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로즈 타입

[HL/드림/240412] 프로가 감정을 깨닫는 방법

나비의 보관함 2025. 2. 7. 04:25



 

에리는 대본을 보며 영화를 찍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액션배우였기에 거의 찢어진 옷을 입고 다친 분장을 하고서 연신 중얼거렸다. 대본을 읊조리고 있는 듯 했다. 

중얼거리며 눈앞에 있는 대본 속 대사들을 달달 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커다란 굉음과 함께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빛이 현장을 감쌌다. 순식간에 석화되어 돌이 되어버린 에리는 아슬아슬하게 끊어질 것 같은 의식 속에서도 눈앞에 있는 대본을 읽었다.

 

' 나는... 난, 프로야...! '

 

에리는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대본을 읊었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으며 대본을 읽고, 잠시라도 멈추는 순간 다가오는 일말의 죽음에 벗어나고자 겨우 정신을 붙잡았다.

그렇게 10년이 흐르고, 20년이 흘러 얼마나 많은 세월을 보냈는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 지 모를 아득한 시간 속에서 천년이 지났을 때도 에리는 여전히 프로 정신을 보이고 있었다.

50년이 지났을 때에는 손에 쥐여져 있던 대본은 사라지고 난 뒤였다.

100년이 지났을 땐 풍화 작용으로 인해 옷들이 조각조각 누더기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에리는 꿋꿋하게 이미 머릿속에 다 외워저린 대본을 계속 반복해서 외우고 있을 뿐이었다.

 

' 여기서 쓰러질 순 없지. '

 

에리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멋진 모습을 보였다.

옷조차 사라진 상황에서 프로라고 자각하고 있는 에리에게 그런 건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에리가 깨어난 건 수천년이 지나서였다.

정확하게는 츠카사가 자신의 제국을 위해 가장 먼저 깨웠던 아사기리의 조건에 의해서였다. 츠카사의 온전한 의지보다는 아사기리의 의견에 가까웠고, 그를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조건이었다.

츠카사는 가장 먼저 멘탈리스트인 아사기리를 깨웠었다.

 

 

" ...!! "

" 나는 이곳에 나의 제국을 세울 거다. "

" 좋아, 조건이 있어. 이 여자를 가장 먼저 깨워줬으면 좋겠어. "

" ... 그게 조건인가? "

" 그래. "

 

 

아사기리는 츠카사가 모아둔 석상의 산에서 에리를 발견했다.

거기에서 그는 츠카사에게 조건을 걸었다. 자신이 제국에 도움을 주는 대신 에리를 살려달라는 것이었다. 

아사기리는 자신이 터무니 없는 조건을 내건 건 아닌 지 잔뜩 긴장해 하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아사기리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츠카사 사이에서 석상이 된 에리는 여전히 머릿속으로 계속 대본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 좋다. 생명의 물이 모아지면 살려주도록 하지. "

" 이야~ 거래 성립이네. "

 

 

츠카사의 수락에 아사기리는 한숨을 내뱉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사기리의 꿋꿋한 의지 덕분인지 아니면 조건 탓인지 츠카사가 다음으로 선택한 게 에리였다. 아사기리는 하마터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안도하는 것도 잠시 며칠 사이에 모인 생명의 물로 에리를 깨우게 되었다.

에리가 깨어나고 쓰러지는 그녀를 아사기리가 받아주었다.

 

 

" 에리 쨩, 안녕. "

" ... 멘탈리스트...? "

 

 

아사기리는 특징적인 웃음을 지으며 에리를 반겨주었다. 

그는 이미 에리를 알고 있는 듯 했다.

아사기리의 인사에도 에리는 제대로 답을 주지 못했다. 마치 긴 시간의 잠을 깬 듯한 에리는 흐릿한 눈앞에 인상을 찡그리며 아사기리를 보았다.

에리는 이제까지의 상황을 아사기리에게 전부 전해들었다.

 

 

" 그러니까 지금... 몇 천년이... 지난 상태라고? "

" 그렇지~ "

" ... 내 영화는, 내 캐리어... "

" ... 어쩔 수 없네~ "

 

 

에리는 크게 좌절했지만,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결국 츠카사 제국에서 깨어난 뒤로 각자의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츠카사의 명령으로 인해 아사기리가 과학 왕국에 센쿠가 살아있는지 확인하러 나간 이후부터 이상하다는 걸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에리였다.

그녀가 가장 먼저 눈치 해버리고 말았다.

 

 

" ... 이건... "

 

 

늦은 시간이 아사기리가 돌아오면 에리가 자지않고 기다리는 게 일상이었다.

물론 과학의 발전이 궁금해졌던 에리도 몰래 그쪽을 찾아가기도 했었다. 차이가 있다면 에리는 순수한 호기심이었지만, 아사기리는 엄연히 배신이었다.

 

 

" ... "

" 어, 어라? 에리 쨩. 안 자고 뭐 하고 있는 거야? "

" 너. 츠카사의 명령은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 거지? "

" 지마데~ 걱정 마. "

 

 

에리가 안 자고 있으면 아사기리가 당황해 하면서 말을 돌리는 게 당연한 반응이 되어버렸다. 에리는 팔짱을 끼고서 인상을 찡그리고 아사기리를 보았다.

츠카사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냐는 물음에 아사기리가 능글맞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나고 나서 에리는 아사기리가 완전히 센쿠, 그러니까 과학 왕국에 넘어가게 되어버렸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심지어 츠카사 제국에서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이 에리였다.

하지만 에리는 츠카사에게 이 사실을 굳이 바로 알리지 않았다.

아사기리가 그러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도 있지만, 순전히 과학의 힘이 어디까지 발전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신을 가장 먼저 깨워준 사람이 아사기리라는 걸 알고 있기에 선택한 것이었다. 

최근 들어 자꾸 아사기리를 생각하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껴질 정도 였다.

 

 

" 이상하지... 저런 놈을 내가 왜..."

" 어라, 에리 쨩. 무슨 말 했어? "

" 아무것도 아니야. "

 

 

에리는 틈만 나면 아사기리의 얼굴을 보며 의문을 가졌다.

그러다 에리는 자신이 지금 아사기리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어떤건지 알아버리고 말았다. 그걸 깨닫자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녀는 양손으로 뜨거워진 자신의 뺨을 감쌌다.

귓가에 울릴 정도로 심장소리가 커지는 걸 느꼈다.

에리는 고개를 연신 저어대며 그럴 리가 없다고,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동정이고, 연민일 뿐이라고. 절대 사랑이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했다.

너무 강하게 부정한 탓인지 어느새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있었다. 

에리는 자기 자신도 왜 이러는 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같은 일본이었지만, 이제는 인류가 멸망 위기에 놓여 자신이 알던 일본은 없었다. 그런 낯선 곳에서 그나마 의지가 되는 건 망하기 전부터 알고 있던 아사기리 뿐이었다.

처음에는 그 감정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라? 에리 쨩, 우는 거야? 울어? "

" ... "

" 에리 쨩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네~ "

"시끄러워. "

 

 

에리가 훌쩍거리고 있는데, 아사기리가 옆으로 오더니 의외라는 듯 놀리는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 놀리는 모습에 에리는 고였던 눈물이 쏙 들어가버린 느낌이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그대로 아사기리를 한대 쳐버렸다. 그러고 나서 속으로 생각했다.

 

' 그러면 그렇지. 내가 저런 놈을 좋아할 리 없어. '

 

놀리기나 하는 저런 놈이 뭐가 좋다고. 

에리는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에리의 주먹을 맞은 아사기리가 주저앉은 채 맞은 뺨을 문지르며 가만히 에리가 떠나는 걸 보았다. 

눈치가 빠른 편에 속했던 아사기리는 이미 에리의 감정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 에리 쨩, 안미~..."

 

 

아사기리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나 어디론가 향했다.

그 일이 있고 난 이후로 어느 날, 에리가 용기를 내서 아사기리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의 용건은 간단했다. 멈출 줄 모르고 아예 센쿠의 곁에 붙어서 움직이는 아사기리의 행동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그의 배신을 알아차린 츠카사가 어떻게 나올지는 미지수였다.

츠카사가 아사기리를 내치면 자신은 그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 겐, 우리를 구해준 츠카사를 배신하지 마. "

" 이건 배신이 아니야, 에리 쨩. "

 

 

에리는 자신이 말을 내뱉으면서도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자신은 홀로 몇 번이나 과학 왕국을 찾아가 센쿠와 안면을 트고, 마을 사람들의 발전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순수한 호기심이었지, 절대 배신은 아니었다.

호무라와 함께 감시를 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과학 왕국에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쪽에 전쟁이 일어나는 일을 바라진 않았다. 에리는 입술을 짓이겨 물며 간절한 눈길로 아사기리를 보았다. 

아사기리가 어딘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 안미, 에리 쨩... "

" ... "

" 나는 앞으로 발전하는 과학에 힘을 실어주고 싶어. "

" 하... 사실 콜라 때문이잖아. "

" 에, 에이~ 설마 내가 그런 걸로 넘어갈까? "

" 맞는 것 같은데? "

 

 

그 중얼거림이 워낙 작긴 했지만, 에리는 전부 들었다.

그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것을. 그렇기에 에리는 더이상 그에게 이 부분에 관해서 말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말린다고 해서 말려질 것 같지 않았다. 

에리는 점점 장난스럽게 풀려가는 대화 속에서 아사기리가 센쿠 쪽으로 붙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걸 어떻게 말려야 하나, 어떻게 마음을 바꾸지? 이런 생각은 이제 하지 않아야 할 정도였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가 보니 어느새 츠카사 제국과 과학 왕국의 대결은 시작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츠카사 제국이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리리안의 노래부터 시작해서 통신 장비의 등장은 어마무시했다.

과학 왕국에서 이루어낸 증거들을 보며 에리는 아사기리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츠카사와 센쿠가 싸우고 있을 때, 에리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었다.

 

 

" 바로 지금! 과학 왕국은 다이너마이트를 완성시켰어~ 그 위력은 대략 100억 메가톤줄!! "

 

 

에리의 눈에는 아사기리가 저 정도로 신나하면서 열심히 센쿠와 함께 같은 팀이 되어 즐거워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저런 모습을 처음 보다 보니 말릴 생각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센쿠의 도움으로 츠카사의 동생인 미라이를 살리게 되었고, 그로 인해 정전을 맞이하는 듯 했다.

갑작스러운 효가의 배신으로 인해 그의 창이 츠카사를 찌르는 순간 에리는 자신도 모르게 아사기리를 향해 달려갔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호무라를 막은 뒤 사람들을 부활시킬 때 에리가 아사기리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사기리는 만화가를 깨우고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세계의 엔터테인먼트. 재밌는 걸 전부 부활시켜서, 모두에게 보여주겠다고 말야. "

" 겐... "

 

 

에리는 그가 말하는 세계의 엔터테인먼트를 부활시켜서 모두에게 보여주겠다고 말하는 것에 크게 감명 받았다. 

무엇보다 멸망하기 전의 자신의 직업이 액션 배우였기에. 깨어난 이후로 살아가기 급급해 자신의 프로 정신을 깊숙한 어딘가에 묻었어야만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언젠가 다시 되찾을 엔터테인먼트들 중 배우라는 직업을 다시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생겨났다. 

에리는 비틀거리며 자신의 심장께를 붙잡았다. 

미치도록 두근거려오는 고동음이 이젠 그만 인정하라고 보채는 것 같았다. 에리는 울상인 것처럼 인상을 구기며 결국 자신의 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