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 차일드 타입

[HL/드림/240919] 잊지 않기 위한 일

나비의 보관함 2025. 2. 13. 15:12



에스티니앙은 요즘 에스텔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냐하면,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뭔갈 끄적이고 있는 모습이라던가 멍하니 있다가 무언가 떠오르면 항상 들고 다니는 수첩에 적고 있었다. 에스텔은 나름대로 숨긴답시고 몰래 적고 있는 거였으나, 사실상 하루 종일 붙어서 지내는 에스티니앙에게서 숨길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에스티니앙이 에스텔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지 않는 게 더 이상하게 보일 정도였다. 

 

에스티니앙은 그녀가 언제부터 저러기 시작했더라, 기억을 헤집어 보기 시작했다. 에스텔이 수첩을 항상 주머니에 넣고서 저러기 시작한 건 사베네어와 라자한에 새벽의 혈맹을 도와주려고 갔던 날 이후부터였다. 

 

그때 그녀의 반응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 아, 아악...!! "

 

" 에스텔? 왜 그러는 거야. "

 

" 엄, 엄마... 엄마, 안 돼! "

 

" 설마... 에스텔, 정신 차려! "

 

" 에스텔이 왜 저러는 거지? "

 

 

 

 

 

사베네어와 라자한에 도착해 새벽의 혈맹을 만나고 그들을 도와주려고 하다가 재앙이 왔을 때, 에스텔은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환청처럼 쨍그랑, 큰 소리와 함께 어릴 적 보았던 사룡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환각이 에스텔의 눈앞에 나타나서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점점 다가오는 검은 기운과 커다란 몸체의 사룡. 에스텔의 숨이 점점 빨라지더니 격해졌다. 과호흡이 계속되자 에스텔이 비틀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재앙과 사룡은 엄연히 달랐으나, 그녀가 어릴 적 겪었던 트라우마가 재현되기엔 충분했다. 

 

그때와 지금이 꽤 비슷한 상황이었으니까.

 

현장에 도착한 에스텔이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한 채 비명을 내지르며 비틀거리자, 곁에 있던 에스티니앙이 다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에스텔에게 전혀 닿지 못했다.

 

에스텔의 눈앞에는 자신의 어머니가 사룡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 꺄아악...!! "

" 젠장, 에스텔...! "

 

" 일단 에스텔의 상태가 안 좋은 거 같으니 어디론가 들어가 보도록 하죠. "

 

" 좋은 생각입니다. "

 

 

 

 

 

에스텔이 자신의 귀를 틀어막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풀석 주저앉았다. 에스티니앙이 부축해 준 덕분에 그리 크게 다치진 않았으나 그녀의 다리가 바닥에 쓸려 상처가 생겼다. 

 

하지만 에스텔이 그런 것조차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당장 그녀의 눈앞에서 사룡이 마을을 불태우고, 마을 사람들을 잡아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룡에게로 걸어가던 엄마와 어린 동생을 잡아먹기까지 했다.

 

다시 돌아온 기억이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게 했으며 숨통을 막히게 했고, 쉴 틈 없이 눈물을 쏟아내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환각이고 환청이라는 사실을 에스텔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눈앞의 끔찍한 상황에 온 정신이 팔려있을 뿐이었다. 

 

 

 

 

 

" 아아... "

 

" 에스텔! "

 

 

 

 

 

결국 버티지 못한 에스텔이 까무룩 기절하면서 그대로 힘없이 쓰러졌다. 

 

무너지듯이 쓰러지는 그녀의 모습에 에스티니앙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새벽의 혈맹 사람들은 처음으로 보는 에스티니앙의 당황한 모습도 신기했지만, 에스텔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모험가가 에스텔을 보더니 에스티니앙에게 물약 하나를 건네주었다. 

 

체력 회복을 도와주는 포션들의 색과는 다른 오묘한 색의 물약이었다. 에스티니앙은 급한 대로 모험가가 건네준 물약을 에스텔에게 먹이려고 했지만, 기절한 에스텔은 제대로 삼키질 못했다. 

 

마셔야 할 텐데 마시질 못하고 있으니 지켜보던 사람들까지 신경이 쓰였다. 

 

 

 

 

 

" !! "

 

" 에, 에스티니앙? "

 

" ... 우린 이만 나갑시다. "

 

" 자리를 비켜주자고. "

 

 

 

 

 

기절한 그녀에게 약을 먹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에스텔의 곁엔 에스티니앙이 있었고, 그의 뒤로 새벽의 혈맹 사람들이 에스텔을 걱정 가득한 눈으로 보았다. 관계는 그리 친하진 않았으나, 비명을 지르는 에스텔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서 자칫 잘못되었다간 큰일 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걱정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에스티니앙은 그 하나뿐인 방법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에 잠겼다. 

 

그러다 에스티니앙은 결심한 듯 물약을 열고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댔다. 새벽의 혈맹 사람들이 등 뒤에서 지켜보고 있더라도 에스티니앙은 상관없다는 듯이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약을 입안에 머금은 채 바로 에스텔의 입에 맞춰 약을 넘겼다. 

 

 

 

 

 

" 으음... "

 

 

 

 

 

에스티니앙이 대범하게 에스텔의 입술을 맞추고 약을 넘기는 모습을 지켜보던 새벽의 혈맹 사람들은 전부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모두가 놀랄만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자리를 피해주기 위해 잠시 두 사람의 곁을 떠났다. 

 

방에는 에스티니앙과 에스텔만 남아있었고, 두 사람은 여전히 입을 맞추고 있었다. 에스티니앙은 입안으로 혀를 넣을 뻔했으나, 참아내며 약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전부 에스텔의 입안으로 넣어주었다. 

 

에스텔의 목울대가 움직이며 약을 삼켜냈다. 

 

에스티니앙은 약을 삼킨 에스텔의 안색이 점점 괜찮아지자 안심한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 으음... 에스티니앙...? "

 

" 에스텔, 괜찮나? "

 

" 여긴... 모두는? "

 

" 네가 쓰러져서 다들 기다리는 중이야. "

 

" 아... 내가? 뭐... 때문이지? "

 

 

 

 

 

모험가의 약 덕분에 깨어난 에스텔은 아까와의 반응과 달리 평소처럼 행동했다. 

 

에스티니앙은 에스텔의 반응에 의문을 표했지만, 우선적으로 그녀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아까 쓰러지면서 다리에 쓸린 상처 말고는 다친 곳도 없었다. 

 

이후 다시 밖으로 나와 두 사람이 새벽의 혈맹 사람들과 합류하게 되면서 임무가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재앙을 마주한 에스텔이 이전과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에스티니앙은 몰랐다. 실상은 에스텔이 기절한 동안 깨져버린 어릴 적의 기억을 다시 봉인하면서 더 깊숙한 곳으로 숨겨버렸다. 

 

그 어떠한 자극을 받아도 깨어지는 일이 없도록.

 

 

 

 

 

" 에스텔, 지금 뭐 해? "

 

" 에스티니앙... 아, 아무것도 아니야! "

 

" ... 일단 밥부터 먹어. "

 

" 응. "

 

 

 

 

 

그날 이후로 생겨난 에스텔의 버릇이 바로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기억을 기록하기 위해 작은 수첩에 기록하기였다. 

 

에스텔은 자신의 기억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는 걸 은연중에 깨닫고 있었고, 그걸 깨달은 게 에스티니앙과 이야기를 하다가 라벤더 숲의 기억이 없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부터였다. 

 

에스텔은 그때 에스티니앙이 자신에게 했던 이야기가 뇌리에 깊게 박혔다.

 

스스로 떠올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인상에 남아서였을까, 이후부터 작은 수첩에 기억나는 모든 것을 적고 다녔다. 수첩에 적고 다니는 노력이 무색할 정도로 기억이 없어지는 속도가 빨랐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 음, 이거 맛있다! "

 

" ... 처음 먹어봐? "

 

" 응. 처음 먹는 건데 맛있네? "

 

" 에스텔, 이거 지난달에 먹었던 거야. "

 

" ... 어? "

 

 

 

 

 

에스텔은 자신이 쓰고 있던 수첩을 주머니 안으로 넣으며 식탁에 앉았다. 

 

에스티니앙이 에스텔을 바라보며 어딘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상한 느낌이 들어 처음 먹어보냐 물어보자, 에스텔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답했다. 

 

하지만 지금 먹고 있는 음식은 저번 달에 두 사람이 먹었던 피피라찜이었다. 

 

에스티니앙의 말에 에스텔이 젓가락질을 멈추고서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보았다. 지금의 상황이 숨기고 싶었으나, 그의 앞에선 숨길 수 없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에스텔이 조금 소심해진 젓가락질로 피피라찜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에스티니앙은 그녀의 묘한 모습에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그저 보기만 할 뿐이었다. 에스텔이 에스티니앙의 시선을 난감하다는 듯 피하면서 식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