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 차일드 타입

[HL/드림/240923] 감정의 힘이라는 건

나비의 보관함 2025. 2. 13. 15:20


에스텔이 에스티니앙에게 자신의 기억이 점점 지워지고 있다는 것과 그걸 잊지 않기 위해 수첩에 기록하고 있던 걸 들켰던 날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정확하게는 에스텔이 완전히 기억을 잃기 전, 에스티니앙이 에스텔을 개인적으로 불렀다.

 

거의 매일을 함께 다니는 두 사람이었지만 가끔 따로 지낼 때도 있었다. 그날은 에스티니앙이 개인 임무로 인해 검은 장막 숲에 갔다가 돌아오는 날이었고, 모그리를 통해 에스텔에게 라벤더 숲으로 나와 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에스텔은 자신에게 날아온 서신을 기억하기 위해 조금 일찍 라벤더 숲으로 향했다.

 

 

 

 

 

" 오랜만에 화관이나 만들어볼까? "

 

 

 

 

 

오랜만이라고 하기엔 비교적 최근에 한 번 오긴 했으나, 그녀의 입장상 지워진 기억이기에 오래전이 맞았다.

 

자신이 최근에 다녀왔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린 에스텔이 라벤더 숲에 앉아 여러 가지 꽃으로 화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장식을 덧대며 만들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익숙한 목소리가 에스텔을 불렀다.

 

에스텔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며칠 만에 보는 에스티니앙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에스텔이 해맑게 웃어주며 자신이 만든 화관을 에스티니앙에게 주었다. 그러자 에스티니앙이 고개를 숙여 머리를 내밀었다.

 

그게 어떤 뜻인지 알고 있던 에스텔은 에스티니앙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주었다.

 

 

 

 

 

" 에스티니앙, 오랜만이네? "

 

" ... 에스텔. 우리 그저께도 봤잖아. "

 

" 그... 그래도 오랜만이지! "

 

" ... "

 

" 왜 부른 거야? "

 

 

 

 

 

에스텔은 에스티니앙에게 해맑은 미소로 오랜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오랜만이 아닌 그저께도 봤다는 답이었다. 뻘쭘해진 에스텔이 머쓱하게 웃으며 에스티니앙을 보았다. 그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준 뒤 어색하게 웃었다.

 

에스텔이 말을 돌리기 위해 왜 불렀냐고 물어보았다.

 

에스티니앙은 그녀가 말을 돌리기 위한 걸 알고 있었지만, 굳이 더 물어보지 않았다. 가볍게 웃다가 다시 표정을 돌리며 에스텔을 보았다. 그는 점점 잊혀져 가는 그녀의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하게 남고 싶었다. 

 

그래서 저번에 못다한 고백을 하기로 했다.

 

 

 

 

 

" 에스텔, 이건 내 진심이야. "

 

" 응...? 언제는 진심이 아닌 적 있었어? "

 

" 언제나 진심이었지. 지금도 마찬가지고. "

 

" 그런데... "

 

" 좋아해, 에스텔. "

 

" 어...? "

 

 

 

 

 

평소에도 진지했지만, 지금은 또 사뭇 다른 느낌으로 진지해보이는 에스티니앙이 설명을 이어갔다.

 

에스텔이 다시 물어보려고 하던 때, 그가 갑작스럽게 고백을 해왔다. 에스티니앙의 입장에서는 다짐을 하고 결정을 해서 고백을 하기 위해 준비라도 했지만, 에스텔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에스티니앙의 고백에 에스텔의 시선이 옅게 떨려왔다.

 

에스텔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면서 변하는 모습에 에스티니앙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어릴 적 그녀를 구해준 은인이었고, 소꿉친구이면서 가족처럼 지내온 자신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고백을 거절할 것이라는 것을.

 

 

 

 

 

" 그, 미안해... 에스티니앙... "

 

" ... "

 

" 네가 싫은 건 아니야. 그냥... 너도 알다시피 요즘 내 기억이 너무 빠르게 사라지잖아. 난, 나는... 그게 너무 불안해. 내가 완전히 기억을 잃어버리면 혼자 남겨지는 건 너인데... 내가 어떻게 그래. "

 

" 에스텔, 나는 괜찮다. 네게 강요를 하려고 고백한 건 아니었으니. "

 

" 내 마음을 알아줘서 고마워. "

 

 

 

 

 

에스텔은 자신이 고백을 거절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적어도 에스티니앙이 자신을 오해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었다. 냉정하면서도 다정한 그가 다행히도 이해해 주었다. 에스텔은 옅은 미소를 보이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날 이후, 에스텔이 예상했던 대로 그녀의 기억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결국에는 완전히 기억이 사라지면서 에스티니앙이 알고 있던 에스텔이 완전히 먹히고 말았다. 에스티니앙에게 있어 기억을 잃기 전의 에스텔과 잃은 후의 에스텔은 같으면서도 엄연히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여전해서, 그는 또다시 에스텔에게 빠지고 말았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이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었다. 최근 에스티니앙은 결국 자신이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고 인정해야 하는 건가, 하는 고민에 휩싸였다.

 

 

 

 

 

" 에스티니앙, 무슨 일 있어? "

 

" 음... 아니, 없어. "

 

 

 

 

 

그나마 비교적 최근에는 수첩으로 인해 기억을 되짚어가기 시작한 에스텔이 예전과 비슷해졌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에스텔과는 달리 확실히 유한 부분이 있었다.

 

에스티니앙은 자신에게 다가와 친숙하게 말을 걸어오는 에스텔을 보았다. 

 

한참을 입맛만 다시던 그는 결심한 듯 에스텔의 손을 붙잡고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에스텔은 평소와 달리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유들해진 에스티니앙의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 에스텔. "

 

" 응, 나 여기 있어. 에스티니앙. "

 

" ... 좋아해, 내가 너를. "

 

" ... 그거... 기억을 잃기 전의 나에게 하는 고백이야? "

 

" 아니, 지금의 너에게 하는 고백이야. "

 

" ... 나도, 나도 좋아해. 에스티니앙. "

 

 

 

 

 

이전의 고백과는 확실히 다른 반응이었다. 

 

기억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는 게 불안해서, 혼자 남겨질 누군가가 불쌍해서. 그런 이유로 거절하던 그녀의 입에서 가장 듣고 싶었던 고백이 들려왔다. 

 

에스티니앙의 표정이 순간이었지만, 짧게 일그러졌다가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에스텔의 손을 붙잡은 채 그녀를 끌어안았다. 결국 에스티니앙의 고개가 푹 숙여지면서 그의 눈가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에스텔의 입에서 들려왔지만, 그가 듣고 싶었던 이가 아니었다.

 

같으면서도 다른 사람이었다. 

 

에스텔은 에스티니앙의 행동에 조용히 끌어안아 주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이 에스티니앙의 슬픔을 더하고, 행복을 더해주었다. 그렇게 에스티니앙은 한참이나 눈물을 삼켜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