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구슬 편
부제 : 아프지 말아.
결국 그다음 날, 은정은 바보도 안 걸린다던 초여름의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그 탓에 어쩔 수 없이 그녀는 하루 병가를 낼 수밖에 없었다. 하늘 중학교에 다닐 때 한 번도 출석을 놓친 적 없었던 은정이었다. 그런데 여기로 이사 오고, 전학을 오자마자 한 학기가 다 지나지도 않아서 감기에 걸릴 줄은.
은정은 침대에 누워 찬 수건을 이마에 올린 채 생각했다.
어질어질한 눈앞에 괜히 서러움이 느껴졌다. 울컥 치고 올라오는 감정은 좀처럼 갈무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가볍게 무시하고 넘어가기엔 너무 서러웠다.
눈물이 금세 차올라서 눈 앞을 가렸다. 은정은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새빛여자고등학교 댄스부실 안.
그곳에는 6명의 여자들이 모여 앞으로의 대안을 내놓기 위해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녀들이 이마를 맞대고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건 총 2가지의 내용이었다.
하나는 앞으로 은정이의 학교생활이었고, 다른 하나는 감기에 걸린 은정이의 병문안이었다.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건 학교생활이었기 때문에 그 건을 먼저 이야기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의외로 작은 예은였다. 은정과 화해하긴 했지만, 여전히 어색한 기운이 감돌고 있던 걸 다른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다.
" 우리가 매일같이 등하교해도 동이 다르잖아요. "
" 그렇지. "
" 이번 일만 해도 하필 수업 중일 때 벌어진 일이었으니까요. 이거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할 거 같은데요. "
" 그렇다고 우리도 수업이 있는데 거기에 있을 순 없고... "
" 생각해 봤는데요, 현장학습으로 댄스부에 있게 하는 건 어때요? "
" 그럼 은정이 수업은? "
" 그건... 우리가 돌아가면서 해주면 되지 않을까요? "
" 그거야 어렵진 않은데, 은정이도 친구들이랑 시간을 보내야지. "
" 저였으면 같은 동급생하고 그런 일이 벌어지고 난 뒤면 친구들이랑 안 지내고 싶을 거 같은데요. "
작은 예은의 마지막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저번처럼 자신들의 동급생이 일을 벌인 거라면 접근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겠지만, 동급생... 거기다 심지어 같은 반이라면 말이 많이 달랐다. 작은 예은의 말은 틀릴 게 없었다.
모두가 이마를 맞대어도 마땅한 해결 방안이 나오질 않으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러고 있을 때, 교내에는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점심시간이었던 탓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식판에 음식을 받고 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학주 선생님이 댄스부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 지안아, 저번에 그 학생들 말이다. "
" 네. 학주 선생님. "
" 걔네 관련해서 할 말이 있으니 점심 먹고 교무실로 좀 오거라. "
" 네. 식사 맛있게 하세요. "
" 그래, 나는 이만 가보마. "
학주 선생님의 말씀에 모두가 시선을 교환했다.
무슨 할 말이 있기에 교무실로 오라고 하시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조금 다급하게 식사를 마친 뒤 양치까지 마친 뒤에 모두가 한마음으로 교무실로 향했다.
교무실 문을 열자, 그 안에는 이전에 은정에게 피해를 끼쳤던 학생들이 서 있었다.
여기서 놀라운 건 모두 다 다른 학생이었고, 6명의 입장에선 얼굴을 알고 있는 학생들이라는 것이었다. 댄스부가 출전하는 대회가 열릴 때면 언제나 참석해서 플랜카드까지 손수 만들어와 응원을 해주던 아이들이었다.
그중 가장 놀란 하윤이 한 학생의 이름을 불렀다.
" 주아야... 너... "
" 흑... 언니... 미, 미안해요... "
" 너네... 진짜 너네가 그랬어? "
" 아, 그년이 언니들한테 꼬리치는 게 보이잖아요! "
" 그만 안 해?! "
하윤이 이름을 불러주었던 학생, 박주아라는 학생은 처음 은정에게 화분을 던진 사람이라고 했다.
그다음으로 씩씩거리며 승질을 부리던 학생은 권소희, 그녀는 보건실에 있던 은정에게 묽은 염산을 뿌렸던 사람이었다. 그다음은 가장 최근이자 지금 은정이 학교를 나오지 못하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었다.
주희진. 그녀는 댄스부 팬클럽의 부회장이라는 직책까지 달 정도로 댄스부와 잘 아는 학생이었다.
모두가 걱정하고 있던 상황들이 맞아떨어졌다. 은연중에 자신들 때문이겠어?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전부 사실이라는 게 밝혀지자, 모두가 암담함을 드러냈다.
한숨을 쉬는 사람,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리는 사람, 멍하니 학생들을 보는 사람.
그중 가장 빨리 정신을 차린 사람은 지안이었다. 지안은 진지한 표정으로 가해 학생들을 보며 물어보았다.
" 너네... 왜 그랬어? "
" 걔가 언니들한테 꼬리 치는데 그걸 제가 냅둬요? 전 절대 못 놔둬요! "
" 아니, 글쎄 얘넨 멘토멘티라니까? "
" 3년을 안 하던 멘토, 멘티를 왜 전학생이 오니까 하는 건데요?! "
" 하... 일단 지안아, 얘네가 피해 학생에게 사과하고 싶다고 하는데... "
" 쌤!! 절대 안 돼요! "
" 안다, 알아. 하윤아. 그래서 난 만나게 해줄 생각 없다. "
" 휴... "
가해 학생들 중 목소리가 큰 건 단연 소희였다.
자신은 절대 안 된다며 빡빡 우겨대던 소희는 심지어 학주 선생님에게까지 대들었다. 다른 학생들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답이 없다는 걸 알아차린 학주 선생님이 묵직한 한숨을 내쉬며 지안을 불렀다.
그리고 나온 말은 가관이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싶다며 대면을 요청했다는 것이었다. 듣고 있던 하윤이 어이가 없어서 버럭 소리쳤다. 학주 선생님은 항상 밝은 하윤만 보다가 이런 하윤의 모습이 처음이어서 살짝 놀라셨다.
학주 선생님도 만나게 해줄 생각이 없다는 말에 댄스부 모두가 안심했다.
" 저기... 여기가 고등부 교무실 맞나요? "
" 아, 여깁니다. 이 선생님. "
" 어머! 댄스부 아이들도 있네요? "
" 예. 일단 피해 학생의 멘토니까요. "
" ... 중등부 선생님? "
그때 명랑한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오는 건 중등부의 이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은정의 반 담임 선생님이기도 했다. 댄스부 사람들은 왜 저 선생님이 이 자리에 오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피해 학생을 지켜야 할 담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더 가관이었다.
" 음... 그러면 제가 은정이에게 물어볼게요. "
" 예? "
" 아니, 그렇잖아요... 아직 이 아이들도 앞이 창창한데... 징계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
" ... 이 선생님, 제정신이십니까? "
" 어머... 문제가 되는 건가요? "
" 담임이라는 작자가 지금 피해 학생을 지키지는 못할망정 가해 학생들을 싸고도는 이유가 뭡니까? "
" 전 그저 선생의 입장으로 말하는 거예요. "
" 허... 저희가! 오늘 저희가 은정이한테 갈 건데, 그때 물어볼게요. "
" ... 그래라, 차라리 그게 낫겠다. 이 선생도 얘네들이 그 피해 학생에게서 결과 듣고 오기 전까지 아무것도 하지 마십쇼. "
" 흠... 알겠어요. "
못해도 담임이라면, 그런 말이 나오자, 이 선생은 그저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웃음을 감추려는 듯 입가까지 가리며 말하는 행동에 댄스부 사람들은 그저 어이가 없었다. 피해 학생에 대한 배려조차 없는 선생의 행동에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참다못한 서연이 언니들의 앞임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 말에 동의하는 듯 학주 선생님도 거들어주었다. 상황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자 이 선생님은 아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이 선생님과 가해 학생들이 자리를 피하고, 교무실에는 학주 선생님과 댄스부 학생들만 남아있었다. 한동안 조용하던 방안에 학주 선생님의 깊은 한숨만 들려왔다.
" 하... 이 선생은 내가 막아볼 테니, 너희는 피해 학생에게 가서 소식을 전하도록 해라. "
" 네, 선생님. "
" 이만 가봐라. "
댄스부 학생들은 교무실을 나와 댄스부 실로 돌아가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들은 수업을 마치고 나서 곧바로 은정의 집으로 향했다. 이미 며칠이나 등하교를 함께하면서 은정의 집은 이미 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달해야 할 유인물이 있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은정의 집에 도착한 6명은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반가운 소리가 울리고 자주 보았던 은정의 어머니께서 나와 6명을 반겨주었다.
" 어머, 은정이 병문안 왔니? "
" 네! 안녕하세요! "
" 온 김에 밥이라도 먹고 갈래? "
" 주시면 감사합니다! "
인사를 마친 6명은 전부 은정의 방으로 들어갔다.
6명이 들어왔을 땐 은정이 잠들어 있었다. 은정이 누워있는 침대 옆에는 식사로 죽을 먹은 흔적과 약을 챙겨 먹은 봉지가 있었다. 지안이 은정의 옆에 앉았고, 하윤은 은정의 의자에, 다른 네 사람은 바닥에 앉아 기다렸다.
지안은 가방에서 미리 전달할 종이를 꺼내두었다.
조잘조잘, 떠드는 사이 은정의 어머니께서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어머니의 손에는 쟁반 가득 간식거리와 오렌지 주스 6잔이 들려있었다. 어머니의 등장에 하윤과 서연이 다급하게 일어나며 들고 온 쟁반을 대신 받았다.
" 가, 감사합니다. "
" 곧 저녁 완성되니까 은정이 일어나면 같이 나오렴. "
" 네! "
그렇게 은정의 어머니가 다시 나가고, 남겨진 사람들은 은정이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6명은 다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지안은 자신이 꺼내둔 유인물을 들고서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와 부엌에 계시는 은정의 어머니를 불렀다.
" 어머, 무슨 일이니? "
" 여기... 은정이네 반에서 이번에 수련회를 가게 되었는데요. "
" ... 어머나... 은정이가 가려고 하려나? "
" 그래서 학교에서 특별히 은정이랑 저희랑 따로 움직이게 허락해 줬어요. "
" 그래? 그나마 다행이구나. "
" 수련회 가는 거 허락하는 동의서, 가져가야 해서요. "
지안이 은정의 어머니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을 때, 다른 학생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하윤이 자신의 등 뒤로 느껴지는 부스럭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막 잠에서 깨어난 은정이 일어나서 5명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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