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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구슬 편
부제 ::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분명 벌건 대낮인데도 학교 안의 화장실은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차갑기만 한 타일 바닥으로 인한 스산한 기운이 그대로 은정의 피부 위로 느껴졌다. 은정은 추위에 움찔거리며 몸을 떨었다. 이상한 기운에 주변을 둘러보지만, 평소와 같은 화장실이었다.
기분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애써 무시했다.
가장 안쪽 칸으로 들어가 볼일을 보고 있을 때였다. 뚜벅뚜벅, 발 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은정은 애써 숨을 죽이며 없는 척했다. 정말 웃기게도 공중화장실에 있을 때는 하고 싶지 않아도 절로 하게 되었다.
속으로 그렇지, 하며 쿡쿡 웃었다.
우당탕탕, 밖에서 무얼 하는지 알 수 없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 쏴아아,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다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에 은정은 알 수 없는 소름이 들었다.
" 어, 언니?? 언니들이에요? "
" ... "
맞은편에 있는 사람은 은정이 아무리 불러도 답을 주지 않았다.
문 너머인데도 강한 시선이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은정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급하게 뒷정리를 하고 옷을 정리한 뒤 문고리를 잡아 열고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문고리를 붙잡고 돌려고 고리는 헛돌기만 할 뿐, 열리질 않았다.
당황한 은정이 주먹으로 문을 쾅쾅 두들기며 맞은편에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여전히 밖에 있는 사람은 인기척만 낼 뿐이었고, 답을 주지 않았다.
그때였다. 은정의 머리 위로 촤아악, 얼음골처럼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 꺄아악!!!! "
" 미친년아, 언니들한테 작작 꼬리 쳐! 너네 학교로 돌아가! 촌년아! "
" 하아... 하... 흐윽... "
" 돌아가기 전까지 거기에 있어. "
갑작스러운 찬물에 당황한 은정이 상황 파악을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뼈마디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 때문인 건지 아니면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 탓인지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질 않았다. 뒤늦은 추위까지 몰려오니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안 그래도 안 굴러가던 머리가 더욱 안 굴러갔다.
맞은편에 있는 사람이 무어라 말하는 지도 들리지 않았다. 귓속에서 삐, 하고서 이명이 들려와 제대로 듣기도 힘들었다. 은정은 몰랐지만, 그녀의 입술이 점점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때 잠시 다녀온다던 학생들이 나타나지 않아, 걱정되었던 선생님이 화장실에 찾아와서 다행이었다.
" 너네 여기ㅇ... 어머, 너 지금 뭐 하니?! "
" 서, 선생님... 안 돼요! 쟨 벌받아야 한단 말이에요! "
" 벌이라니... 무슨 말이니? 은정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 "
" 아악!!! 악!!! "
" 무슨 일입니까?! "
선생님은 화장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상황에 상당히 놀라셨다.
은정의 모습은 안 보이지만, 그녀를 뒤따라 나섰던 학생이 문고리를 꽉 잡은 채 한 손에는 물 양동이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 물 양동이에는 내용물이 있었다는 걸 알려주듯 고인 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거기다 그 학생의 표정이 평소 알고 있던 그 착하고 다정하던 아이의 표정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단번에 붙잡고 있는 저 화장실 칸 안에 은정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또각또각, 선생님은 그대로 그 학생이 붙잡고 있는 손을 떼어내고 은정을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학생이 문고리를 붙잡고 있는 손길이 워낙 강한 탓에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손을 떼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학생이 비명을 지르며 바둥거렸다.
그 탓에 다른 반에서 수업을 하고 있던 선생님들까지 나타나 상황을 보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은정은 점점 자신의 몸에 온기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물이 너무 차가웠던 탓도 있지만, 상당히 많은 양의 물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 박 선생님! 이 학생 좀 떼어내 주세요!! "
" 아이고, 희진아. 너 뭐 하는 거냐. 당장 안 놔? "
" 아!! 아악!!! 벌줘야 한다고요!! "
" 이 년이 미쳤나. 당장 안 놔?! "
" 아아악!! "
" 혜, 은정아... 너 괜찮니?? "
" 서... 선... 흐윽, 선생님... "
" 빨리 보건실부터 가자꾸나. "
이 선생님은 뒤늦게 들어온 박 선생님에게 sos 요청을 보냈다.
그러자 학생과 안면이 있는 듯한 박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학생을 떼어냈다. 아무리 같은 여자라고 한들, 선생이 학생의 몸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박 선생님은 학생의 허리를 붙잡고 들어 올렸다.
박 선생님으로 인해 문고리에서 손을 놓치자, 학생이 더더욱 발악하며 바둥거렸다.
그 틈을 타서 이 선생님이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자, 그 안에서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 은정을 발견했다. 은정의 상태가 생각했던 것보다 좋지 않았다. 입술은 파랗게 질렸고, 얼굴은 하얗게 변한 상태였다.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 몸과 물로 인해 얇은 셔츠가 피부에 달라붙어 속이 다 비치고 있었다.
이 선생님은 다급하게 자신이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어 은정에게 둘러주었다. 그때, 화장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희진이라는 학생이 내지르는 비명에 놀란 학생들과 선생들이 몰려든 것이었다.
상황을 가장 먼저 파악한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밀어내며 화장실에서 나올 수 있게 해주었다.
" 이 일은 선생님이 책임지고 징벌하도록 하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
" 선생님... "
" 얼른 보건실부터 가야겠네. "
이 선생님의 지도 아래 은정은 무사히 보건실에 도착했다.
보건실에 도착한 이 선생님은 곧장 은정을 침대에 앉힌 뒤 캐비넷 안에 있던 마른 수건으로 은정의 몸을 닦아주었다. 꼼꼼하게 닦아내 주더니 다른 캐비넷 안에서 환자복처럼 보이는 옷을 꺼내 은정에게 건넸다.
추위에 덜덜 떨고 있던 은정은 그 옷을 받았다.
"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다. 그 상태로 계속 있으면 감기 걸리겠어. "
" 네... "
" 커튼 쳐줄 테니까 옷 갈아입으면 말하렴. 선생님은 감기약을 찾아봐야겠구나. "
" 감사합니다... "
" 선생님이니까. 제자를 챙겨야지. "
이 선생님은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은정의 어깨를 감싸주며 토닥여주었다.
다정하면서도 어른스러움에 은정은 코끝이 찡하고 울려왔다. 금방이라도 울고 싶었지만, 애써 참으며 코를 훌쩍거렸다. 이 선생님이 커튼을 쳐주자, 은정은 건네받은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벗는 순간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에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 무슨 일 있니? "
" 아니요... 다 갈아입었어요. "
" 그래, 일단 감기약이랑 물 마시고 한숨 쉬고 있으렴. "
" 감사합니다... "
은정은 잔뜩 겁에 질린 채 주변을 다급하게 둘러보았다.
양손으로 옷을 움켜쥐고 가슴을 가렸다. 그 인기척 탓인 건지 이 선생님이 무슨 일 있느냐고 물어왔다. 은정은 밖에 선생님뿐인데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다급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다 입었다고 말하자, 이 선생님이 커튼을 걷고서 물 한 컵과 감기약을 건네주었다.
약을 건네받은 은정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약을 삼켰다. 약을 삼키고 나서야 불안함과 긴장감이 탁 풀렸다. 그 탓인지 점점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은정이 졸린 모양인지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걸 지켜보던 이 선생님은 의자를 끌고 와서 자리에 앉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 은정아, 선생님께 무슨 상황이었는지 알려주겠니? "
" 그게요... 너무 졸려서 화장실 갔잖아요... "
" 그렇지. "
" 화장실에 도착해서 볼일 보고 나오려고 했는데, 발걸음 소리가... "
은정은 교실을 나섰던 순간부터 있었던 일을 전부 알려주었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졸음이 몰려와서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그러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 선생님이 은정의 몸을 눕히며 무리해서 이야기하지 말고, 자고 일어나서 이야기 하자는 말을 남겼다.
그 말에 은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길대로 천천히 누웠다.
이불까지 덮고, 장판까지 켜니 따뜻한 기운이 올라와 노곤해졌다. 사르륵 감기는 눈꺼풀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완전히 잠에 빠져들기 직전에 이 선생님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 잘 자렴. "
이 선생님은 보건 선생님 자리에 있는 차트에 은정의 이름을 남겼다.
그녀가 이름을 적고 있을 때, 다급한 소리로 보건실 문이 열렸다. 급박하게 찾아온 사람은 댄스부 사람들이었다. 이 선생님은 댄스부 학생들을 보며 살짝 놀란 눈으로 보았다.
" 어머, 지금 수업 시간 아니니? "
" 하아... 은정이한테 큰일이 생겼다고 해서요... "
" 그래, 병문안 온 건 좋지만 1명만 남고 다들 돌아가서 수업하렴. "
" 네. "
얼마나 뛰어온 건지, 6명이 동시에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 선생님은 바로 돌아가라는 말을 하지 않고, 1명만 남고 돌아가라는 말만 남겼다. 그렇게 6명에게 은정을 맡기고서 이 선생님은 보건실을 나왔다.
이 선생님은 보건실 문을 천천히 닫으며 귀를 기울였다.
" ... 이게 또 우리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며. "
" 축제가... "
" 역시 방법은 그것뿐인 거 같지? "
" 하... 평소에는 얌전하더니... "
" 그 방법뿐이야. 다들 그전까지는 더 타이트하게 은정이 지키자. "
" 은정이가 일어났는데 우리랑 안 다닌다고 하면 어떻게 해? "
마지막으로 누군가 내뱉은 말에 모두가 숙연해진 듯 일제히 조용해졌다.
이 선생님은 가만히 그 말들을 듣고 있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조용히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녀는 뒤늦게 아차 싶어서 급하게 입가를 가렸다고는 하지만, 눈이 반달처럼 휘어져서 웃고 있는 건 숨길 수 없었다.
보건실을 떠나 교무실로 돌아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매우 가벼웠다.
콧노래까지 절로 나왔으나 때마침 울린 수업 종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또각또각, 다시 그녀의 구두 소리가 복도를 가득 울려 퍼졌다. 복도를 거니는 그녀의 어깨가 계속 들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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