고 했다. 아키는... 아키는 무사히 의사가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녀라면 당연하게도 해낼 거라고 생각했기에 딱히 별다른 감상은 없었지만, 고생했을 것 같아서.
그게 더 마음에 쓰였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기 전에 내 감정을 정리하고 싶었다.
" 그래, 정했어. "
나는 하루를 남겨두고서 마음을 정했다.
어찌 보면 내가 선택해야 할 건 딱 하나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아키를 향한 마음을 정리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 그저 이 마음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후회와 미련이 발목을 붙잡았다.
누군가가 본다면 분명 구질구질하고, 애절하다고 말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뒤늦게 깨달아버린 이 감정을 나는 가만히 넋 놓고 놓칠 생각 따윈 없었고, 무엇보다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이상 아키에게 마음을 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정할 예정이었다.
그녀를 본다면 몸이 먼저 반응할 게 분명하니까.
이전에 넘어지려고 하던 아키를 부축해 주었을 때 내 심장이 그녀를 향해 반응했던 것처럼. 아아, 이렇게 아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간질간질거리는 느낌을 왜 모르는 척했을까.
눈을 천천히 뜨면서 모르는 척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걸 다시금 떠올렸다.
" 정말 멍청한 놈이지. "
기회가 자신에게 주어질지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마음을 정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아키를 향한 마음을 최소 5년 이상을 무시하고, 외면하고 짓밟아 모르는 척했다. 감정을 깨닫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긴 시간동안 아키 역시 마음에 변화가 없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물론 아키의 마음이 완전히 떠났다면, 그렇다면 나는...
선택지는 하나뿐이겠지. 그녀가 했던 선택대로 내가 따라갈 뿐이다. 내일이 기대되면서도 긴장되기 시작했다. 잠들기 직전까지 손바닥에 가득 차는 땀방울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다음 날, 유세이는 동료들과 약속한 장소에 가장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어쩌다 보니 늦어버리긴 했으나 걸음은 여전히 평소와 같은 속도였다. 긴 복도를 지나, 끝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그리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고난과 역경을 함께 겪었고, 즐거운 추억을 함께한 소중한 인연이 눈앞에.
끼이익, 낡은 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유세이의 발이 먼저 들어섰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유세이의 시선이 가장 먼저 아키를 찾아 돌아다녔다. 그러다 안쪽에 앉아 있던 아키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유세이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 아, 나는 아키를 사랑하고 있는 게 맞군. '
아키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렇게 밤새도록 고민하고, 며칠, 몇 주, 몇 개월, 몇 년을 고민하고 고민하며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하던 순간이 눈 놓듯이 사라졌다. 유세이는 아키를 보는 순간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은 처음부터 그녀라는 장미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유세이가 힘겹게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반겨주는 모두를 향해 멈추었던 발걸음을 움직였다. 유세이까지 등장하고 나서야 완전한 5D's가 모였다.
그곳에 모인 모두가 유세이의 시선이 아키에게 머물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차린 건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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