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중에 자살 묘사가 있습니다. 거부감이 있는 사람은 뒤로가기 해주세요※
오랜만에 대면한 두 사람 사이에는 극도로 조용한 서늘함만이 남아있었다.
유년기에 같은 고아원에서 의지하며 성장했던 한과 해연, 두 사람에게 있어 세상은 곧 서로였고 서로가 전부였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멀리 와버리고 말았다.
고아원이 폭파하게 되면서 한이 겨우 해연만 탈출시키고 폭파에 휘말려 함께 사망했다.
몇 년 전, 제일가는 신문지의 1면을 장식했을 정도로 큰 뉴스거리, 거기에서 살아남은 게 해연이었다. 그녀는 홀로 살아남아 떠돌아다니며 구원자에게 주워져 그의 측근으로 평생을 살았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남몰래 울기도 하던 나날의 일상,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 해연아? "
" ... 한 씨, 죽은 게... 아니었습니까? "
" 너, 왜... "
해연은 그 몇 년간 지독하게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자, 적잖게 당황했다. 우연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끔찍했다. 죄책감이라는 덩어리로 다가오던 상대를 우연히 만날 확률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해연은 생각보다 꽤 덤덤한 눈으로 한을 보았다.
한은 해연이 평범하게 살길 바라는 마음에 탈출시켰던 거였는데, 하필 빌런 진영에 가담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그녀와 마주친 순간 잠잠했던 소유욕이 들끓었다.
빌런으로서 살게 할 바에야 차라리 자신의 곁에 두고 품에 가두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까지 했다.
" 해연아, 잘 지내고 있지? "
" ... 한 씨, 왜 자꾸 오시는 겁니까? "
" 그야 거래하니까? "
한은 처음에 만났던 날 이후로 꾸준히 무기나 자금, 정보 조달을 위해 빌런 진영과 자주 접촉하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부러 거래를 마친 뒤에는 해연을 만나러 오며 말을 걸었다. 자연스럽게 해연과 만나는 빈도를 늘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빈도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해연의 감정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한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오랜만에 본 순간부터 해연을 향한 감정은 친구 이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가장 많이 달라진 건 해연이었다. 과거에도 지금도 한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친구 이상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천천히 마음을 열게 되었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한이 다급하게 달려오더니 해연에게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을 건넸다.
" 한 씨? "
" 일단 이거부터 마셔, 해연아. "
" 아, 예... 무슨 일 있습니까? 오늘 상당히 번잡스러운데 말입니다. "
" 그건 ... 조금 자고 일어나면 알 거야. "
" 예? 무슨... "
한이 건네주는 코코아를 아무런 의심 없이 마시던 해연은 어수선한 주변을 살피며 물어보았다.
땅까지 흔들리는 와중에도 해연이 코코아를 전부 마시는 걸 확인하던 한은 부드럽게 웃어주며 해연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해연이 되물어보려던 순간 그녀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한이 해연을 받아주며, 소중한 보물을 감싸듯 조심스럽게 꼭 끌어안았다.
한은 그대로 해연을 끌어안은 채 자신이 그동안 준비해 왔던 곳으로 향했다. 분명 약을 탄 냄새가 날 텐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준 것이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마시는 해연의 모습은 터무니없이 사랑스러웠다.
" 으윽... "
" 해연아, 일어났어? "
" 한 씨? 여긴 어디입니까? "
" 여기? 앞으로 너랑 내가 지낼 곳이야. "
" 예? "
정신을 차린 해연은 지끈거리는 두통에 인상을 찡그렸다.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키며 한과 대화를 이어갔다. 해연이 땅을 짚으려는 순간 제대로 짚지 못하고 그대로 휘청거리며 앞으로 고꾸라지려고 했다. 다행히도 바로 앞에 있던 한이 그녀의 몸을 붙잡아 주었다.
하하, 해연이도 참. 아까도 넘어지려고 하더니.
해연은 한의 말이 귓가에 윙윙 맴돌았지만, 그보다 이상한 감각에 집중할 수 없었다. 팔을 움직여 들어 올리니 시야에 들어오는 건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광경뿐이었다. 손목 위로 꿈틀거리며 움직여야 할 손이 보이지 않았다.
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하얀 붕대만 감겨 있었다.
" 어, 어? 이... 이게 뭡니까...? "
" 그 손이 있으면 분명 또 검을 잡고 망할 구원자를 지켜야 한다며 달려 나가겠지? 그래서 없앴어. "
" ... 예? "
한의 말에 해연이 일순간 멍하니 자신의 손과 한을 번갈아 보았다.
해연의 시선이 멀지 않은 곳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자신의 검을 보다가 아직까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땅을 짚고 일어서려고 해도 짚는 순간 바닥에 닿은 부분이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해연은 자신이 살아오면서 수많은 생과 사를 넘나드는 시간 속에 견디지 못할 고통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스스로 땅을 짚고 일어서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짚는 순간 팔을 타고 올라오는 버틸 수 없는 통증은 수천, 수만, 수억 개의 얇은 바늘이 무수히 찔러대는 것 같았다.
절로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 허억, 헉... 흐읍... "
" 쉬... 괜찮아, 해연아. "
" 구, 구원자에게... 윽, 데려다... 주실 수 있습니까? "
" 그건 안 되지. 그러면 널 데려온 의미가 없잖아. "
어깨가 들썩이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탓에 다급하게 목을 감싸보지만, 목을 감싸야 하는 손길이 느껴지지 않았다.
해연은 마치 환상통처럼 미친 듯이 욱신거리기 시작하는 통증에 눈물을 머금은 채 창백해진 얼굴로 한을 보았다. 구원자게에 데려다 줄 수 없냐는 말에 한이 가만히 입을 다물고 한참을 해연을 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데려온 의미가 없다고 말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멀어졌다.
점점 멀어지는 한의 모습에 해연이 버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마저도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리 아래로 가리고 있던 이불이 내려가자, 무릎 아래로 있어야 할 두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해연이 자신의 다리를 찾기도 전에 침대맡에 이어진 목줄로 인해 숨통이 턱하고 막혔다.
" 끅, 흐윽...!! "
" 이런... 조심해야지, 해연아. "
" 커헉...! 이게, 도대체 무슨... "
" 내가 널 거기서 데려오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어. "
" 한 씨, 지금이라도 돌려보내 주시면 제가 구원자께 잘 말씀드려보겠습니다. "
" 하하... 무슨 소리야, 해연아? "
해연은 자신을 돌아보는 한의 표정이 어딘가 비뚤어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뒤늦게 자신이 가졌던 감정처럼 그도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봐왔던 것들이 전부 착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 깨달아봤자 너무 늦은 이후였다.
자신은 한의 곁에서 감금당한 상태였고, 사지가 잘려 나간 이 상태로는 이제 다시 구원자의 곁에 서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겨우 하루하루 버티고 있던 정신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이어 붙여두었던 것들에 새로운 금이 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지더니 종국에는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다.
한은 요즘 고민거리가 있었다.
" 해연아, 밥 먹어야지. "
" ... "
" 밥 안 먹고 계속 그렇게 창만 볼 거야? "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서 데리고 온 해연의 상태가 점점 안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초반에는 돌려보내달라는 소리를 그렇게 하더니, 편집해서 만든 가짜 신문을 전해주고 난 뒤로는 저렇게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고 앉은 채 창문 너머만 보고 있었다.
괜히 편집해서 만든 가짜 신문을 보여준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은 자신이 만들어둔 가짜 신문을 보았다. 가장 큰 1면에는 빌런의 수장, 중환자실에서 일어나지 못해... 라는 큰 제목의 기사가 한눈에 보였다. 고작 그 사람이 뭐라고, 저리 구는 건지.
어렸을 적에 당신을 구한 건 나인데도. 한은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에 괜히 분노만 쌓여갔다.
밥을 먹지도 않는 그녀의 모습에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초인종 소리가 들려와서 들고왔던 음식을 옆에 놔두고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 하필이면 멍청하게도. 그런 선택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 해연아, 우리 곧 이사 가야 할지도 몰라. "
" ... "
" 듣고 있어, 해연아? 해연... 해연아!! "
초인종을 누른 사람은 한 대신 정보 조달을 해주던 정보꾼이었다.
그가 말하기를 최근에 그레이존에 빌런들이 누군가를 찾는 듯 자꾸 들쑤시고 있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 정도를 들은 한이 인상을 잔뜩 찡그리더니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정보꾼에게 쥐여주었다.
문을 닫고 들어온 한은 인상을 찡그리며 깊은 한숨을 내뱉고 해연에게 이사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을 걸었다.
언제처럼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한은 이상한 느낌에 바닥을 보던 시선을 올려 해연을 보았다. 그의 불안한 촉은 왜 그리 잘 맞아떨어지는 건지. 해연이 답이 없는 이유가 있었다.
한이 들고 왔던 쟁반 위에는 날카로운 은식기가 있었고, 잠시 나간다고 두고 갔기에 그 쟁반은 해연의 곁에 있었다.
잠시 한이 자리를 비운 사이 해연이 아무런 고민도 없이 날카로운 은식기를 쥐고 단번에 자신의 목을 베었다. 은식기는 생각보다 날이 잘 들었고, 선명하고 깔끔한 호선을 그리며 해연의 목에 상처를 남겼다.
절상이 꽤 깊게 파고든 건지 왈칵 쏟아져 나온 붉은 피는 순식간에 해연의 이불을 적셨다.
' 아, 이러면... 구원자의 곁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풀썩, 해연은 푹신한 시트 위로 점점 힘이 빠지는 몸을 눕히고서 마지막까지 구원자를 떠올렸다.
" 해, 해연아! 안 돼...! 안 된다고! "
" ... "
" 해연아! 안 돼! 나, 날 두고 가지 마. 어? 내가 미안해. "
해연은 마지막의 마지막조차도 자신의 시야 안에 한을 담지 않았다.
흐릿해진 시야 덕분에 한이 담기지 않기도 했다. 한이 다급하게 달려와 해연을 끌어안으며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절상을 꾹 눌렀다. 지혈하려고 했으나, 이미 많은 피가 빠져나간 뒤였다.
하얗던 시트와 이불을 새빨갛게 물들이다 못해 바닥까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을 정도였다.
해연은 점점 감기려는 눈을 참지 않았다. 본능에 모든 걸 따르듯 죽음에 몸을 맡겼다. 하지만 외려 한이 해연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듯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사색이 된 채 울부짖으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
해연의 팔이 힘없이 스르륵 내려가더니 툭, 붉은 이불 위로 떨어졌다.
해연의 안색이 점점 서늘하게 식어가는 중에도 한은 간절하게 애원했다. 제발 그녀를 살려달라고, 앞으로는 욕심 따위 부리지 않겠다며 평생 빌지 않던 신을 찾으며 기도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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