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 차일드 타입

[HL/드림/240921] 사라진 기억 속에서

나비의 보관함 2025. 2. 13. 15:17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난 에스텔을 본 에스티니앙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멍하니 있는 그녀의 모습이 평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고 있어서 처음에는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는 자고 일어나서 물을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나왔다가 물이 든 잔을 들고서 방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에스텔이 멍하니 있는 모습에 에스티니앙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녀의 곁에 앉으며 걱정이 묻어나오는 말투로 말을 걸었다. 마치 그녀의 모습은 이 세상과 동떨어져서 이곳에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 에스텔? "

 

" ... "

 

" 에스텔, 물이라도 마실래? "

 

" ... 누구세요? "

 

" ... 에스텔? "

 

 

 

 

 

누구냐고 물어오는 에스텔의 말에 에스티니앙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들고 있던 잔을 탁상에 올려두었다. 

 

시선을 그녀에게 주며 조심스러운 손길로 에스텔의 어깨를 붙잡았다. 멍하니 있던 에스텔이 에스티니앙의 손길을 낯설다는 듯 움찔거리며 몸을 비틀어 손길을 피했다. 

 

그녀가 자신의 손길을 피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충격을 받은 에스티니앙이 에스텔을 보았다. 

 

에스티니앙의 눈에 잘게 몸을 떨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그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낯선 공간, 익숙하지 않은 사람, 생전 처음 와보는 곳처럼 어색하게 굴었다. 

 

 

 

 

 

" 에스텔, 내가 누군지 알겠어? "

 

" ... 모르겠어요. 그런데... 에스텔이 누군가요? "

 

" 에스텔은... 너야. "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에스텔의 눈은 어린아이 그대로였다.

 

에스티니앙이 입을 꾹 다물다가 에스텔이 너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불안이 담겨있던 눈동자가 느릿하게 껌뻑거렸다. 자신의 이름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낯설었다. 

 

평소처럼 편하게 반말을 하며 틱틱 거리는 말투가 아닌 존댓말을 하는 에스텔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에스티니앙은 자신의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내야 하나, 따위의 고민을 하고 있던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다. 

 

멍청하게도 에스텔의 상태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 ...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겠어? "

 

" 아니요... "

 

" 여긴 네 집이고, 나는 네... 너의... "

 

" 네? "

 

 

 

 

 

이곳이 어떤 곳인지조차 모르는 에스텔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다. 

 

이어서 자신을 소개하려던 에스티니앙이 말을 삼켰다. 그녀에게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해야 할지 의문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친구이자 가족이라고 소개하는 게 맞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욕심이 생겼다. 

 

기억을 잃은 그녀라면, 그렇다면 연인이라고 소개를 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이후에 에스텔의 기억이 돌아오게 된다면 문제가 될 선택이었지만. 잠깐의 꿈이라면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순전히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그녀의 기억을 이용해도 되는 건지도 의문이었다. 

 

에스티니앙의 시선이 바닥을 보고 있다가 에스텔에게로 향했다. 

 

 

 

 

 

" 저기...? "

 

" 아, 나는 너와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지. 오랜 소꿉친구이면서 가족이기도 하고, 언약까지 약속한 사람. "

 

" 아... 저, 정말요? "

 

" 내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 "

 

" 네... "

 

 

 

 

 

에스티니앙은 에스텔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눈을 질끈 감고 결국 욕심을 택하고 말았다. 그는 잔뜩 긴장한 듯 양손을 꽉 움켜쥐고서 에스텔에게 말했다. 사실과 거짓을 적절하게 섞어서.

 

오랜 소꿉친구이면서 가족이라는 것은 사실, 미래를 약속하고 언약까지 하기로 했다는 것은 거짓.

 

그녀를 향한 욕망이 너무 커져 버린 탓이었다. 에스티니앙은 자신이 말하고 난 이후로 에스텔의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이왕 거짓말을 한 거라면 당당하게 굴어야 할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함께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처음으로 에스텔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 그러면 저희는... 약혼... 관계인 거죠? "

 

" 그런 셈이지. "

 

" 음... 그렇구나. "

 

 

 

 

 

에스텔은 에스티니앙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집 안에 있는 사람이 그였고, 눈을 뜨고 난 이후로 머릿속이 하얀 도화지 상태였는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자신에게 이것저것 알려준 것도 이 사람이었다. 가까이에 있고, 정보를 알려주는 사람을 믿지 못하는 건 힘들었다. 

 

처음에야 혼란스러웠지만, 친절하게 이것저것 알려주는 사람 덕분에 머릿속의 정보가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에스텔의 곁에 앉아 있던 에스티니앙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에스텔이 어제 벗어두었던 외투로 다가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이제는 끝이 다 헤져서 자세히 봐야지만 볼 수 있는 수준이 되어버린 그 수첩 말이다.

 

그 수첩을 들고서 다시 에스텔에게로 돌아왔다. 

 

 

 

 

 

" ... 넌 자주 기억을 잊었고,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여기에 모든 걸 적어뒀어. "

 

" 아... "

 

" 우리 관계는 적혀있지 않지만, 우리가 뭘 하고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적혀있지. "

 

" 당신과의 추억은 안 적혀있나요? "

 

" 난 보지 않아서 모르겠군. 자, 읽어보도록 해. "

 

 

 

 

 

에스티니앙은 한참 수첩을 문지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스텔이 보기엔 그 모습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자신과 가족이자 연인이고 자신의 수첩을 쥐고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건 대체 뭘까.

 

에스티니앙이 수첩을 건네주자, 에스텔이 양손으로 받으며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첫 장에서부터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알 수 있었다. 종이 끝이 전부 헤져버린 상태였고, 종이 위로 다급하게 휘갈긴 잉크는 중간중간 끊겨있었다. 

 

꾹꾹 눌러쓴 글자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 기억을 잃기 전의 저는... 당신을 많이 좋아했나봐요. "

 

" ... 뭐? "

 

" 수첩 안에 그렇게 적혀있는걸요? "

 

" ... "

 

 

 

 

 

에스텔의 말에 에스티니앙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말하는 수첩 속의 애정은 당연하게도 가족으로서의 애정인게 분명했다.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에스텔은 그저 그 감정이 가족으로서가 아니라 연인으로서라고 생각했던 거였다.

 

에스티니앙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에스텔을 떠올리며 옅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