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戀情)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마음
남자는 자신이 행해왔던 모든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멈추지 않은 게 아니라 멈추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가장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눈앞에 목도하고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는 많지 않다. 그것이 불멸에 가까운 악마라고 할지라도.
남자가 처음 눈을 떠 자아라는 걸 알아가고 있을 때, 당연하게도 그에게는 이름조차 없었다.
거기다 몸은 성인의 몸이었으나 자아는 어린아이보다 못했다. 장난치기를 좋아했고, 모든 것이 궁금했으며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알아야 직성이 풀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점은 그가 인간이 아닌 악마였기에, 모든 것이 쉬웠다.
모든 것을 능력으로 풀어가며 삶을 살았다. 그런 그에게 가장 좋았고, 행복했으며 좋았던 게 언제냐고 물어본다면 필히 인간과의 첫 대면이라고 집을 게 분명했다. 무저갱에서 태어나 자신에게만 불편하게 대하던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반겨주는 존재를 만났던 날이었으니까.
상대는 바로 마을 사람인 처녀였다.
산골짜기 어귀에 사는 마을에 참한 처자였으나 남편이 전쟁 탓에 죽어버린 탓에 평생 과부로 살아가야 할 팔자인 여자였다. 그 여자는 자신보다 어려 보이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아이를 주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 얘야, 산은 위험해. "
" ... 위험해? "
" 나와 함께 가자꾸나. 그곳은 안전하니. "
" 안전? "
" ... 모르는 게 많아 보이는구나. 부모가 알려주진 않더니? "
" 부모가 뭐야? "
악마에겐 부모라는 존재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H는 그가 악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단순히 요즘 세상이 많이 좋지 않다 보니 아이를 버린 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H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늦은 밤, 어둠이 가라앉아 아무도 밖으로 나오지 않는 시간.
H는 남자의 머리 위로 자신이 입고 온 장옷을 둘러주었다. 남자는 자신과 똑같아 보이지만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에 매우 당황해 끌려오면서 벙찐 표정으로 H를 보았다.
H는 자신의 집으로 도착한 뒤 남자를 방 안으로 밀어 넣으며 주변을 살폈다.
아무리 남편이 죽어서 과부가 되었다고는 해도 집안에 다른 남자를 들이는 건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H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얘, 너 이름은 뭐니? "
" 이름? 그게 뭐야? "
" 신기하네... 아무것도 모르는데 말은 잘하는구나. "
" ... "
" D, D이라고 부르마. "
" D... 너는? "
" 나는 H라고 한단다. "
H가 남자에게 D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남자, 아니, D은 자신에게 이름을 지어준 H를 지긋이 보았다.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H의 모든 것을 살폈다. 미세하게 변하는 표정과 근육, 자신이 지내던 녹색의 숲과 같은 푸르른 머리카락과 눈동자.
눈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코가 얼마나 오똑한지.
그렇게 두 사람이 한집에 살게 되었다.
물론 시골 마을에서도 어느 정도 떨어진 집이라 그나마 나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과부의 집에 멀끔한 남정네가 산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몇 년간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의 관계는 바뀔 수밖에 없었다.
인간인 H의 입장에서 보기에 D은 멋진 남성이었고, D의 입장에서 H는 처음 만난 사람이자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기에 서로 끌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이 아니었어도 언젠가 서로에게 끌리기 마련일 그런 관계였다.
" H야, 이건 이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 "
" 아니... "
" 난 그것도 이해 안 가. 왜 남자는 주방 들어가면 안 돼? "
" 그건... "
평소의 H는 감정의 동요가 거의 없고, 대부분 무표정으로 지내는 사람이었지만, 간혹 드물게 D이 연달아 질문을 해올 때 그 질문이 답하기 애매하거나 모르는 질문이면 당황스러워했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H의 표정을 보고도 몰랐겠지만, 매번, 매 순간 H의 표정을 살펴보는 D에겐 아니었다.
몇 년 동안 H와 함께 살아온 사람으로서 못 알아본다면 서글플 정도였다. 사실 D은 H가 아주 잠깐의 동요라도 보여주는 게 좋아서 H가 당황할 만한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래도 D은 자신이 악마여서 다행이라는 생각했다.
악마의 능력 중 하나로 상대의 감정을 알 수 있었으니까. 자신을 향한 H의 감정은 자신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녀만 바라보는 자신과 달리 H는 이미 떠나보낸 이가 있었고, 이 이상한 나라의 법 때문에 제 마음에 솔직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D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감정을 알면서도 부정했다.
" ... H? "
" 윽... 괘, 괜찮아... "
" 하, H야...!! "
어쩌다가 마을에서 H의 소문이 돌고 말았다.
여염집 처자였던 H가 시집을 갔고, 그 집안의 장남이자 남편이었던 사내가 전쟁 통에 죽어버린 이후로 과부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과부인 H가 자신의 집으로 외간 남자를 들였다는 것까지.
어디에서 시작된 소문인지는 알지 못했다.
으레 소문이란 것이 그렇듯 발 달린 문이 아니던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린 소문은 H의 의견조차 듣지 않고 그녀를 탓했다. 돌팔매질하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그녀의 앞에서 대놓고 쑥덕거리는 여인들도 있었다.
오죽하면 시골 마을에 있는 아이들이 H를 상대로 노래를 불러댔다.
그날따라 늦게까지 도착하지 않는 H를 기다리던 D이 마을 아래까지 내려왔었다. 마을 입구까지 와버린 D의 눈에는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는 H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 과부랑 붙어먹은 게 네 놈이구나! "
" 이거 놔! "
" 들러붙을 게 없어서 과부랑 붙어먹어?! "
다급하게 뛰어가던 D이 H의 몸을 감싸며 챙겼다.
H는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D에게 괜찮다며 가라고 밀어냈고, D은 그런 H의 마음도 모르고 밀리지 않은 채 그녀의 상태만 확인하고 있었다. H에게 돌팔매질하고 있던 남자가 D의 팔을 붙잡아 H에게서 떨어트리려고 했다.
하지만 D은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H를 챙겼다.
그 순간 다른 남자들이 나타나 D과 H에게 돌팔매질을 해댔다.
" 망할 녀석들! 우리가 언제 당신네들에게 피해를 주길 했어, 뭘 했어?! "
" 으, 으아악!! "
" 괴, 괴물이다!! "
날아든 돌이 H의 머리에 부딪히고, 피를 흘리던 H는 그대로 픽 쓰러지듯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봐버린 D은 참고 있던 힘을 폭발시켰다. 순식간에 D의 몸이 커졌고, 그의 몸이 검게 물들었으며 푸른색이었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섬뜩한 기운이 내뿜어지자, 주변 일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검은 덩어리가 튀어나오면서 사람들을 덮쳤고, D의 품에 안겨있던 H의 몸이 검은 덩어리에 얽혀들어 갔다. H에게 돌팔매질을 하던 남자들과 뒷담을 하던 여인들이 겁에 질려 덜덜 떨더니 주춤 물러섰다.
D이 팔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 으악...!!! "
" 끄읍... 악! 사, 살려ㅈ... "
" 어, 엄마...!! "
H에게 돌팔매질하던 남자들, 뒷담하던 여자들, 그녀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던 아이들.
모두가 D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다. 하나, 둘 힘없이 픽픽 쓰러지고 작은 시골 마을이 조용해지고 나서야 D의 공격이 멈추었다. 한 번 폭발한 이후로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된 D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에게 얽혀있는 H를 다시 안았다.
기절했던 H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앞에 있는 검은 덩어리와 피비린내의 향에 그녀의 표정이 파랗게 질려갔다. 표정 변화가 없던 H가 유일하게 티를 냈다. D은 H의 표정이 파랗게 질린 것에 소심한 반응을 보였다.
" 하, H야... "
" 흐읍...!! 저, 저리가...!! "
" 나, 나... 나는... "
D은 자신이 D이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자신에게 겁먹은 채 벗어나려고 하는 H를 보기만 했다.
H는 주변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주변에는 마을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아무리 살펴도 그들은 기절한 게 아니라 죽은 것처럼 보였다.
D은 자신의 품에서 H가 벗어나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손으로 보이는 것을 보자 검은 덩어리가 보였다. 이건 아니었다. 자신이 무엇인지, 왜 자각할 때부터 숲이었는지, 왜 말은 할 줄 알아도 다른 모든 것들은 무지했는지.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이 전부 풀리긴 했으나 이렇게 알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다시는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여겼던 검은 덩어리들이 녹아 없어지듯 사라져갔다.
검은 덩어리 사이로 D의 얼굴이 나왔다.
" ... 다, D? 너니...? "
" 하, 하... H야... "
" 너... 흡, 너... ...괜찮아. 괜찮을... 큽?! "
" 하... H야! 아, 안 돼... 안 돼!! "
D은 검은 덩어리가 녹아 없어지고 있을 때, H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용기 내 다시 H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검은 덩어리였던 게 D인 줄 몰랐던 H가 그 틈 사이로 D의 모습을 보자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것도 잠시 괜찮을 거라며 D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 순간 녹아내리고 있던 검은 덩어리가 날카로운 송곳니처럼 커져 H의 심장을 뚫고 지나갔다.
H의 입에서 콜록거리며 기침과 동시에 핏덩어리가 뿜어져 나왔다. D에게 손을 내밀고 있던 H의 손이 뚫린 상처를 더듬었다. D은 H의 이름을 부르며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D이 H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날카롭게 꽂히던 덩어리는 사라져 버렸다.
" 우, 울... 지마... D, 나, 나는... 쿨럭, 괜찮... 아... "
" 하... H야, 미안해... 미안해... "
" 잘... 살아야 해... 끝까지, 함께... 못... 해, 서... 미안해... "
" H야... "
덩어리가 H의 몸을 지탱하고 있었던 건지 덩어리가 사라지자 그녀의 몸이 휘청거리며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D이 무너져 내리는 H의 몸을 붙잡기 위해 다급하게 달려갔다. 무너지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그러자 H가 옅은 미소를 보이며 괜찮다고 속삭였다. 살아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장 길게 말한 것이었다.
D은 떨리는 손으로 H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그녀의 감정을 무시했고, 부정해 왔지만, 이 순간까지도 자신에게 사모한다고, 괴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냥 차라리 아는 채 할 것을. 알은 채하고 괜찮다고 받아줄 것을.
이제와 잃어놓고서 후회한들 의미가 있진 않을 텐데.
" H야, 나도... 나도 사모해. 괴고 있어. "
" ... "
" 너는... 내, 내... 마지막 연정이야. "
D은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이젠 답을 주지 않는 H를 끌어안았다.
H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D은 점점 차갑게 식어가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은 채 자신들이 함께 지냈던 집으로 돌아갔다. H가 D의 곁을 떠나고, D 역시 죽길 바랐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는 악마였고, 악마는 불멸에 가까운 존재였으며 스스로의 목숨조차 끊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대신 D은 수십, 수백 년을 살아가면서 재력을 쌓았고, 그 재력을 바탕으로 인간을 다시 살리는 걸 연구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되살릴 수 있는 걸 연구해 왔다.
하지만 모든 연구가 좋게 굴러가지 않았다.
특히 사람을 살린다는 것 자체가 인륜을 저버리고 신의 뜻에 반하는 행위라는 것이기에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D이 H를 포기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 H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곧... 보게 될 거야. "
깔끔한 유리관 안, 마치 잠든 사람처럼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의 H가 보였다.
D이 자신의 힘으로 H를 죽었을 때의 상태 그대로 유지한 채 몇십 년, 몇백 년을 보냈다. 어느새 D은 마왕과도 견주어도 나쁠 것 없는 큰 힘을 가졌지만, 그 모든 힘이 오직 한 사람에게 향했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2010년 겨울.
D은 자신의 영혼을 조각낸 것과 H의 육체를 융합해 살리는 걸 한창 연구하고 있을 때였다. D은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왔지만, H가 없으니 언제나 무료하고 지루했다.
그날도 연구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무심하게 창밖을 보고 있을 때였다.
" 잠시... 멈춰 봐. "
" 예. "
그날은 지독하게 눈이 오는 날이었다.
마치 H를 처음으로 떠나보낸 첫 겨울처럼. 춥다 못해 뼛속까지 시려서 마음 안쪽이 시큰거리고 아려오는 느낌이 가득 드는. 그런 겨울이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래서일까, 한 보육원을 지나가다가 보게 된 한 소녀의 모습 속에서 너를 발견하게 된 건.
여름에 푸를 정도로 우거진 풀숲과 같은 녹빛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마치 자신이 보지 못했던 어릴 적의 너인 것 같았다. H야, H야. 너야? 네가 다시 날 만나기 위해 돌아온 거야? 내가 그렇게 생각해도 될까?
그렇게라도 생각하고 싶어. 그러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 저... 아저씨. 어디로 가는 거예요? "
" ... "
한빛 보육원 앞에서 꽃구경을 하고 있던 아이를 발견한 D은 그날 바로 그 아이를 입양했다.
자신의 아버지, 결국 자신이긴 했으나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 아이를 입양을 하게 되었는데 옆에서 조잘거리며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에 혼란스러웠다.
조금만 더 갈무리가 된다면 H의 목소리와 똑같을 정도였다.
이미 바래진 기억이기 때문에 그 목소리가 맞는지도 헷갈렸지만, 똑같거나 혹은 비슷하거나. 둘 중 하나인 건 확신할 수 있었다. 어쩜 무뚝뚝한 표정까지 완벽하게 똑같을 수 있는지.
D은 이게 지금 신의 장난인 건지 아니면 운명의 농간인 건지 알 수 없었다.
" ... 너는 여기서 D이라고 하는 녀석과 함께 자라게 될 거다. "
" 걘 누군데요? "
" 너랑 동갑내기 친구. "
" 아저씨가 제 아빠세요? "
" 아니. "
" 제 이름은요? 원래 입양되면 이름 새로 짓는 거래요. "
" ... H. "
" 어? 그거 제 이름인데요? "
" ... "
D은 자신의 집으로 그 아이를 데려와 핑거 스냅을 하며 세뇌하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라서 잘 걸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아이여서 잘 걸리지 않았다. D은 한숨을 짧게 내쉬고서 아이와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다 이름 이야기가 나와 H라고 부르자 아이는 그게 자기의 이름이라고 했다.
D이 인상을 살짝 찡그리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정도면 신의 장난이거나 운명의 농간이 100% 들어맞았다. 악마에게 희망을 심어줄 수 없다는 못된 심보에서 나온 장난이겠지. D은 혀를 차고서 다시 핑거 스냅을 한 다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걸 마지막으로 아이를 두고 집을 나섰다.
" 안녕! "
" 어? 여기 아저씨 댁인데... 들어오면 안 돼. "
" 네가 H지? 나는 D이라고 해. "
" 아저씨가 말한 게 너야? "
" 응. 나는 한D이고, 너는 최H래. "
" 그렇구나... "
집 밖에서 자신의 겉모습을 아이로 바꾼 D이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아이에게 인사했다.
아이, 아니 H는 여전히 무관심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갔다. 자신의 성을 들은 H는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런 답이 없었다. D은 그런 H의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서 나온 행동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하지 않는 건 H의 습관 중 하나이기도 했다. 처음에 말이 좀 많은 편인가?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아이의 모습이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20년, 여름.
아이의 모습으로 지내던 두 사람은 어느새 성인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느덧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할 정도로 엄연한 성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D은 H와 함께 한집에서 지내면서 자신이 의심하고 경계했던 부분이 의미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데려와 입양까지 했던 H는 과거 몇백 년 전에 자신이 알고 지내던 H가 맞았다. 가끔 그때의 H와는 다른 반응을 보일 때가 있긴 했지만, 대다수의 반응은 H와 같았다.
식습관, 행동, 말투, 표정, 몸짓 심지어 생각까지도.
모든 것이 그 아이를 보며 내가 H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 이미 H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연구를 놓지 못하는 건 혹여나, 하는 기대일지도 몰랐다.
" ... 이, 이건... ... 이러면 안 되는데? "
" 빨리 소장님께 연락해!! "
D은 자신의 연구가 완성되었다는 소식에 부리나케 달려왔다.
오죽했으면 이제 막 성인이 된 모습이라는 것도 까먹을 정도였다. 급히 내리던 D의 풋풋하던 모습 속에서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 없는데. D이 달리면서 중얼거렸다.
연구소 안으로 들어선 D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연구원들을 보았다.
부릅뜬 눈이 그들을 향해 어떻게 된 일인지 당장 설명하라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에 지레 겁먹은 연구원들이 D에게 설명을 장황하게 늘려놓기 시작했다.
D은 빠른 걸음으로 H의 몸이 있는 실험실로 걸어갔다.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진 패드에 비밀번호를 누르자 육중한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D이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몸을 굳혔다. 연구실 가운데에 있어야 할 H의 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급하게 주변을 살펴보자, 안쪽 연구원들의 쉼터가 문이 열려있었다.
" 소, 소장님... "
" 부소장, 이게 대체... "
" ... D? 너야? "
가장 먼저 튀어나온 부소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당황해하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
D은 인상을 찌푸리며 이유를 따져 물으려고 할 때, 익숙하고 또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D의 고개가 저절로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담요를 두른 채 긴 녹빛 머리카락을 늘렸지만, 언제나 미치도록 그림고 보고 싶던 H가 서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D은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다가가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 야! 한D!! 너 또 연구실 왔지?! 아저씨 연구 방해하지 말라니까! "
" ... "
" ?? "
" 한D...? "
D이 H를 끌어안고서 감정에 젖어있을 때, 또 다른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D은 뒤통수가 알싸하게 느껴졌다. 제 품 안에 있는 H도 H였고, 저를 보며 성까지 붙여 이름을 불러오는 H도 H였다. 두 H 모두 자신과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둘 중 누가 진짜 H냐고 물어본다면 자신은 둘 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진짜 H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둘이 된 거지? 연구도 잘못된 방향은 전혀 없었다. 어디서 잘못되어 두 사람으로 나누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 누구? "
" 나? 최H. "
" ... 나도 H. "
" 한D, 설명. "
" 설명. D. "
" 그, 그게... H야... "
D은 지금 이 순간만큼 당혹스럽고 무섭기는 처음이었다.
H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길게 흘러내렸다. 그게 꿈인가? 생각을 하다가도 꿈이 아니길 바랐다. H가 다시 제 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만큼은 좋았으니까.
하지만 차마 설명하지 못할 지금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D은 그저 H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엔 지금 막 눈을 뜬 H가 혼란스러울 테고, 그렇다고 설명을 하자니 함께 자라온 H가 이해해 줄 것 같지 않았다.
D이 혼란스러워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자, 담요를 덮고 있던 H가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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