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관계 이후, 론은 단단히 삐진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같은 게 아니라 삐진 게 맞았다. 최근 페디는 론이 며칠 내내 자신과 대화는커녕 가벼운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이 고민거리였다.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면 잔뜩 경계하는 맹수마냥 으르렁거리기만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말 한마디는 꺼내지 않고 눈빛으로만 꺼지라는 티를 내기만 했다.
그 사실이 페디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페디는 꺼지라는 눈빛을 보내는 론에게도 꾸준히 다가가며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다. 하지만 론은 그의 사과를 단 한 번도 받아주지 않았다.
론은 분명 그때 자신이 그만두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페디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게 화가 났다.
자신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는 상대의 행동에 배려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주기적으로 페디가 곁을 맴돌며 미안해하고 있었지만, 당장 그의 사과를 받아줄 마음 따윈 들지 않았다. 페디는 그날 맞았던 것에 상당히 화가 나 있는 상태였었기에 벌을 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행동이 론에겐 심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 론, 미안해... 응? "
" ... "
" 음... 정말 미안하니까 저번에 가고 싶다던 유원지나 갈까? "
" ... "
페디는 론과 사귀기 전보다 더 사이가 안 좋아진 것이 속상했다.
어떻게 하면 그가 자신의 사과를 받아줄까 고민을 하다가 문득 저번에 유원지 광고를 보고서 관심을 가지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나가는 말로 중얼거리자, 론이 귀를 쫑긋거리며 관심을 가지는 게 보였다.
페디가 피식 웃자, 론은 자신이 관심을 가졌던 게 부끄러웠던 모양인지 마른기침을 큼큼, 내뱉었다.
론에게 유원지라는 단어가 유효하다는 걸 알아차리고서 페디는 곧바로 빠르게 실행에 옮겼다. 간단하고 빠르게 유원지의 티켓을 결제하고 론에게 내밀어 보였다.
" 제대로 사과할게, 론. 우리 유원지 가지 않을래? "
" ... 이번만이야. "
론은 자신이 말하지 않았는데도 기억하고 있는 페디의 행동에 나름 감동받았다.
근처에 새로 생긴 유원지에 다양한 놀이기구와 퍼레이드가 나온다해서 가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는데, 이번 기회에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론은 그게 페디와의 데이트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다음 날, 페디는 론에게 제대로 사과하기 위한 마음으로. 론은 유원지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 유원지로 향했다. 론은 평소처럼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섰다. 하얀 티셔츠 위로 검은 와이셔츠, 찢어진 검은 청바지, 선글라스와 손목시계. 가볍게 외출하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밖에서 페디를 기다리던 론은 참다 못하고 페디를 부르며 외치려고 했다.
" 페디, 언제 나오는 거ㅇ... "
" 내가 늦었지? "
" 너... 너무 차려입은 거 아니냐? "
" 그런가? 너랑 데이트 할 생각에 기뻐서. "
" 데, 데이트는 무슨...!! "
론은 밖에서 기다리다가 너무 늦게 나오는 페디에게 화를 내려고 했다.
하지만 곧바로 나온 페디는 깔끔하게 뒤로 묶은 머리카락과 단정한 검은 셔츠, 연갈색의 코트를 입고 나왔다. 누가 봐도 누군가와 데이트를 하기 위한 옷차림이었다.
페디의 모습에 론이 얼굴을 붉히며 자신도 모르게 성질을 내고 말았다.
론의 짜증에도 페디는 익숙하다는 듯 웃으며 데이트를 언급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론이 데이트라는 걸 모르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페디가 예상했던 대로 론은 데이트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론이 다시 소리를 내지르자, 페디가 그의 손을 붙잡고서 조심스럽게 깍지를 꼈다.
" 이제 가자. "
" 소, 손은 놓고 가! "
" 이러다 입장에 늦겠어. "
두 사람은 그렇게 달려서 유원지에 도착했다.
입장한 이후부터 두 사람은 신나게 놀기 시작했다. 노는 중간중간 페디의 신사적인 배려에 론이 은연중에 두근거리는 설레임을 느끼고 있었다. 가장 인상 깊은 건 3번 정도 기구를 타고 나서 지친 체력을 달래기 위해 식당에 잠시 들렀을 때였다.
주문한 음식을 론이 가지러 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론이 카운터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을 때, 문득 시선이 페디에게로 향했다.
느리게 지나가는 시선 사이로 페디의 이목구비를 천천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곱게 뻗은 속눈썹과 햇빛에 비춰 반짝이는 금발이 심장 한쪽을 살살 간지럽혀왔다.
론이 페디를 빤히 쳐다보고 있을 때, 수줍게 웃는 소녀들이 페디에게로 다가갔다.
론은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귀를 귀울였다. 저들이 페디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지 순전히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라고 스스로에게 핑계 대며 조용히 숨을 죽인 채 들었다.
" 저기...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데, 혹시 번호 받을 수 있을까요? "
" 아, 죄송하네요. 저는 애인이 있는 사람이라서요. 지금 데이트하는 중인데... 어쩌죠? "
" 아... 아니에요. 제가 더 죄송해요. 즐거운 데이트 하세요. "
" 응? "
여자가 먼저 페디에게 전화번호를 받을 수 있냐고 물어보았고, 그러자 페디가 냉정하게 웃으며 거절했다.
거기다 애인이 있다며 깔끔하게 마무리까지 했다. 페디의 말에 여자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그러다 페디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지켜보고 있던 론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때 페디가 해맑게 웃어주며 론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자 부끄러워진 론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서 앞을 보았다. 그는 뜨거워진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좀처럼 열기를 식히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주문했던 음식이 나오자 황급히 들고서 페디의 앞에 앉았다.
론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페디의 말에 답조차 하지 않았다.
" 론, 아까... "
" 그냥 밥 먹어라. "
" 으응... "
론은 괜히 말을 돌리며 마구잡이로 밥을 먹기 시작하다가 콜록거리며 기침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페디가 천천히 먹으라고 티슈와 물을 론에게 건네주었다. 건네주는 물을 받으며 한 번에 마셔버린 론의 앞에 더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페디가 음식을 집어 자신에게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론은 크게 당황했지만, 계속 내밀어오는 음식에 거절하지 못하고 겨우 삼켜냈다. 론은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리고서 페디와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페디는 론이 자신이 내민 음식을 받아주었다는 것에 부드럽게 웃었다.
론은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두근거림과 설렘이 느껴지자, 자신이 페디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페디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틈에 론이 고개를 돌려 페디를 보았다.
그의 모든 것이 자신을 설레게 했고, 미치게 만들었다.
" 어떤 걸 타고 싶어? "
" 빨리 탈 수 있는 걸로. "
식사를 끝맞친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유원지를 걸으면서 어떤 걸 먼저 타야 할지 고민했다.
이미 앞서 타본 것들이 몇 개 있었기 때문에 선택지는 좁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고민되었다. 주말이라는 단점 때문에 유원지 안에는 사람이 많았고, 그로 인해서 기구마다 대기 줄이 상당히 길었다.
한 번 기다리면 기본 1시간일 정도로.
유원지가 폐장하기까지 5시간 정도 남긴 했어도 고민이었다. 짧은 걸로 많은 걸 시시하게 탈 것인지, 길지만 스릴 있는 걸로 적게 탈 것인지. 선택의 시간이었다.
론이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 모습을 페디가 지켜보았다.
가만히 보기만 하던 페디가 웃으며 론의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렀다. 낯선 손길에 화들짝 놀란 론이 놀란 눈으로 페디를 보았다. 몸을 뒤로 내빼며 잔뜩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 입가에 부스러기가 묻어있길래. "
" 내, 내가 알아서 할게! "
" 응... "
론의 경계에 페디가 애써 웃으며 손길을 물렸다.
론은 갑작스러운 손길에 당황한 것도 당황한 거지만, 두근거림에 열이 몰려 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후 두 사람은 유원지를 돌아다니며 그나마 줄이 짧아 탈 만한 것들을 타고 다녔다.
청룡 열차라고 불리는 롤러코스터를 먼저 탔는데, 이때 페디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더니 론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길에 론이 당황해하며 페디의 손을 무시하고 탑승했다. 자리에 앉자, 가드바가 내려오고, 직원의 안내 음성이 들려왔다. 론의 긴장이 풀리기도 전에 열차가 출발했다.
드드득, 굉음을 내며 열차가 점점 높은 고도를 향해 올라갔다.
반 바퀴를 돌고 순식간에 내려가기 시작하자 론의 입에서는 비명이 나왔다. 안색이 파랗게 질린 채 비명을 지르면서 옆에 있는 페디의 손을 꽉 잡아버렸다.
페디는 자신의 손을 잡아 오는 론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론, 괜찮아? "
" 우욱... 괘... 괜찮아... "
" 다른 거 탈 수 있겠어? "
" 괜찮다고. "
열차에서 내려오자, 속이 안 좋아진 론이 벽을 붙잡고 헛구역질까지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페디가 론의 등을 두들겨주며 걱정이 담긴 말을 건넸다. 그러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가볍게 회전목마를 타기로 했다. 회전목마의 대기 줄은 생각보다 짧아서 금방 탈 수 있었다.
회전목마 다음으로는 야간 퍼레이드를 구경했다.
론은 눈앞에서 터지는 폭죽을 보다가 신기한 듯 눈을 키워가며 구경했는데, 그 모습을 페디가 전부 자신의 눈동자 안으로 담아냈다. 론이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 ... 예쁘네. "
" 응, 예쁘다. "
두 사람이 같은 대화를 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달랐다.
론은 폭죽과 퍼레이드가 예쁘다고 한 말이었지만, 페디는 그걸 지켜보고 있는 론이 예쁘다는 말이었다. 페디의 말뜻을 론은 전혀 알지 못했다.
퍼레이드가 끝나고 두 사람은 유원지를 나섰다. 나올 때가 되니 어두운 밤하늘이 내려앉았다.
" 이제 늦었는데, 슬슬 갈까? "
" 그래. "
" 오늘 재밌었어? "
" 뭐... "
저녁 늦게까지 데이트를 즐길 대로 다 즐긴 두 사람은 천천히 밤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이미 어둑하게 내려앉은 어둠은 앞길을 감추었지만, 겨우 빛내고 있는 가로등이 두 사람의 앞을 밝혀주고 있었다. 론은 겨우 도착한 자신의 집 앞에서 한참 뜸을 들였다.
페디는 도착했는데도 집으로 안 들어가고 있는 론의 모습에 갸우뚱거렸다.
그때 론이 처음으로 페디에게 입을 맞췄다.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와 짧게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페디는 짧게 닿았다 떨어진 감촉에 놀라 멍하니 론을 보았다.
페디의 표정도 모른 채 론이 우물쭈물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 그, 미안하다고... 사실 너랑 하는 건... 기분 좋지만, 조금... 아니 상당히 창피해서... 나도 모르게 실수한 거야. "
" ... 나도 미안해. 론. "
론의 용기 있는 사과에 페디가 놀란 표정을 지우고 부드럽게 웃더니 자신도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이번에는 페디가 론에게 다가가 입을 맞췄다. 서로 화해의 키스를 나누고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어냈다. 서로 시선을 마주한 두 사람은 소리 없이 웃었다.
페디가 먼저 입을 열어 말했다.
앞으로는 관계를 맺을 때 서로 합의하에 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게 되었다. 론은 앞선 일들에 페디의 말이 영 미덥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연인이니 믿기로 했다.
페디의 말에 고개를 끄덕임으로 답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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