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완과 블말은 율제병원에서 사내 비밀연애를 하고 있는 커플이다.
준완과 블말이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회진이 끝난 이후에 가진 휴식이라 그런지 너무 꿀 같은 시간이었다.
지친 두 사람이 소파에 있는 힘껏 몸에 힘을 빼고 늘어져선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누가 커플 아니랄까 봐서 두 사람은 동시에 늘어지고 같이 한숨을 내뱉었다. 블말은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소파에 뉘이니 그나마 살맛 나는 것 같았다.
걱정되었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 하... "
" ... 후... "
동시에 내뱉은 한숨이 신기할 법도 한데, 두 사람은 반응조차 없었다.
블말이 준완을 힐끗 보면서 말했다. 둘을 가장 힘들게 했던 수술을 받은 아이에 관한 이야기였다.
" 교수님, 채연이 괜찮겠죠? "
" 그건 나도 잘 모르지. 우리가 가장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 "
" 아... "
" 그 뒤는 이제 채연이가 얼마나 버텨주냐의 몫이지. "
" 음... "
블말이 하는 이야기에 준완은 냉철하게 답했다.
그녀는 준완을 보며 빈말로도 괜찮을 거라고 말하지 않는 모습에 그저 웃음이 나왔다. 괜스레 준완을 힐끗 보았다가 커피가 담겨져 있는 종이컵만 사부작 만지면서 뜸 들이길 반복했다. 그녀의 행동에서 할 말이 있다는 걸 바로 알아차린 준완이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블말을 보았다.
" 할 말이라도 있어? "
" 아, 그게... 혹시 제가 환승연애 나가자고 하면 나가 주실 건가요? "
" 그게 뭔데? "
" 아, 그건요. "
한참 뜸을 들이던 블말은 준완이 먼저 말을 걸어오자 움찔거렸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목덜미를 매만진 채 말을 이어갔다. 환승연애에 나가자고 권유하기 위한 밑밥을 던진 셈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준완은 담백한 표정으로 그게 뭐냐고 오히려 되물어보았다. 블말은 어쩌면 이게 기회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살짝 웃었다.
제대로 설명한 뒤에 함께 참여하자고 권유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준완에게 환승연애가 어떤 프로그램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 약간 예능 프로그램? 같은 건데 일반인들이 출연하는 거거든요. 음... 그런데 다른 건 연애에 지친 혹은 문제가 생긴 남녀들이 나오는 거라... "
" ... 응, 계속 이야기해. 듣고 있어. "
" 근데 마냥 그런 쪽은 아니고 X라는 존재한테... "
점점 길어지는 설명은 쉬는 시간이 끝이 맺을 때까지 끝나질 않았다.
처음에는 차분하게 잘 설명했지만, 뒤로 갈수록 횡설수설 되어버리는 탓에 원하는 만큼의 설명을 하지 못했다. 블말의 설명이 끝나자 가만히 커피를 마시며 듣고만 있던 준완은 살짝 굳어진 표정으로 앞만 보고 있었다.
그 표정에 블말은 천천히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 아, 이거 실패겠다. '
실패라고 생각한 블말은 포기하려고 했지만, 좀처럼 포기가 되질 않았다.
준완은 입에 물고 있던 종이컵을 옆에 내려두고 겨우 입을 열었다. 준완의 시선은 여전히 앞을 향해 있었다. 곁에 있는 블말에게는 시선을 전혀 주지 않았다.
준완의 행동에 블말은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 우리가 지금 사내 비밀연애 하고 있는 건 알고 있지? "
" 거, 거기서 들킬 일 없어요...! "
" ... 혹시 내가 그동안 너를 힘들게 했니? "
" 아니요, 교수님은 전혀 안 그랬어요. "
" ... 뭐, 생각은 해볼게. "
준완은 생각해 본다는 말만 남겨두고서 일어나더니 그대로 들어가 버렸다.
홀로 남겨진 블말은 멍하니 안으로 들어가는 준완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준완의 반응에 굳이 환승연애에 나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다음 쉬는 시간이 다가와 다시 정원에 나왔다. 준완과는 시간이 맞질 않아 홀로 정원에서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는데 그녀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소리 없이 살금살금 걸어오던 사람은 블말의 지척까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확 누르며 놀래켰다. 그 순간 화들짝 놀란 블말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커피를 쏟을 뻔했다.
" ... 왁!! "
" 엄마야! "
" 하하, 많이 놀랐어? "
" 교수님! "
" 무슨 일이라도 있어? 블말이 기분이 안 좋아 보이길래~ "
" 아... 별건 아니고요... 그냥, 그냥요... "
" 그냥이 아닌 거 같은데? "
블말의 곁으로 다가온 사람은 다름 아닌 이익준이었다.
익준은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블말의 곁에 앉았다. 블말은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곁에 앉는 익준의 모습에 자신의 고민이 살짝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익준이 익숙하게 다리를 꼬아내며 블말을 보고 특유의 표정을 지었다.
블말은 익준의 표정에서 걱정거리를 숨기는 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한참 고민하다가 익준에게 아까 있었던 일들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의 앞에서는 이상하게도 숨기려고 해도 사실을 말해버리는 이상한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율제 병원에서도 준완과 자신의 관계를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이 익준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그렇지만 항상 눈치가 빨라 쉽게 무언가를 숨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준완이 익준과 친구이다 보니 더더욱 그러했다.
" 사실... 제가 준완 교수님께 환승연애에 나가보자고 이야기했어요. "
" 음음. "
" 그런데 준완 교수님께서... "
" 뭐야, 그건 블말이가 너무했네~ 네가 잘못한 게 맞아. "
" 네? "
" 근데 가끔 권태기가 온다면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 "
" 교수님, 환승연애도 알아요? "
" 그럼~ 당연히 알지, 왜 모르겠어? 그거 요즘 엄청 인기 많은 거잖아. "
" 오... "
" 나 아직 그렇게까지 아저씨 아니다~? "
블말은 이전 쉬는 시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전부 꺼냈다.
준완이 했던 마지막 말까지 전부 익준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던 익준이 블말을 보며 그녀를 탓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녀의 편을 들어주기도 했다.
익준의 말을 듣고 있던 블말은 놀란 얼굴이 되어 익준을 향해 물어보았다. 그러자 익준이 장난스러운 어투로 답하며 능글맞게 답했다.
장난스러운 말투에 블말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
.
.
블말이 익준과 이야기를 하는 사이 일이 끝난 준완은 자신의 방에서 고민에 잠겼다.
블말이 나가자고 했던 프로그램을 검색하기까지 했다. 2021년도에 시작한 프로그램이며 지금은 시즌 3를 방송하고 있다는 것과 블말이 방송 예정인 프로그램을 어떻게 출연하자고 한 거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장 큰 건 시즌 내의 모든 커플이 이별한 상태에서 나오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헤어져야 할 정도로 문제가 있었던가.
준완은 이미 블말과 출연한다는 걸 기준으로 생각했다.
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헤어져야 할 이유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준완은 거의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했다. 수술할 때도, 회진을 돌며 환자들을 볼 때도 그 고민만 가득했다.
저녁에 모두가 퇴근할 시간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준완이 병원 앞에서 차를 끌고 와 블말을 기다렸다.
" ... "
" 선배도 수고하셨어요! "
" 너도 들어가서 쉬어. "
" 어, 교수님! "
분명 비밀 연애라고 했던 것 같지만, 준완에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블말이 퇴근 후 다른 간호사들과 인사를 하고 있을 때 입구에 있는 익숙한 차를 발견했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조수석을 열고 탑승했다.
뒤이어 안전벨트를 매고 힐끗 준완을 보았다.
준완은 운전을 하면서 묵묵히 앞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먼저 입을 열어 말했다.
" 네가 말한 프로그램, 한 번 나가보자. "
" 네? "
" 근데 솔직히 나는 조금 의문이야. "
" 아... "
블말은 자신을 생각해서 출연한다는 결정을 내려준 준완이 너무 고마웠다.
하지만 막상 그가 의문이라고 말하는 게 뭔지 물어보질 못했다. 물어보았다가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상처를 받으면 어쩌지, 마음 탓이었다.
블말은 집 앞에 도착하자 차에서 내리며 준완을 불렀다.
그에게 고맙다고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 말했다.
" 교수님, 고마워요. "
" 아니야. 들어가서 쉬어. "
그렇게 두 사람은 환승연애 3에 도중 참여 신청서를 내고 출연하게 되었다.
환승연애가 1회차가 진행하게 되고 블말은 잔뜩 긴장한 마음으로 입장하게 되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입장하게 된 블말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신발장 벽면에 붙어있는 끈을 보았다. 10개의 끈이 벽에 걸려있었는데, 전부 제각기 다른 색을 하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끈을 보며 색이 예쁘다는 생각을 하며 실내로 들어갔다.
누가 어떤 색인지 궁금해하며 준완의 색을 가장 궁금해하기도 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실에는 이미 9명이 모여있었다.
그 인원 중에 준완도 포함이었다.
블말은 9명 중 가장 먼저 준완을 찾았지만, 애써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18개의 눈동자들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오히려 블말이 뻘쭘해져 버렸다.
" 하하... 안, 녕하세요? "
" 어서 와요! 제일 마지막에 오셨네요! "
" 아... 일 때문에요. "
" 쉿, 지금은 이름만 이야기할 수 있어요. "
" 앗... 죄송해요. "
블말은 눈동자를 데굴 굴리다가 용기를 내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다.
식은땀이 절로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지 9명 중에 가장 밝아 보이는 남자와 여자가 블말에게 다가와서는 인사하며 반겨주었다.
블말이 소파에 앉자 각자 자기소개를 다시 이어갔다.
모두의 소개라고 해봤자 이름만 이야기하는 것뿐이었지만, 소개가 끝나고 블말도 말했다. 모두가 소개를 끝내자 유일하게 소개를 하지 않은 준완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준완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가볍게 목을 까닥이며 말했다.
" 김준완입니다. "
" 와~ 이름이 신기하시네요. "
준완의 짧은 소개에 블말은 살짝 웃었다.
그때 준완의 소개가 끝나자 밝은 여자가 블말을 보며 말을 걸었다. 블말이 답을 해주려는 찰나 집안을 울리는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사람들이 우루루 밖으로 나갈 때 거실에 남겨진 사람은 블말과 준완 두 사람이었다. 블말은 준완을 힐끗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아는 척하고 싶어 죽겠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 알려준 말로 인하면 첫 회부터 x로부터의 선물이 도착했다고 했다. 블말은 힐끗 다시 준완을 보다가 카메라와 눈이 마주친 탓에 아차 하며 다시 앞을 보았다.
" 이게 블말 씨 거네요. "
" 감사합니다. "
" 이쪽 분은 절대 혼자서 상자 못 드시겠어요. "
" 블말 씨는... 생각보다 작네요? "
" 그러게요. "
한 여자가 블말의 것이라며 상자를 건네주었다.
그런데 상자가 다른 사람들의 것에 비해 현저히 작은 상자였다. 블말은 다른 사람들이 상자를 흔들기에 저도 따라 살짝 흔들어 보았다.
다른 사람의 상자에 1/3도 안 되는 크기다 보니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촬영 전에 제작진이 준비해달라고 해서 자신도 준비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준완이 이걸 준비했다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쓰였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상자 속 내용물을 준비했을지.
어찌 보면 지금 헤어진 척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런지 마음 한켠이 묵직하고 저릿했다. 애써 괜찮은 척 하면서 상자를 건네준 여자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 상자 챙겨줘서 고마워요. "
" 뭘요. "
그렇게 다들 상자를 열어볼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기에 분위기에 휩쓸린 건지 블말도 고민하게 되었다. 블말은 힐끗 준완을 보았는데 그는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상자를 들고 그대로 배정 받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째서인지 그 모습에 보는 게 싫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고, 블말은 죄 없는 상자만 노려보았다. 결국 블말도 상자를 열어보지 않고 놔두는 쪽을 택했다.
몇몇 다른 사람들은 상자를 열어보는데 우는 사람도 있었고, 웃는 사람도 있었다.
블말은 차라리 안 보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기분 상태라면 상자 안에 무엇이 있든지 간에 울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준완이 상자를 두고 방에서 나왔다.
준완이 문을 닫고 고개를 드는 순간 울먹이는 블말하고 시선이 마주쳤다.
" ... "
" 하... "
울 것 같은 블말의 표정에 준완이 움찔거렸다.
준완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분명 여기에 오자고 한 건 블말이었으면서 왜 시작하자마자 저런 표정을 짓는 건지.
그녀가 걱정되면서도 괜한 화가 살짝 나기도 했다.
준완의 입장에서 잠깐 방에 들어갔다 온 사이 블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기에 더더욱 걱정이 앞섰다.
그러다가 모두가 거실에 모여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사실상 이름만 밝힌 상태였고, 나이나 그 외 정보는 알려주거나 알 수 없었기에 다들 sns나 일상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하루가 지났고, 블말은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뒹굴거렸다.
준완과 톡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방송 규칙상 개인적인 연락을 하지 못했기에 조금 불편하다고 느꼈다.
" 잘 자요, 블말 씨. "
" 잘 자요. "
블말은 잠들기 전 룸메이트에게 인사를 건네고 잠들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사이 출연진들과 나이도 트게 되고 직업도 공개하게 되었다. 프로그램의 묘미라고 할 수 있는 속마음 문자도 받아보기도 하고, 보내기도 했다.
블말은 물론 속마음 문자를 준완에게 보냈다. '고마워요' 딱 한 마디였지만.
블말은 준완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속마음 문자를 보냈다는 것에 기운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러다가 데이트 할 기회가 왔는데, 남자 지목 데이트였다.
봉투 안에는 제작진이 보낸 종이가 있었다.
[ 남성 입주자들이 고른 x와의 추억의 장소에서 데이트를 합니다.
여성 입주자들은 마음에 드는 추억 조각을 선택해 데이트 상대를 확인하세요. ]
" 추억 조각? "
" 봉투 안에 카드가 같이 있네요. "
" 아하. "
편지와 같이 있던 봉투 안에는 사진으로 된 카드가 들어있었다.
추억 조각이라고 불리는 걸 보자마자 블말은 그중 하나가 준완과의 추억이라는 걸 바로 알아버렸다. 테이블 위로 펼쳐지는 추억 조각들을 둘러보는 척하다가 하나를 골랐다.
함께 둘러보고 있던 다른 여성들이 블말을 보며 말했다.
" 바로 그거 골라도 괜찮아요? "
" 아... 네, 괜찮아요. "
그 말에 당황한 블말이 어색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카드를 돌리니 뒷면에는 QR 코드가 있었다. 블말은 곧바로 카메라를 켜 QR 코드를 찍었다. 그러자 화면에서 준완의 모습이 나왔다.
그녀는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진정하며 모두에게 말해주었다.
" QR 코드 찍으니까, 사진이 나오네요. "
" 정말요? "
" 이 데이트 내일 하는 거죠? "
" 그렇죠. "
블말의 말에 여성진 모두가 하나 같이 QR 코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데이트 상대를 확인한 듯싶었다. 누군가 데이트는 내일 진행하는 거냐고 물어보았다. 그렇게 다음 날이 되기 전 모두가 익명 대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준완과 블말은 서로 매칭된 거다 보니 메세지를 주고받을 필요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끝나길 기다리면서 블말은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 진짜 만약에 자신이 추억 조각을 알아보지 못했거나 다른 사람이 먼저 가져가 버렸더라면, 그렇게 되면 준완이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해야 한다는 건데 그땐...
그렇게 생각하니 블말은 되게 싱숭생숭한 기분이 되었다.
준완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 ... 그 반대도 그렇지 않을까. "
문득 이어지는 생각의 끝에 준완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다른 남자와 대화하고 스킨쉽 하는 걸 원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직 현재 진행 중인 프로그램이지만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다면 일 때문이라고 말한 뒤 준완과 하차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다음 날, 준완과 블말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데이트를 했다.
단 하나 다른 게 있다면 바로 비밀 데이트가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아무래도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사내 비밀연애를 하고 있었던 지라 데이트도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지 못했었다.
그렇다 보니 오늘의 데이트는 좀 많이 색다른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건 비단 블말만 느끼고 있는 게 아니었다. 준완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블말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긴 했지만. 만약 두 사람 다 평범한 직장을 가지고 있고, 일상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직업이었더라면 이런 데이트도 자주 했을 거라는 생각 말이다.
" 교수님, 무슨 고민 있으세요? "
" 네가 출연하자고 했던 날. 미안해, 자기야 했으면 여기 안 나왔을 거야. "
" 아... "
" 출연하자고 한 건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고. "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했지만, 의미가 완전히 달랐다.
블말은 색달라서 좋네~ 정도였지만, 준완은 색다르지만, 평소엔 못 해주는데, 라는 차이가 있었다. 데이트가 끝나고 준완과 블말은 촬영 때처럼 서로 좋았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x의 소개서라는 게 날아왔다.
블말은 이미 자신의 x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상태였기에 준완이 뭐라고 썼을지가 궁금해졌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x가 누구인지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 아... "
[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반했었습니다.
힘들 법 한 일이지만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꿋꿋이 버티며 일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반할 모습이었는데, 남에게 뺏기기 싫어 제가 데려왔었네요.
가끔 맹한 모습을 보여준다거나 함께 힘들어할 때면 그 누구보다 든든했고, 의지가 되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그럴 땐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하니까 잘 보듬어 주세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에게 주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직 떠나보내기엔 힘들 것 같습니다. ]
길게 써 내려간 소개서에는 마치 미련이 넘치는 전 남자 친구처럼 글을 적어두었다.
블말은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내내 코 끝이 찡하게 아려오는 게 느껴졌다. x의 소개서에는 절대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은 글이 적혀 있었다.
준완이 블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준완도 블말의 소개서를 받은 건지 소개서를 읽다가 블말을 보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시선이 맞닿자 순간 울컥해 버린 블말은 결국 그 자리에서 눈물을 글썽거리고 말았다.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x의 소개서로 인해 가라앉아버리고 모두가 훌쩍이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 중엔 블말도 포함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모두가 진정되고 나서야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서로 퉁퉁 부어버린 눈을 보며 웃기 바빴다.
" 하하, 다들 눈이... 엄청 부었네요. "
" 준완 씨는 안 운 것 같아요. "
" 뭐? 준완이가 안 울었다고? "
" 원래 눈물이 적은 편이라. "
다들 하하 호호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불똥이 가만히 있던 준완에게 튀었다.
듣고만 있던 준완이 안경을 치켜 올리며 답했다. 모두가 그럴 수 있다며 화기애애하게 분위기가 넘어갔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아침에 일어난 모두가 주방에 모여 밥을 만들었고, 단란히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 모두들, 잘 잤나요? "
" 하아... 졸리네요... "
" 잘 먹겠습니다~! "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며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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