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술집에서 퇴역 군인 카인과 홀든가의 망나니 막내 이글이 포트레너드의 주점에서 시비가 붙어 난장판이 벌어졌다. 그 자리에 끝까지 있었던 사람은 없었기에 두 사람의 싸움의 결과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오로지 카인과 이글, 당사자만이 알게 된 상태였다.
그날 밤, 카인과의 싸움으로 지친 이글이 뒷골목에서 뻗어버리고 말았다.
하필 카인이 때렸던 곳을 또 때리고 수류탄을 던져 큰 상처를 입은 건 이글이었다. 신체 강화를 받은 몸에 상처가 날 정도로 큰 위력이기도 했다. 그 수류탄 탓에 주변이 쑥대밭이 된 건 비밀이 아니었다.
이글은 뒷골목에 널브러진 채 무너져 내렸을 포트레너드의 주점을 떠올렸다.
" 푸흐흐... "
" 엄마, 저 형아, 이상해. "
" 쉿! 저런 건 안 보는 게 좋단다. "
" 저 형아, 어디 아파 보이는데? "
" 빨리 가자꾸나. "
이글은 수류탄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게 꽤 컸기에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지나가던 사람은 이글을 보고 술주정뱅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피해 가기에 바빴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누가 봐도 성인의 키보다 더 큰 검을 소지한 장신의 남자가 뒷골목에 쓰러진 채 술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거기다 정신을 놓은 듯 바람 새는 소리로 웃기까지 하니 쉽사리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였다.
어느 누가 당돌하게 저 사람을 건들 수 있겠는가.
오히려 자신들이 피해가 될까 싶은 걱정과 두려움에 그를 피하는 게 상책이라 생각했다.
이글이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그의 위로 작은 홀이 생기더니 한 여자가 툭, 떨어졌다.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서 이글의 위로 떨어진 것이었다.
이글은 여자가 상처 쪽으로 제대로 부딪혀 온 탓에 아파서 뒤늦게 여자를 확인했다.
" 윽... 대체 뭐야? "
" 으음... "
이글은 어디서 나타난 건지 알 수 없었기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나올만한 구석이 없었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상처를 제대로 건드려버린 여자는 자신의 몸 위에서 색색 숨을 쉬며 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이글은 자신의 품에서 잠들어 있는 여자를 보았다.
마치 홀리는 듯, 아니 말 그대로 이미 홀려버리고 난 뒤였다. 이상하게 여자가 자신의 품속에 있으니, 카인과의 싸움으로 인해 생겼던 상처들 위로 작은 빛이 반짝거리더니 서서히 낫기 시작했다.
몇 분도 되지 않아 상처는 깔끔하게 나았다. 상처 따위 원래 없었던 것처럼.
어릴 적부터 고된 훈련과 전투로 인해 생겼던 오랜 흉터는 치료되지 않았지만, 오늘 싸움으로 생겼던 상처는 완전히 치료되었다.
이글은 여자를 보며 좋은 것을 주웠다며 중얼거렸다.
" ... 좋은 걸 주워버렸네? "
" 으응... "
이글은 그대로 여자를 안아 들고 몸을 일으켰다.
상처가 치료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힘조차 없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넘쳐났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지하 연합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여인을 안고서 지하 연합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여자는 생각보다 가벼웠고, 새하얀 눈 같은 머리카락은 관리가 잘 되어있었던 건지 결 좋게 흐트러졌다. 모든 게 자신과 비슷해 보였지만 또 엄연히 다른 느낌을 주었다.
여자가 눈을 감고 있는 탓에 눈 색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피부는 하얗고 옷은 굉장히 가볍게 입고 있었다.
이글은 지하 연합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방으로 들어가 여자를 이불로 둘둘 싸매놨다. 혹여나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니까. 그만큼 여자의 옷차림은 가벼웠다. 고작 원피스 한 벌만 입고 있었으니까.
이글은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는 여자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 신기하네... "
자신보다 작은 키와 아담한 체구, 한눈에 호기심과 호감이 피어오르는 사람이라니, 이글의 흥미를 끌기엔 충분했다. 천천히 훑어보며 여자에 대해 탐구하다 다음 일정을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녀의 능력이 있으니 사이퍼인 게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합이든 어디든 능력자 등록을 해야 했고, 이글은 그게 지하 연합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신원 정보를 알아가야 할 것과 여러 가지 처리해야 할 조치가 많아서 정신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녀와 같은 '능력자'는 들어본 적 없었다.
순식간에 '치유'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하던 '한나'라는 여자는 마녀로 몰려 사망했었다. 만약 '한나' 이외에 있다고 한들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있을 리 없었다.
'치유' 능력은 매우 희귀하다 보니 사람들이 가만두지 않았으니까.
거기다 '한나'의 이야기는 1582년의 이야기였다. 벌써 200년이나 지난 이야기를 믿을 리 없기도 하지만, 눈앞의 여자로 인해 혹시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글은 자신이 현존하는 모든 능력자들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법적으로 등록된 능력자나 자신이 기억하기로도 여자 같은 능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 흠... 나머지는 내일 정하도록 할까. "
너무 늦은 시간인 탓에 당장 연합에 있는 사람들을 깨워 확인하긴 힘들 테니 내일 그녀가 깨어나면 가기로 정했다.
이글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의 하나뿐인 침대에 그녀를 눕혀놓고, 자신은 소파에 대충 몸을 뉘며 한숨 자기로 했다. 여자가 내일에는 눈을 뜰까? 그저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누워있는 이글의 시선이 여자에게로 향했다가 눈을 감았다.
.
.
.
해가 뜨고 몇 시간 뒤, 여자는 눈을 떴다.
그녀는 처음 보는 낯선 천장에 살짝 당황했다.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다. 구석에 자리한 누가 봐도 좁아 보이는 소파에 몸을 우겨놓고 자는 장발의 남자가 보였다.
그를 두고 주변을 다시 둘러보니 이 방의 주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저 남자의 방인 건지 생활감이 있어 보였다. 깔끔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지저분한 것이 묘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다 여자는 침대에서 내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몸이 갑갑하게 느껴져 당황했다.
자신의 몸을 살펴보니 이불로 돌돌 말려있는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이불을 풀어서 침대 밖으로 내려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이글이 깨어나려고 했다. 여자는 반사적으로 이글에게 다가가 토닥거려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서 빛이 나와 이글의 몸 위로 흩뿌려졌다. 그 빛을 받은 이글은 다시 깊게 잠들었다.
" 휴... "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고 다시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다행인 건지 이글은 깊게 잠들어 여자의 발걸음에도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생활감이 있어 보이는 방은 누가 봐도 소파에 구겨져 자는 이글의 방이었다.
여자는 여기가 어디지? 싶은 생각에 아무리 머리를 굴려 생각해도 마땅히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었다.
당장에 자신의 이름도, 나이도 그 무엇 하나 제대로 떠오르는 게 없었다.
' 아, 저 남자... 괜히 재운 걸까? '
해가 이미 중천이 되었을 때, 이글이 잠에서 깨어났다.
이글은 눈을 뜨자마자 당황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선명한 보라색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그 눈동자에 놀란 이글이 다급하게 일어나려고 하다가 우당탕거리면서 그대로 좁은 소파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마치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글은 그런 그녀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 보았다. 그가 의아했던 이유는 어릴 적부터 훈련을 받아온 자신이 타인을 앞에 두고서 깊게 잠들었다는 게 의문이었다.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여인의 곁에서 잠드니 그간 지독하게 자신을 괴롭혀 왔던 악몽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그래서 덕분에 엄청 오랜 달콤한 잠을 잘 수 있었다.
" 그... 괜찮나요? "
" 아, 어어... 괜찮은데 "
이글은 어릴 적 이후로 오랜만에 꾸는 달콤한 잠에 멍해졌다.
여자는 이글이 우당탕거리며 떨어지는 모습에 흠칫 놀랐지만, 자신이 재운 탓에 저러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어 더 미안해졌다. 이글은 여전히 바보 같은 표정으로 여자를 보며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 내가...?? 이렇게 무방비하게 잠들었다고? 타인 앞에서? 심지어 악몽도 없이? '
이글은 그저 자신이 잠들었다는 것에 제대로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여자가 이글의 눈치를 살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미, 미안해요... "
" 아. 아니, 괜찮아. 그런데 능력자인 게 맞아? "
" 네? "
" 이름은? "
" 아... "
" 나이는? 살던 곳은? "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글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그녀를 향해 질문을 쏟아부었다.
이글의 질문이 들릴 때마다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름이 뭐냐고 물어도 답이 없었고, 나이나 그 외 기타 정보를 물어도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았다.
이글은 여자가 기억을 잃은 것으로 판단하고 고민에 잠겼다.
" 좋아, 당신 이름은 이제부터 솔리아. 솔리아라고 부를게. "
" ... 좋아요. "
이글이 이름을 지어주자, 솔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글을 향해 살짝 웃어주었다.
이후 이글은 앞머리를 쓸어올린 뒤 머리를 깔끔하게 묶고 솔리아를 보며 말했다.
" 그러면 우선 지하 연합부터 가자. "
" ...? "
" 아, 능력자면 등록부터 해야 하거든. "
" 아... 그래요. "
" 나가기 전에 잠깐... 이거부터 입어. "
" 고마워요. "
이글은 솔리아에게 지하 연합에 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그의 말에 솔리아는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글의 뒤를 따라 나가려던 찰나, 이글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몸을 돌린 그는 솔리아를 보며 말했다.
벽에 걸려있던 외투를 그녀에게 주었다.
이글은 이대로 외출했다간 만인의 시선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의 외투를 하나 빌려주기로 했다. 솔리아는 커도 너무 큰 외투를 받아 입고서 이글의 뒤를 따라나섰다.
키가 큰 탓에 보폭이 큰 이글의 발걸음을 쫓아가기엔 키가 작고 보폭도 작은 솔리아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먼저 앞서가던 이글은 뒤에서 따라오는 소리가 점점 줄어들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 아, 내가 너무 빨리 걸었나? "
" 아니... 하아... 아니에요... "
" 이런... 조금 천천히 갈게. "
이글은 평소 자신에게 없을 줄 알았던 배려가 여기서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이상하게 그녀에게는 유하게 나왔다. 이글은 스스로가 그걸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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