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어릴 적의 기억을 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적어도 에스티니앙은 어릴 적부터의 기억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12살의 기억도, 16살일 때의 기억도. 지금의 기억도 전부. 그렇기에 상대가 기억을 하지 못하는 걸 깊게 이해하지 못했다.
에스티니앙의 입장에서 에스텔이 그러했다.
어릴 적, 자신과 했던 그 약속을 아직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에스텔이 조금 갑갑했다. 에스텔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약속이었던가. 떠올려보기 위해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라벤더 숲에서 했던 그 약속을.
" 있지, 에스티니앙. 우리 30살까지 서로 혼자면 어쩌지? "
" ... 글쎄. "
" 그때까지 서로 혼자면 우리 서로 사귈까? 아니다, 사귀자! "
" 그래, 그러지. "
지금의 모습보다 조금 더 앳되어 보이는 에스티니앙과 에스텔이 라벤더 숲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에스텔이 화관을 만들고 있었고, 에스티니앙은 그걸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여전히 표정 변화 없는 그의 얼굴이었지만, 에스텔의 말이 상당히 인상 깊었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난 이후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시장을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푸른색 리본이 주머니에서 나왔다. 에스티니앙은 아무 말 없이 에스텔의 앞으로 리본을 내밀었다. 에스텔은 화관을 만들다가 말고 눈앞의 리본에 눈을 크게 뜨고서 그를 보았다.
처음 받아보는 에스티니앙의 선물이 마음을 간지럽혀왔다.
" 이거... 나 주는 거야? "
" 응. "
" 나, 나 이거 머리에 묶어줘! "
" ... "
에스텔이 양쪽 뺨을 붉히고서 수줍게 웃어왔다.
해바라기 같은 그 미소에 에스티니앙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푸른색 리본으로 에스텔의 머리카락을 묶어주었다. 에스티니앙이 리본을 묶어주고 난 뒤에 에스텔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더니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에스텔의 미소를 지켜보던 에스티니앙은 사고 나서 줄지 말지 고민했던 게 바보 같았다고 생각했다.
수줍게 피어오른 붉은 뺨과 조용히 깜빡거리는 눈동자. 그날의 약속은 에스티니앙의 뇌리에 박힌 채 세월을 맞이했다. 에스티니앙이 20살이 되었을 때도, 25살이 되었을 때도 그 약속을 여전히 기억했다.
어릴 적 약속을 떠올린 에스티니앙은 천천히 눈을 떴다.
" ... 에스텔, 그때 기억 나나? "
" 응? 언제? "
" 내가 그 머리끈을 줬던 날. "
" 어? 이거? "
에스티니앙은 옆자리에 있는 에스텔을 보며 어릴 적의 약속을 꺼내보았다.
그녀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고, 자신만의 약속이 아닌 에스텔이 먼저 꺼낸 약속이었으니까.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무슨 말을 하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에스텔의 표정을 본 에스티니앙이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보며 다시 물어보았다.
의문을 가진 그의 물음에 에스텔이 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괜히 자신의 머리카락에 있던 머리끈을 만지작거리더니 에스티니앙을 보았다.
" 맞아, 이거 네가 준 거였지? "
" 그래. 그리고 그때같이 했던 약속은? "
" 무슨 약속? "
" 무슨 약속이냐니. "
무슨 약속이냐고 물어오는 에스텔의 말에 에스티니앙이 인상을 찡그렸다.
짧은 한숨을 쉬던 그는 에스텔에게 시선을 옮기며 진지한 표정으로 보았다. 에스텔은 에스티니앙이 말하는 약속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떠올려보려고 해도 그가 말하는 기억이 어떤 건지 떠오르지 않았다.
" ... 떠올릴 때까지 물어볼 거야? "
" 어. "
" 하지만 떠오르는 게 없는데... "
" 잘 기억해 봐. 어릴 때 라벤더 꽃밭에서 하던 약속이었으니까. "
" 라벤더 숲에서...? "
에스텔은 자신의 기억을 뒤적거리며 떠올리려고 했다.
겨우 기억을 뒤졌을 때, 라벤더 숲에서 화관을 만들고 있던 자신이 떠올랐다. 곁에 있던 에스티니앙, 그리고 그가 전해주는 푸른색의 머리끈. 거기까진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때 어떤 대화를 했는지까지 떠오르진 않았다.
" 그럼 어릴 때 개복치빵 먹었던 건 기억하나? "
" 어... 시장에서 말이지? "
" 그건 제대로 기억하네. "
" 그때 하나밖에 못 사서 네가 양보해 줬잖아. "
" ... 그런데 라벤더 숲은? "
" 으음... "
에스티니앙은 그녀의 기억을 어떻게 해서든 떠올리게 하기 위해서 추억 중 하나를 꺼냈다.
약속을 하기 전날, 두 사람이 시장에 갔을 때 먹었던 개복치빵을 말하자 에스텔이 곧장 답했다. 그 시장에서 에스티니앙이 푸른색의 끈을 샀던 걸 떠올렸다.
그녀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아낸 뒤 라벤더 숲에 다시 말했다.
그러자 에스텔이 앓는 소리를 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도저히 기억을 되짚어보아도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에스텔의 이마에 깊게 파인 미간이 그걸 알려주었다.
" ... 우리가 시장에 갔던 그다음 날, 라벤더 숲에 갔었지. "
" 아, 그래! 맞아. 그때 라벤더 숲에 가서 화관 만들었지. "
" 그때 내가 그 머리끈을 선물로 줬고. "
" 맞아, 그랬지! 에스티니앙은 그걸 다 기억하는 거야? "
" ... 그걸 줬을 때 했던 말이 안 떠오르는 건가? "
" 으음... 응, 미안... 아무래도 도저히... "
에스티니앙은 에스텔에게 차분한 설명을 이어갔다.
그러자 그에 호응하듯 에스텔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왔다. 그녀는 화관을 만들어서 에스티니앙의 머리에 씌워주던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다 머리끈을 선물로 줬다는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다 그 모든 걸 기억하고 있는 에스티니앙의 모습에 에스텔이 놀란 듯한 말투로 말을 걸어왔다. 그러자 에스티니앙은 그녀의 말에 제대로 답을 해주지 않았다.
대신 말을 돌리기 위해 다른 말을 꺼냈다.
에스티니앙의 말에 에스텔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난감한 듯한 기색을 보였다.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더니 손가락에 꼬아냈다. 그녀의 반응에 에스티니앙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 ... 그럼 라벤더 숲 뒤로 큰뿔산양 스테이크를 먹은 건? "
" 음~ 그때 먹은 스테이크 맛있긴 했어. "
" 다른 건 다 기억하면서 그것만 기억을 못 한다고? "
" 으응... "
에스티니앙은 마지막이랍시고 에스텔에게 라벤더 숲 다음의 추억을 말했다.
그러자 에스텔은 바로 기억이 떠오른 모양인지 입맛을 다시며 그때 먹었던 스테이크를 생각했다. 그 모습에 에스티니앙이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스티니앙은 자신도 모르게 진심이 나와버려서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평소 자신이라면 다른 문제로는 이렇게까지 반응하지 않았을 테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언약의 약속을 잊었다는 건 상당히 큰 충격이었다. 자신에게만 중요했던 약속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스티니앙은 자신의 턱을 매만지더니 눈동자를 굴렸다.
" ... 정말로 기억이 안 난다고? "
" 응... 그때 선물 받은 건 기억나는데, 뭐라고 했는지는... "
" 하... 그래. "
에스티니앙은 자신의 큰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다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방을 나섰다. 그의 뒤로 에스텔이 계속 에스티니앙을 불렀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도 에스티니앙은 발걸음을 계속 옮겼다.
지금의 답답한 심정으로는 에스텔과 함께 있기란 버거운 문제였다.
에스텔은 에스티니앙이 저대로 나가버리는 모습에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 건가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는 그렇게 떠난 이후로 종일 돌아오지 않았다.
숙소에 홀로 남겨진 에스텔이 안절부절못하면서 돌아다니다가 결국 그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 에스티니앙, 얘는 어디로 간 거야? "
에스텔은 한참 돌아다니다가 노을이 지는 저녁이 되어서야 라벤더 숲에서 에스티니앙을 찾았다.
에스티니앙의 앞으로 다가간 에스텔은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붙잡으며 말을 걸어보았다. 혹시나 싶어 그를 찾으러 다니는 동안 계속해서 기억을 되짚어보았지만, 그리 쉽게 떠오르진 않았다.
" ... 에스티니앙! 내가 기억 못 해서 그래?! 대체 왜 그러는 건데! "
" 하... 네가 떠올려야 해. "
" 그냥 좀 알려주면 안 돼? "
" 내가 알려줘선 의미가 없지. "
에스텔은 돌아다니면서 쌓였던 감정을 앙칼진 목소리로 에스티니앙에게 따져들었다.
에스티니앙이 에스텔을 힐끗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에스텔에게 네가 떠올려야 한다던 그에게 그녀가 알려달라고 하자 자신이 알려줘봤자 의미 없다는 말만 했다.
두 사람은 하얀 달빛이 비치는 달밤, 라벤더 숲속에서 서로를 보기만 할 뿐이었다.
'줄리아 차일드 타입' 카테고리의 다른 글
[HL/드림/240915] 꿈 속에서도 (0) | 2025.02.13 |
---|---|
[HL/드림/240916] 무자각 짝사랑 (0) | 2025.02.13 |
[HL/드림/240912] 맥주는 에일이냐, 라거냐 그것이 문제로다 (0) | 2025.02.12 |
[BL/자컾/240908] 폭력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 (0) | 2025.02.12 |
[HL/드림/240907] 신하가렌 서사 (0) | 2025.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