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다시 만난 사이
마루후지 료는 도쿄 대학교 법학부 4학년으로, 곧 졸업을 앞둔 졸업생이었다.
한동안 졸업 논문을 준비하느라 바쁜 탓에 집에서만 지냈더니,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얼굴들이 보여 살짝 당황하기까지 했다. 강의실로 들어오고 나서야 익숙한 얼굴이 몇몇 보이기 시작했다.
마루후지가 강의실에 모습을 보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강의실 내에 있던 학생들이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던 남자가 마루후지에게 다가오며 친숙하게 말을 걸었다. 마루후지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오랜만에 보는 듯이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의 눈동자는 강의실 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 오랜만이다, 마루후지. "
" 타나카. 너는 졸업 논문 준비는 끝난 건가? "
" 이야~ 에이스랑은 달라서 아직 고생하는 중이지. "
" 못 보던 사람이 많은데 "
" 아, 신입들이 많이 들어왔지. "
마루후지는 타나카가 알려주는 소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외출하기 전 벽에 걸려있던 달력을 봤던 걸 떠올렸다. 시간은 어느새 유구하게 흘러 신입생을 맞이하는 4월의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3학년 막바지에서부터 졸업 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집에 틀어박혀 5월의 끝에 나왔으니, 모를 법했다.
그제야 다시 주변을 둘러보자, 모르는 얼굴에서 보이는 동경의 눈빛이 느껴졌다. 익숙하게 느껴지는 동경의 눈빛 사이로 날카로운 시선이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마루후지는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익숙한 은발과 푸른 눈동자가 선명하게 자신을 향해 있는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루후지는 익숙한 얼굴에 절로 몸을 움찔거렸다. 그때 마루후지의 등을 받쳐주는 타나카의 손길이 아니었더라면 분위기가 애매하게 변할 뻔했다.
" 무슨 일이야? 어디 아프기라도 해? "
" 아아, 아니다. 내가 잘 못 본 것 같군. "
" 그래? 아, 저쪽은 불세출의 천재라고 불리는 에드 피닉스. 어릴 때 일본으로 왔다는데 신입생 대표였어. "
" ... "
" 잘생긴 외모 때문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편이지. "
" 그런가. "
마루후지는 타나카가 옆에서 아무리 떠들어대도 맞장구쳐줄 수 없었다.
울렁거리는 속과 일그러지는 눈앞에 제대로 집중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당장이라도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은 걸 참아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다만 문제는 당장 이 자리를 피하고 싶게 만드는 장본인은 상태를 알아차린 것 같다는 거였다.
그는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느껴지는 날카로운 눈빛에 결국 버티지 못하고 급하게 강의실을 벗어났다.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한 채 조금 빠른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루후지의 등 뒤로 걱정이 담긴 타나카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 후... "
" ... 왜 나한테서 도망치지? "
" 에드 피닉스... "
" 그래, 오랜만이네. 료. "
마루후지가 안색이 창백해진 채 달려온 곳은 법학부 4층에 있는 화장실이었다.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곳이었고, 그래서 마루후지는 안심하고 있었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서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박혀 들어왔다.
마루후지의 입에서 에드의 이름이 작게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에드가 고개를 들고서 사나운 눈길로 마루후지를 노려보며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에드는 화장실 입구 쪽 벽에 몸을 기댄 채로 삐딱하게 서 있었다.
마루후지는 곧장 티슈를 뽑아 물기 젖은 손과 얼굴을 닦아낸 뒤 그를 지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지나가려는 마루후지의 팔을 붙잡은 에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마루후지는 갑자기 자신을 붙잡은 에드의 행동에 미간을 찌푸렸다가 펴며 에드의 손을 쳐냈다.
" ... 할 말이라도 있는 모양인데, 나는 없다. "
" 아니, 들어줘. 료. "
" 들을 가치가 있던가? "
" 윽... "
에드는 마루후지의 앞에서 마치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날카롭게 마루후지를 보던 에드의 눈빛이 부드럽게 변했다. 에드의 표정이 바뀜과 동시에 마루후지의 표정도 바뀌었다. 무뚝뚝하기만 하던 표정이 어느새 날카롭게 변해있었다.
에드는 마루후지가 쳐낸 자신의 손을 괜히 문질러보다가 짧게 침음했다.
들을 가치가 없다고 하던 마루후지는 충분히 에드를 비켜서 나갈 수 있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 날카로운 눈매로 에드를 보았다.
에드는 짧은 기침 이후로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설명했다.
" 들었겠지만, 신입생으로 들어왔어. "
" ... "
" 나는 경제학부야. ... 혹시나 궁금해할까 봐. "
" 궁금하진 않았다. "
" 응, 그렇겠지. "
" ... 어차피 나는 1년 뒤면 졸업하니 상관없는 일이지. "
" 그건 걱정하지 마. 료도 알다시피 나는 유능하니 월반 신청할 거고, 료랑 같이 졸업할 수 있어. "
" ... "
에드의 말이 이어지자, 처음에는 입을 다물고 있던 마루후지가 냉담하게 반응을 해왔다.
궁금하지 않았다던 마루후지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며, 1년 뒤에 졸업하고 없다는 것까지 친히 알려주었다. 그의 말에 에드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답했다.
마루후지는 유능, 월반이라는 단어에 다시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대로 있다간 에드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게 뻔할 것 같아 빨리 벗어나고자 했다. 에드를 지나치고서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하는데, 그런 마루후지의 뒤를 에드가 따라왔다.
마루후지는 자신의 뒤로 에드가 따라오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결코 에드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던 그가 알고 있었더라면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리 없었다. 마루후지는 순간 느껴지는 어지러움에 벽을 붙잡고 겨우 버텼다.
뒤따라오던 에드가 마루후지를 부축하며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 료, 졸업 논문 한다더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
" ... 신경 쓸 정도는 아니다. "
" 안 되겠어, 보건실이라도 가자. "
" 뭐? 안 가도... 윽! "
마루후지는 자신의 귓가에 닿는 부드러운 음성에 절로 몸을 움찔거렸다.
그는 자신의 팔을 붙잡아 오는 에드의 손길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또다시 휘청거리는 탓에 그러지 못했다. 졸업 논문을 위해 7일간 2시간씩만 잠을 자며 매달렸더니, 몸 상태가 안 좋아진 탓이었다.
제대로 밀어내지 못하니 그저 힘없이 에드의 손길에 이끌려가기만 할 뿐이었다.
보건실에 도착하자, 에드가 마루후지를 잠시 의자에 앉혀둔 뒤 약장 앞으로 향했다.
처음 오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익숙하게 약장을 뒤적거려 약을 꺼냈다. 약 성분을 이리저리 확인해 보더니 물컵에 물을 따라서 가져왔다. 에드는 마루후지에게 세 알의 약과 물컵을 건넸다.
마루후지는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서 경계했지만, 밀려오는 어지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약을 받아낸 뒤 한입에 털었다.
입안에 감도는 쓴맛에 그가 찡그린 인상의 골이 더 깊어졌다. 에드는 마루후지가 자신이 건네는 약을 다 먹는 걸 보고 나서야 안심한 듯 짧게 숨을 토해냈다.
" 하... "
" 너무 무리하는 건... "
" 신경 쓰지 않았으면 하는데. "
" ... "
에드는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매와 무뚝뚝한 성격 때문에 오해를 잘 받는 마루후지가 걱정되었다.
졸업 논문에 얼마나 매달린 건지, 눈 밑에 푹 꺼져버린 다크서클과 푸석해진 피부가 걱정하고 싶지 않아도 걱정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마루후지에게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제대로 말을 끝내기도 전에 마루후지가 에드의 말을 잘라버렸다.
그의 태도에 에드가 입을 꾹 다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또다시 정적이 길게 찾아왔다. 오죽했으면 양호실에 찾아왔던 남학생이 두 사람의 분위기에 움찔거리더니 조용히 왔던 길로 돌아갈 정도였다.
보다 못한 에드가 입을 달싹거리며 말했다.
" 료, 시간 있어? "
" 없... 하... 지금 가능하다. "
조심스럽게 입을 열고서 나온 말은 시간 있냐는 말이었다.
마루후지는 처음에 입을 열고 시간이 없다고 하려고 했는데, 그러면 다음에 시간을 내라고 따라다닐 게 분명했다. 그런 꼴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느니 차라리 미리 대화를 하고 떼어놓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숨을 내쉬며 지금 가능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대학교 근처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 앉아 음료를 시키고 난 뒤 나란히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 사이는 적막 그 자체였다.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이 눈치를 볼 정도로 조용했다.
마루후지는 아까부터 입안에 느껴지는 약의 쓴맛이 신경 쓰였다.
평소라면 지금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졸업 논문을 마무리하고 있어야 할 게 분명했다.
" ... "
마루후지는 누가 보아도 앉은 자세의 정석처럼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서 앉아 있었다.
에드는 본인 느낌대로 편안한 분위기를 풍겨대며 나른하게 앉아 있었는데, 그 상태로 서로 말도 없이 한참이나 각자 시킨 커피나 홀짝거리고 있었다.
마루후지는 먼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고, 에드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는 눈치였다.
마루후지의 입장에선 오히려 시간을 빼앗기는 것 같아 커피만 마시고 일어날까, 고민했다. 분명 할 말이 있는 듯한 분위기였는데, 막상 카페에 도착해서 나란히 앉아 있는 동안 아무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커피가 나올 때까지 말이다. 심지어 커피를 마시고 있는 지금, 잔 안에 있는 커피는 절반 정도 남은 상태였다.
마루후지가 생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막상 그의 입은 커피를 홀짝거리며 천천히 마시고 있었다. 카페에서 서로 말없이 30분 정도 있었을까, 역시 먼저 입을 연 건 에드였다.
" ... 료, 나에게 할 말 없어? "
" 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
" ... ... 왜 나에게 그동안 잘 지냈냐고 안 물어봐? "
" 안 물어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
" 약속했잖아. "
" ... "
" 료, 너는 어떻게 지냈어? "
조심스럽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음성이 마루후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마루후지는 에드의 할 말 없냐는 말에 일관된 태도를 보이며 팔짱을 끼고 그를 보았다. 냉소하게 받아친 말에 에드가 입을 꾹 다물었다가 할 말을 꺼내지 못하는 사람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에드는 속에 담아두었던 말들 중에 어떤 것을 골라야 맞은편에 있는 그가 도망치지 않을지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고르고 골라, 겨우 꺼낸 말이 빛바랜 약속이었다. 에드는 마루후지가 적어도 자신의 말에 따라 잘 지냈냐고 물어봐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외려 에드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이었다.
에드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감정을 억누른 채 약속이지 않았냐고 물어보았다.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 건지 마루후지의 고개가 옆으로 틀어졌다. 에드는 거기에 작은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용기를 내 마루후지에게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보았다.
그에게서 답이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 ... 알려주고 싶지 않군. "
" 료... "
하지만 다시 돌아온 건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대답이었다.
어떻게 지냈냐는 물음에 마루후지가 평소보다 더 무뚝뚝하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며 말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할 말만 하고서 테이블에 있던 커피를 홀짝거렸다.
에드는 마루후지가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렇게 행동하는 걸 보면 지금 상황 자체는 그에게 나쁘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확신할 순 없었지만, 빛바랜 추억 속에 있는 그가 자신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잠시간의 정적.
마치 그 정적은 에드가 가지고 있는 이상과 지금 현실의 괴리를 노골적으로 알려주고 있는 듯했다.
" ... "
한 번 정적이 생길 때마다 오랜 시간이 지나갔다.
두 사람은 그 공백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해 보였다. 마루후지는 그 자리에 더 이상 있기 싫었던 탓에 평소라면 담지 않았을 말을 꺼냈다. 어찌 보면 과거의 편린에서 그를 놓아주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다.
이제 더는 상처 받지 않을 자신과는 달리 에드는 아직까지도 과거의 편린을 쥐고서 상처받고 있었으니까.
그 편린에 자신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마루후지는 목젖까지 치고 올라오는 말을 내뱉기까지 참으로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이런 기분은 이미 과거에 한 번이면 족했다.
" 이 대학으로 들어온 건 네 실수다. 나는 더 이상 과거를 연연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
" ... 정말 기회조차 없는 거야? "
마루후지는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나오지 않으려고 하는 말을 꺼내기 위해 제 허벅지를 에드 몰래 꼬집어야 했다.
덤덤한 척, 무심한 척하며 자신은 미련조차 없다는 걸 피력했다. 이 자리에 있는 둘 중에 가장 미련이 넘치는 게 자신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서 결국 삼키지 못한 말을 꺼냈다.
그 말이 끝나고 천천히 눈을 뜨며, 에드의 얼굴을 보았다.
기억의 조각보다 더 선이 굵어지고, 키도 커버린 그의 모습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마냥 어린아이처럼 보이던 모습은 이제 제법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루후지가 인상을 찡그리는 모습에 에드가 움찔거리며 기회를 달라는 듯 말했다.
" ... 더 이상 할 말 없으니 가보도록 하지. "
" 료... "
하지만 마루후지는 그 기회를 줄 생각조차 없는지 에드의 말에 대답 대신 커피를 한 번에 들이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 위로 잔을 내려두고서 할 말이 없으니 가보겠다는 말을 남겼다. 발걸음을 돌리려고 할 때, 애처로운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오는 에드를 보았다. 언제나 당당하고, 여유만만하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에드의 모습을 보니 과거의 일 따위는 아무렇지 않다고 말할 뻔했다.
마루후지는 입을 꾹 다물고서 고개를 틀어내며 발걸음을 돌렸다. 성큼성큼 카페를 나서며 끝까지 남겨진 에드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두통까지 더해지자 절로 인상이 험악하게 찡그려졌다.
카페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에드는 멍하니 비어진 커 잔을 보았다.
" 하지만 그 반응은... "
" 료... "
에드는 자신이 살펴보았던 그의 반응이 잘못 되었을 리 없다고 부정했다.
무어라 중얼거리던 에드의 입술은 이미 떠나버린 마루후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에드는 얼마나 집중한 건지 자신의 곁으로 여학생들이 다가와 말을 걸어와도 답을 주지 않았다. 아니, 무시하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어떤 생각을 한 건지, 종국에는 고개를 끄덕이던 에드는 마루후지가 자신을 두고서 연연하지 않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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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와 마루후지가 향하는 곳은 자신의 집이었다.
이제까지 졸업 논문을 위해 스스로를 감금하고, 지냈던. 지금은 그 무엇보다 가장 원하는 곳. 안 그래도 떨어진 체력이었는데,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일들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봄이라고 느끼기엔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루후지에게 있어 오늘 하루에 일어났던 일들은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2년 만에 다시 만난 에드는 철부지 도련님이라는 느낌을 벗어던지고 어느새 성숙한 청년티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흔들릴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의 모든 감정을 가져간 것도 모자라 패배감을 안겨주었던 사람이 에드였다. 그가 학생일 때부터 알고 있던 모습이 있었는데, 그때와는 너무 비교되는 모습에 당황스럽기만 했다.
오랜만에 만난 에드는 철부지 도련님보다 충분히 매력적인 남성이 되어 있었다.
" 하... 이럴 때가 아닌데. "
마루후지는 자신이 중얼거린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 누군가를 떠올리거나 과거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아직 채 마무리하지 못한 졸업 논문을 마무리하는 게 더 우선이었다. 하지만 집으로 가고 있는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있는 지금도 논문보다는 에드를 떠올리기만 했다.
그는 움직이던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손으로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마루후지 료,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졸업 논문은 곧 끝을 볼 테고, 논문이 끝나면 졸업이니 볼 일은 없어. 그는 스스로를 다독이듯 생각하며 다시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를 지나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봄이라고 즐거운 표정이 가득했다.
그런 그들 사이에서 그만이 어두운 표정을 하고서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 왜 하필 경제학ㅂ... 하... "
마루후지는 아무 생각 없이 걸으려고 하다가도 에드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자기를 따라서 도쿄 대학까지 따라와 놓고서 법학부도 아니고 경제학부라니,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도쿄 대학에서는 학부가 크게 상관없긴 했지만, 그래도 신경 쓰였다.
그는 콧등을 꾹꾹 누르며 최대한 스트레스 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경제학부를 택한 건 아무래도 회사를 위해서인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하기로 헀다. 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 자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에 자신에게 패배감을 안겨주던 놈이 저를 위할 리 없다는 생각이 당연했다.
" 맥주라도 마셔야 잠을 자려나. "
마루후지는 가던 길을 다시 멈추고서 옆에 있는 편의점을 보았다.
잠시 들어가서 숙면을 위한 맥주를 사고, 맥주와 함께 먹을 간단한 안줏거리도 구매했다. 오늘 있었던 일 때문에 맥주라도 마시지 않는 이상 잠을 제대로 자긴 글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생각을 그만두어야지 생각하면서도 꾸준히 에드를 떠올렸다.
마치 거머리처럼, 끈덕지게 달라붙는 거미줄처럼. 에드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모습에 힘들어했다. 겨우 집 앞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조차도.
" 아... "
집으로 돌아온 마루후지는 차라리 대학교에 있는 동아리실로 갈 걸,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2년 전, 에드와 처음 만났던 것이 바로 자신의 집이었다. 기억을 뒤집고 싶지 않았지만,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잊으려고 했던 기억의 조각이 마루후지의 안을 들쑤셨다.
[ 마루후지 씨, 안녕하세요. ]
처음에 마주했던 건 자신의 능력을 믿고 여유만만이었던 철부지 도련님이었다.
이젠 하다 하다 환청에 환각까지 보인다고 생각하며 굳어버렸던 발걸음을 움직였다. 발걸음이 그도 모르게 거실로 향했다. 거실에 도착했을 때는 눈앞에 에드가 웃으며 처음 인사를 했던 모습이 보였다.
" 미치겠군. "
마루후지는 지끈거리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를 꺼내 마셨다.
논문은 술을 마시고 잔 뒤에 일어나면 할 생각이었다. 지금 상태로 논문을 쓰면 대차게 말아먹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스스로를 잘 알고 있던 마루후지였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그는 맥주캔을 꽉 움켜쥐고서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앳되어 보이는 모습을 한 에드가 계속해서 그의 이름을 불러댔다. 여유가 넘치는 부드러운 음성, 아직 사춘기가 오지 않아 조금은 미성에 가까운, 그 느낌에 마루후지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꾹 감아버린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 마루후지 씨는 잘 알려주는데... 제가 너무 빨리 배우네요. ]
" ... "
언젠가 한 번은 들었던 적 있었던 말.
그 말에 치기 어렸던 대학생이었던 자신은 에드가 풀지 못해 당황했으면 하는 마음에 밤낮으로 어려운 질문을 찾아 숙제를 내어주곤 했었다. 하지만 찾을 때 노력했던 자신과는 달리 에드는 너무 손쉽게 풀었다는 게 문제였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마루후지의 입에서는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땐 왜 그랬을까, 뭐가 그리 분해서. 뒤늦은 후회와 아쉽지 않았다는 후련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팔을 들어 눈가를 가려냈다. 조금이라도 에드의 환상을 보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런 그의 행동이 가소롭기라도 하다는 듯 환상이 아닌 환각으로 더 심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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