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 차일드 타입

[HL/드림/240916] 무자각 짝사랑

나비의 보관함 2025. 2. 13. 00:01



방랑자는 멍하니 앉아있다가 자신에게로 다가온 사람을 보았다. 
상대는 최근 가깝게 지내기 시작한 상리요였다. 갈색에서 옅은 회색의 투톤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바람에 맞춰 흩날렸다. 졸린 건지 아니면 평소에도 멍한 건지. 방랑자의 반쯤 풀린 시선이 상리요를 보고 있었다. 
상리요는 방랑자의 곁에 앉으며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방랑자가 멍하니 있는 것에 상리요가 웃어준 다음 말을 걸어왔다. 
 
 
" 방랑자, 오늘 약속 있나요? "
" ... "
" 그러면 공원에서 산책이라도 같이 하는 건 어때요? "
" ... "
 
 
상리요는 방랑자에게 오늘 약속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방랑자는 잠에서 덜 깬 거였는지 짧은 하품과 함께 고개를 저어댔다. 방랑자의 답에 상리요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는 속으로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하고 나서야 겨우 입 밖으로 산책을 하자는 권유를 할 수 있었다.
방랑자의 시선이 힐끗, 상리요를 보다가 다시 멍하니 허공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상리요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방랑자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방랑자가 상리요의 손을 붙잡고서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두 사람은 공원에 도착해 걷기 시작했다.
 
 
" 방랑자, 음... "
" 응? "
 
 
상리요는 방랑자에게 말을 걸려다가 입을 잠시 다물었다. 
다시 물어오는 그녀의 말에도 상리요는 잠시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의 발걸음 속도를 천천히 줄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녀를 보고 있지 않으면 보고 싶고, 보고 있으면 닿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이게 무슨 기분인 건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라 어색하고 낯설기만 했다. 
아버지의 실종, 빛바랜 부응, 갇혀있는 난제. 그중에서 이 감정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 방랑자는 감정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
" 음... 일단은? "
" 그러면 안 보고 있을 땐 보고 싶어지고, 보고 있으면 닿고 싶은... 그걸 무슨 감정이라고 하나요? "
" 그건... 음... "
 
 
두 사람은 천천히 공원을 돌아다니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상리요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굴며 방랑자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힐끔 그녀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평소에도 좀처럼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방랑자였기에 아무리 상리요라도 방랑자의 표정을 알아볼 순 없었다. 지금 처음 하는 질문에도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눈꼬리 끝에 물든 붉은색을 보다가 고민을 하던 방랑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흠칫 놀란 상리요가 다급하게 몸을 뒤로 뺐고, 그걸 지켜보던 방랑자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잠깐 놀란 표정을 짓긴 했으나 옅게 웃어주며 입을 열었다.
 
 
" 왜 그렇게 놀라? "
" 어, 네?? 아무것도... 아무튼, 방랑자도 모르는 거죠? "
" 응...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 "
" 괜찮아요. "

 
재밌다는 듯 웃고 있는 방랑자의 미소에 상리요의 귀 끝이 붉어졌다. 
상리요가 고개를 돌리고서 잠시 뜨거워지는 얼굴을 식히기 위해 애썼다. 그는 자신이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알지 못했다. 이런 감정도 처음이었고, 간질거림도 처음이었으며 두근거림이나 이 열기조차도 처음이었다.
언제나 복잡한 난제로 인해 바쁘고 정신없거나, 전투로 인해 싸워야 하기에 흥분하거나.
그게 전부였다. 다른 사람을 볼 때면 이러지 않았다. 방랑자를 볼 때마다 이랬다. 심장 근처가 간질거리고 얼굴이 뜨거워졌으며 보고 싶으면서도 그 얼굴을 이전처럼 보고 있을 순 없었다. 
혼란스럽기만 한 이 감정의 이름을 알고 싶었다. 
 
 
" 방랑자, 오늘 이후에 일이 있어요? "
" 아니... 없는데. 오늘은 쉬는 날이라고 했어. "
" 그럼 제가 당신과 함께해도 될까요? "
" 상리요는 오늘 일 없어? "
" 응, 저도 없어요. "
 
 
상리요는 산책을 하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벤치에 앉으며 자신의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옆자리에 있는 먼지를 털고, 그 자리 위로 손수건을 올려두었다. 방랑자가 앉는 자리일 테니 이왕이면 깔끔한 게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친절과 다정함은 평소에 잘 나오지 않는 모습이지만, 오늘따라 방랑자 앞에서 더 잘 보였다.
 
' 이 감정의 정체를, 이름을 꼭 알아야 하는 걸까? 어째서인지... 알게 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 같은데. 
복잡한 논제처럼 이것도 복잡하다면... 이 감정이 뭇별을 쫓는 걸 방해하면 어쩌지? 어쩌면 방랑자와 관련된 거라면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하지만... 지식을 추구하는 자로서 본능을 거절할 수 있을까? '
 
상리요는 방랑자를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신의 감정이 과연 어디까지 다가올지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그렇기에 두렵기도 했다. 감정이라는 게 눈에 보이지 않으니 어디까지 뻗어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방랑자가 고민에 잠긴 상리요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 상리요는 역시 지식을 추구하나 봐. "
" 응? "
" 자신이 아닌 타인의 감정인데도 궁금해하는 거잖아? 지식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물어보진 않지. "
" 그것도 그런가요... "


방랑자는 조용히 읊조렸다.
시선만 상리요를 향한 채 자신이 했던 말의 이유를 말했다. 과연 지식을 탐구하는 자는 남다르다고.
그 말에 상리요가 어쩐지 씁쓸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그는 자신이 왜 그런 표정을 지은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괜히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진정해 보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방랑자의 말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졌다가 나빠지길 반복했다.
재차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녀가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 상리요? "
" 네? "
" 이제 슬슬 들어가자, 애들이 찾겠어. "
" 아, 네. "


상리요는 생각에 빠졌다가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돌아가자는 그 말에 상리요가 몸을 일으켰다. 방랑자까지 일어나자 그녀가 앉았던 손수건을 챙기며 다시 공원을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면서 아까와는 달리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상리요가 생각에 잠겨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렇게 나란히 걸으며 함께 하는 순간까지도 온전히 좋아서, 이렇게까지 좋아도 되는 걸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뭇별을 쫓는 것에 이 감정이 방해가 되진 않을까 고민되었다.


" 그러고 보니 상리요, 최근에 뭐 하고 다녀? "
" 응? 음... 뭇별을 쫓고 있죠. "
" 그래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했으면 좋겠어. 너는 좋은 친구인데, 다른 사람들도 그걸 알았으면 하거든. "
" 그래요... "


방랑자의 입에서 나온 '좋은 친구'라는 단어가 가슴을 쑤시고 들어왔다.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로 욱신거려오는 단어는 처음이었다. 아버지를 떠올릴 때도, 수많은 난제의 앞에서도 이렇게 격해진 적은 없었는데.
상리요의 시선이 방랑자에게로 향했다.
어느새 도착한 목적지에 그녀가 부드럽게 웃어주더니 나중에 보자며 떠나갔다. 상리요는 점점 멀어지는 방랑자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기만 했다. 바람에 흐트러지는 검은 머리카락과 아담한 체구.
바람이 강하게 불어오는 순간 방랑자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기분 좋게 바람을 맞이했다.


" 아. "


상리요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감정을 몰랐으나, 이 순간 미치도록 뛰어오는 마음을 앞으로도 외면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면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그런 감정을 깨달았다.
방랑자가 완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어도 상리요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그대로 있었다.
멍하니 그녀가 있었던 자리만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