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하는 두 사람이었다.
민희와 혜민은 코로나로 인해 대면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할 수가 없어서 대부분 집안에서 영화를 보거나 식사를 하는 데이트를 주로 했었다.
혜민과 민희는 데이트를 끝내고 나면 항상 실내 댄스룸을 대관해 몸도 풀겸 안무 연습을 하기도 했었다. 두 사람 다 취미삼아 댄스를 하는 동아리에서 만나 인연이 되어 사귀게 되었다. 노래 한 곡이 끝나자마자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중간에 쉬지 못하고 연달아 연습을 한 탓이었다.
혜민의 경우 숨이 부족해서 호흡기까지 끼고 있어야 했다. 민희는 솔로 파트를 진행하다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근육 테이핑까지 해야 할 판이었다.
일반인에 불과했던 두 사람이었기에 전문적으로 지도를 받는 게 아니었다. 그 탓인지 잦은 부상과 폐활량이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민희는 목이 탔는지 물을 미친 듯이 마셔댔다.
소나기가 쏟아지는 듯 땀이 주륵 흘러내리는 걸 닦아냈다. 민희는 자신의 입안에 짠맛이 느껴지자 혀를 내밀고 부르르 털어냈다.
" 언니, 우리 이제 마지막 한 번만 더 할까요? "
" 후우... 그럴까? 이젠 더 출 체력도 없어. "
" 이번이 마지막인가요? "
민희가 물병의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물병을 내려놓자 혜민이 답해주었다. 혜민은 간이 인공호흡기를 내려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더 했다간 정말 응급실이라도 실려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연습실 문이 열리고 아까까지 같이 연습했던 신비가 들어왔다.
세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이 노래가 시작되자 각자의 파트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연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친 탓인지 차량 안에서 혜민이 민희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다.
민희는 자신도 힘들었지만, 혜민의 모습을 보며 그녀를 걱정하기만 했다.
왜냐하면 연습 도중에 유일하게 혜민만 호흡기를 썼기 때문이었다. 댄스 동아리에서 다른 사람들은 가벼운 부상에서 끝났지만, 혜민은 그게 아니었다. 부상이야 당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가장 큰 호흡이 부족한 탓이었다.
다치지 않았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숨이 부족하면 목숨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걱정은 민희만 하는 걱정이 아니었다. 동아리 인원은 물론이고 총괄과 가끔 도와주러 오는 사람들까지도 하는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혜민이 노력을 하지 않느냐 물어온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혜민은 자신의 문제를 알고 있었고, 폐활량을 꾸준히 늘려왔다.
" 걱정이네... "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할 정도로 연습만 시작하면 혜민은 숨이 벅차올랐다.
요즘 가끔 나가는 유투브 방송에서 한 곡정도 뛰고 오는 건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자신들의 곡으로 계속 도는 연습이 문제였다.
민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신비가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두 사람의 집에 신비는 힐끗 눈길을 주었다. 민희가 잠든 혜민을 챙겨 일어나려고 할 때 신비가 백미러를 보며 말했다.
민희와 신비의 시선이 백미러를 통해 맞닿았다.
" 두 분 같이 산다고 했던가요? "
" 음... 그렇죠. 혜민 언니 깨우도록 할게요. "
" 천천히 하세요. 많이 피곤했던 모양인데... "
민희는 신비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혜민을 보았다.
그러곤 살짝 웃어주면서 혜민을 깨우겠다고 말했다. 민희의 말에 신비는 고개를 끄덕이고 백미러를 통해 보던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과는 댄스 동아리로 알게 되었다.
다시 힐끔 백미러를 통해 보았을 땐 민희의 다정한 손길이 혜민의 머리카락과 뺨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민희는 다정하게 혜민의 이름을 속삭이며 그녀를 깨웠다.
지금은 호흡도 안정적이었고, 표정은 제일 평온해 보였다. 민희는 혜민이 깨어날 때까지 그녀의 얼굴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자신의 시선을 느끼는 건지 혜민의 눈썹이 꿈틀거리고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 풋... "
" 으음... "
그때 혜민이 완전히 깨어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민희는 그런 혜민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누가 언니 아니랄까 봐서 일어나자마자 주변을 살피는 모습에 그저 옅은 웃음만 나왔다. 그 모습을 보던 민희가 다정하게 말했다.
" 이미 집에 도착했어요, 언니. "
" 으응? "
" 신비 씨도 기다리고 있고요. "
" 어? 미, 미안... 많이 피곤했나 봐. "
" 아~ 누구 씨가 어깨에 기대어 잠드는 바람에 계속 기다리긴 했죠~! "
" 앗... 미안해, 괜찮아? "
" 괜찮아요. 장난이예요, 언니. "
집에 도착했다는 말에 혜민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많이 피곤하다는 말을 하니 지켜보고 있던 민희가 장난기 다분한 말투로 말했다. 그 말을 진지하게 들었던 혜민은 미안하다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민희가 웃으며 괜찮다고, 장난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 오늘 많이 수고했어요, 언니. "
" 응, 너도 수고했어. "
민희는 장난을 치다가도 조금 지쳐 보이는 혜민의 모습에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혜민의 표정에서 걱정스러움이 사라지고 웃음이 피어올랐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집에 사이좋게 들어갔다. 들어오자마자 누우려고 하는 민희와 그 곁에서 말리는 혜민이었다.
혜민은 민희의 팔을 붙잡고 일으키려고 하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 오늘 연습 때문에 땀도 엄청나게 흘렸는데, 씻고 자야지...! "
" 아~... 귀찮은데... "
민희는 귀찮다고 말하면서도 혜민의 손길에 따라 몸을 일으켰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일어나더니 욕실로 씻으러 들어갔다. 민희가 씻고 있는 동안 혜민은 화장을 가볍게 지우기 시작했다. 토너와 리무버로 깔끔하게 지우고 나서 거울 속 자신을 보았다.
평소보다 더 수척해 보이는 모습에 그저 허탈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조용히 자신의 뺨을 매만지고 있을 때, 다 씻은 민희가 욕실에서 나왔다. 그 소리에 흠칫 떨던 혜민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민희를 지나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혜민도 샤워를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씻고 나서 익숙하다는 듯이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 우리 내일은 일정 없지? "
" 응, 언니. "
" 오랜만에 푹 자겠다. 그렇지? "
" 엄청나게 잘 거예요. 밥 먹고 나서도 자야죠. "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서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혜민은 민희와 대화하는 게 기분 좋다고 생각했다. 민희의 품속이 따뜻해서 대화하는 중간중간 졸음이 몰려왔다. 느릿하게 눈을 껌뻑거리고 있으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민희가 눈가를 문질러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 언니, 졸리면 버티지 말고 자요. "
" 으응... "
" 내일 진짜 일정 없으니까 푹 쉬어도 돼요. "
" ...민희도 자자. "
민희의 말에 혜민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민희가 혜민과 시선이 마주치자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그 다정한 미소에 혜민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혜민은 멍하니 졸음이 온 탓에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할 뿐이었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자신의 여자 친구라는 것도 놀라웠다. 평소에는 웰시코기 같은 느낌이 들면서 이럴 때는 또 위로가 되어주고 의지가 되는 게 좋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혜민이 잠들었다.
혜민이 잠드는 걸 보고 나서야 민희도 잠이 들 수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이 밝아왔다.
혜민이 무거운 눈꺼풀을 느릿하게 떴다. 익숙한 천장이 가장 먼저 보이고, 고개를 돌려 옆을 확인했다. 항상 있어야 할 민희가 보이지 않았다. 혜민은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민희를 찾았다.
' 이상하네, 오늘은 일정이 없다고 했는데... '
민희가 곁에 없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혜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가 혜민이 심하게 휘청거렸다.
" 어...? "
혜민은 그제야 자신의 몸이 생각보다 상태가 좋지 못하고, 아프다는 걸 깨달았다.
순간 너무 급하게 일어나서 기립성 빈혈, 그런 건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머리가 띵하고 어지러운 게 사라지지 않았다. 거기다가 몸은 뜨거운데 묘하게 추운 느낌까지 들었다.
자신의 몸 상태를 이상하게 생각한 혜민이 발걸음을 옮겼다.
약이라도 챙겨와 자기 전에 먹어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부엌까지 나왔던 혜민이 비틀거리다가 결국 그대로 쓰러졌다. 혜민이 눈을 완전히 감아버리기 전에 흐릿한 시야 사이로 한 사람이 보였다.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혜민은 눈을 감으면서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 은, 비야... "
하지만 정작 쓰러진 혜민을 발견한 사람은 민희가 아닌 신비였다.
신비는 급하게 병원 응급실로 혜민을 데려갔고, 의사가 내려준 진단은 영양실조와 몸살감기였다. 그녀의 병명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애초에 신비가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이었다.
" 여기 ○○병원 응급실인데, 혜민 언니가 치료받아야 할 것 같은데 올래? "
[ 뭐? 어쩌다가?! ]
" 부엌에서 쓰러지시던데. "
신비가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민희였다.
불변의 법칙처럼 신비가 자연스럽게 민희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응급실에서 잠시 눈을 뜬 혜민이 옆자리에 있는 누군가를 보며 민희의 이름을 불렀다.
" 민희야... "
손가락 하나 까딱거릴 힘조차 없어서 겨우 이름만 부를 수 있었던 거였다.
곁에 있던 사람은 조심스럽게 혜민의 손을 붙잡아 주었다. 하지만 혜민의 곁에 있던 건 민희가 아니었다.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신비였다. 신비가 혜민의 손을 잡아주며 다정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평소에 톰과 제리 조합이라고 불릴 정도로 신비가 혜민을 괴롭히는 걸 좋아하던 사람이었는데, 이렇게까지 혜민을 챙기고 있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혜민은 지금 상당히 아픈 상태였기에 민희와 신비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흐릿한 눈으로 상대를 보다가 자신의 몸에 넘치는 열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다시 잠들었다. 그러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잠들었다가 눈을 뜨니 민희가 눈앞에 있었다.
이제는 뚜렷한 시선으로 민희를 볼 수 있었다.
" 민희야, 계속 같이 있어 줘서 고마워. "
" 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전 아까 왔어요, 언니. "
" 어...? 그러면 아까까지 같이 있었던 사람은... "
" 응? "
혜민의 말에 민희가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며 되물었다.
아까 왔다는 그 말에 혜민이 덜컥거리며 고장 난 듯 몸을 굳혔다. 아까 느꼈던 다정한 손길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혜민의 중얼거림을 들은 민희가 물어보았지만, 혜민은 생각에 잠겨 답을 해주지 못했다.
혜민의 머릿속에는 온통 아까 느꼈던 다정한 손길뿐이었다.
등골이 서늘하게 변할 정도로 무섭고 기괴했다. 혜민은 계속 생각하다 보니 무서웠던 모양인지 자신의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이 잠결에 보았던 그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픈 자신을 다정한 손길로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던 손길은 아직까지 느껴질 정도로 선명했다.
그 손길의 주인이 민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혜민이 이상한 괴리감을 느꼈다.
" 아... "
" 굳이 떠올릴 필요 없어요, 언니. "
" 민희야... "
" 괜찮아요. "
무섭고 기괴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기심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혜민은 팔짱까지 끼면서 자신의 기억을 뒤져보기 위해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기억하려고 애를 써보아도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때는 열이 가득했을 때라 제대로 된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혜민이 끙끙거리며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고 있으니, 곁에 있던 민희가 말을 꺼냈다.
민희는 혜민이 말한 사람이 누군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미 누군지 알고 있는듯한 말투였다. 민희의 말투에 혜민은 굳이 더 물어보지 않았다.
그 대신 고개만 끄덕이며 답을 할 뿐이었다.
" ... 이거만 맞고 나면 갈 수 있다니까 얌전히 누워 있어요, 언니. "
" 응. "
다행히도 혜민은 영양실조가 걸려있긴 했지만, 몸살감기가 컸기에 영양제 링거만 맞고 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링거를 다 맞고 나서 혜민은 환자복에서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민희가 곁에서 함께 손을 잡으며 아직도 걱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혜민을 보았다.
그렇다 보니 민희는 속에 담겨 있던 진심 반, 장난 반 삼아 말을 꺼냈다.
" 나 며칠 정도만 휴가 내도 되냐고 말해볼까요? "
" 우리 충분히 쉬었잖아. 이렇게 계속 쉬었다 간 상부에서 뭐라고 할 수도 있어. "
" ... 그건... 맞는 말이네요. "
휴가를 내도 되냐는 말에 돌아온 건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민희는 혜민의 말에 전혀 반박을 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잠깐이라도 쉰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뭐라고 하는 건 아니었다. 진지하게 걱정하며 기다려주는 사람도 있지만, 그 반대로 불만을 가지고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민희에게 있어 물론 일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연인이었다.
연인인 혜민도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혜민은 그걸 몰라주는 게 조금 서운했다. 민희와 혜민은 링거를 다 맞고 나서 퇴원 처리까지 하면서 3일 치 약을 타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니까 혜민이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민희가 제일 먼저 알아차렸다. 그 이유는 평소보다 뺨이 붉고 숨이 조금 가빠진 걸 바로 알아차린 것이었다. 민희는 가장 먼저 방으로 들어가 체온계를 가져왔다.
혜민을 소파에 앉혀놓고서 체온을 쟀다.
" ... 언니, 열 높은데 방에 들어가서 쉬어요. "
" 응? 몇 도길래...? "
" 38.4도요. "
" 아... "
혜민의 겨드랑이 아래에서 나온 체온계에는 38.4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민희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혜민을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곧바로 혜민을 침대에 눕힌 뒤 이불을 덮어주었다. 자꾸 일어나려고 하는 혜민을 앉히다가 결국 눕혔다.
민희는 혜민에게 잠시 누워있으라고 말하더니 그대로 방을 나갔다.
" 언니, 잠시만 누워있어요. "
" 어...? "
혜민은 민희가 사라지자 당황스러웠다.
밖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민희가 들어와서 혜민의 이마에 손수 만든 아이스팩을 올려주었다. 여전히 다정한 미소와 말투였다.
" 얼음주머니라도 하고 있으면 조금이나마 열이 내려갈 거예요. "
" 으응... "
그 다정한 말에 고집이 녹아내린 건지, 혜민은 버티려고 했지만 결국 약을 먹고 민희의 말대로 누웠다.
그러다 버티지 못하고 약에 의해 잠들었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가도 금방 벗어났다. 약 효과가 끝나면 새어 나오는 기침 소리 때문에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잠에서 깨어난 혜민이 굳게 닫힌 방 너머로 들려오는 시끌시끌한 말소리에 움찔거렸다.
혜민이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앉는 순간 이마에서 아직 촉촉함이 느껴지는 수건이 툭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혜민은 고개를 숙여 떨어진 수건을 보았다.
그걸 보며 민희가 자신을 신경 쓰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 사이 아까보다 더 시끄럽게 떠드는 닫힌 문 너머의 말소리에 인상을 찡그렸다.
" 하... "
자세히 들어봐도 목소리의 주인을 좀처럼 가늠하기 힘들었다.
왁자지껄한 소리에 혜민은 아까 자신을 쓰다듬어주던 사람이 민희가 아니라는 걸 다시 떠올렸다. 민희는 생각하지 말라고 했지만, 자꾸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누구인지를 알고 싶은 호기심이 자극되어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생각이 점점 깊어지다 보니 엉뚱한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아파서 그런 거라는 생각도 못 할 정도였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자신을 두고 멀어지는 것만 같아서, 자신만 홀로 남겨진 것 같아서.
그 괴리감을 견디기 힘들어서 서러워졌다.
" 후윽... 흡... "
훌쩍거리며 눈물을 참으려고 하는데도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혜민은 자신이 왜 이러는 건지, 이해도 제대로 못 한 태 울음부터 참으려고 했다. 하지만 원인을 모르니 그게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도 계속 맺히고 흘러내렸다.
누구 하나 괜찮냐고 물어오는 사람이 없었고, 걱정해 주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아서 서러워지고 말았다.
계속 눈물을 닦아내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혜민은 그 웃음소리가 자신의 울음과 비교되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꾹 울음을 참으려고 하지만 쉽지 않았다.
한 번 터져버린 눈물은 쉴 새 없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 하아... 흑, 윽... "
혜민은 잔뜩 숨을 죽인 채 눈물을 흘렸다.
혜민이 멍하니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뒤늦게 민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민희는 방으로 들어오자 울고 있는 혜민을 발견했다. 혜민이 우는 모습을 처음 보는 탓에 놀란 민희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 언니, 왜 울고 있어요? "
" 흐윽... "
" ... 언니... "
하지만 민희의 물음에도 혜민은 그저 울기만 하고 있을 뿐이고, 답을 하진 않았다.
민희는 혜민에게 더 물어보는 것보다 곁에 앉아서 조용히 혜민을 안아주는 것으로 대처했다. 혜민은 어제처럼 여전히 따뜻하게 느껴지는 민희의 품속에서 괜히 더 서러워지는 걸 느꼈다.
품속으로 더 파고 들어가면서 훌쩍거렸다.
민희가 혜민을 다독여 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 언니가 항상 언니로서 노력하고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아플 때만큼은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걸 잠시 내려둬도 괜찮아. "
" 민희야... "
노력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는 사람이다.
노력하는 사람인 혜민에게 가장 필요한 게 인정해 주는 민희처럼. 민희의 말에 혜민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참고 있던 눈물이 결국 터지고 만 것이었다.
민희는 소리 죽여 울기 시작하는 혜민의 모습에 크게 당황했지만, 그걸 감추고 달래주었다.
민희가 열심히 달래주었기 때문인 건지 혜민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 사실 아까 닫힌 문 너머로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렸는데... 나 혼자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어. "
" ... 그랬어요? 아니에요. 제가 미쳤다고 언니 두고? 절대 혼자 안 만들어요. "
" 흑, 흐으... "
" 사실 비밀인데요. 내일 언니를 위해서 죽이라도 만들까하는 마음에 신비 씨랑 이야기 하고 있었어요. "
" 정말...? "
혜민은 아까 자신이 느꼈던 서러움과 괴리감을 민희에게 말했다.
조용히, 나긋나긋한 목소리였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와 손은 혜민이 정말 겁먹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모든 속을 다 털어놓은 혜민은 힐끗, 눈동자를 굴려 민희를 보았다.
민희는 용기 내 말해주는 혜민의 말에 다정한 손길로 머리를 쓸어주며 말했다.
그러곤 사실 비밀이라며 혜민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이기까지 했다. 아까 그들이 크게 웃었던 상황을 이야기 해주던 민희는 옅게 웃었다. 민희의 말에 훌쩍거리던 혜민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보았다.
정말이냐고 되물어보기까지 했다.
혜민의 물음에 민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정말이래도요. "
" 응... 민희야... "
민희의 다독임에 혜민은 진정된 탓인 건지 아니면 기력이 다 떨어진 건지 조금씩 감겨오는 눈을 참지 못하고 잠에 빠졌다.
민희는 혜민이 자는 모습을 지켜보며 눈가를 문질러 주었다. 얼마나 울었으면 눈가가 뻘겋게 짓눌릴 정도로 울었던 건지. 그걸 애인인 자신이 모르고 있었다는 게 더 화가 났다.
민희는 허리를 숙여 혜민의 눈가에 입을 맞춘 뒤 작게 속삭였다.
" 잘 자요, 언니. "
그리고 다음 날, 어느 정도 몸 상태가 돌아온 혜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어제 민희가 말했던 대로 부엌에 민희가 모여 무언가를 만드는 중이었다. 뒤에서 몰래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혜민은 쿡쿡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왜냐하면 민희가 죽을 만드는데, 싱크대에 물을 비우려다가 거의 다 쏟아내는 모습도 웃겼고, 가스레인지에 물을 켜야 하는데 화르륵 불타오르는 모습도 웃겼다.
혜민은 어제 자신이 느꼈던 괴리감은 괜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민희에게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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