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 차일드 타입

[HL/자컾/231112] 겨울에 피는 꽃

나비의 보관함 2025. 2. 4. 02:59



 

" 초아 아기씨, 날이 추워요. "

" 알아, 유모. 하지만... "

" ... 그런 썩을 놈팡이 기다려봤자 뭐 한데요? 우리 초아 아기씨만 아깝죠!! "

" ... 유모, 그만해. "

 

 

하얀 눈꽃이 가득 내려와 온 산을 뒤덮은 날이었다. 

초아는 아침 해가 밝아 수탉이 우는소리를 듣자마자 잠에서 깨어났다. 버선발로 뛰쳐나와 꽁꽁 언 모랫바닥을 박차고 문까지 나섰다. 무엇이 그리 급한 모양인지, 허둥거리며 버선발로 나서는 모습에 보다 못한 유모가 초아를 뒤따라 나서며 쓰개치마와 볼끼를 챙겼다.

초아는 마당부터 시작해 처마 위를 온통 하얗게 덮어버린 눈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에 김이 서리니 몽글몽글하게 뻗어나갔다. 코 끝이 찡하게 시려오고, 볼이 쩍쩍 갈라지는 따끔거림이 느껴졌지만 오매불망 누군가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자니 별것 아닌 듯했다.

반 시진이 지나도록 오지 않는 님의 모습에 초아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그걸 지켜보던 유모가 오죽 답답했으면 그 속을 그녀에게 풀어놓듯 한탄했다.

 

 

" 병조판서 댁 아기씨를 이렇게 방치할 순 없는 거잖아요! "

" 유모... "

" 아무리 어릴 적부터 함께했던 도련님이라지만 너무한 거 아녀요?! "

" 미안하지만 나는 방치한 기억이 없는데. "

" 에구머니나! 우, 운수 도련님... "

" ... 운수야! "

" 누님, 추운데 왜 나와 계십니까? "

" 너 기다렸지. "

 

 

유모는 자신이 한 평생 돌봐왔던 곱디고운 아기 씨가 무시당하는 것만 같아 속상했다. 하염없이 문 너머로 누군가가 오기만 기다리며 보기만 하던 초아의 시선이 유모에게로 향했다.

초아는 유모의 말에 생각을 곱씹어 보았다.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소꿉친구이자 어린 동생 같기도 하며 하나뿐인 약혼자인 님을.

자신이 계속 기다린다고 하면 유모가 더 화를 낼 것만 같아 발걸음을 돌리려던 순간 누군가가 초아의 손목을 잡았다.

초아의 몸이 갑작스레 돌려지고, 초아 자신의 기우는 몸을 중심 잡지 못하기 전에 상대는 품에 초아을 안았다. 

초아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갔다.

 

 

" 누님, 볼이 빨개요. "

" 너도 빨개, 운수야. "

 

 

초아는 언제 유모를 생각했냐는 듯 눈앞에 있는 운수를 보며 발갛게 웃었다.

운수의 따뜻한 손이 초아의 뺨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두 사람은 어느새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초아와 함께 있던 유모는 두 사람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갓난아이 때부터 보았던 아기씨는 운수 도련님이 그리도 좋으실까. 유모는 자신이 하다 못 한 말을 목구멍 안까지 삼켰다. 

초아의 손이 허공에 머무르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운수는 추워서 손끝이 빨갛게 물든 초아의 손을 살포시 잡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 누님, 이번에 제가 한양을 다녀오면서 예쁜 비녀를 가져왔어요. "

" 그냥 와도 되는데... "

" 비녀를 보니 누님과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

" 춥다, 어여 들어가자. "

 

 

운수와 초아는 마당을 지나 본채로 이동하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둘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유모도 뒤따라 걸었다. 유모는 두 사람을 보며 둘의 시간이 조금 더 길기를 바랐다.

운수와 초아는 본채로 들어가고, 유모는 발걸음을 돌려 부엌으로 향했다. 본채 안으로 들어온 운수와 초아는 탁상 하나를 두고 앉아 이야기를 이어갔다.

운수는 품에서 비녀를 꺼내주며 이야기를 하다가도 드문드문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몇 년간 함께 부대끼며 지냈던 초아 그것을 놓칠 리 만무했다.

 

 

" 운수야, 어찌 표정이 그리 어두운 거야? "

" 누님... "

" 말해보렴. "

" ... 이번에 제가 북방 오랑캐 토벌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

" ... 뭐? "

"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기다려주실 수 있으시죠? "

" 기다리는 거야 늘상 있는 일이니 괜찮다만... 왜, 왜 하필 너인 거야? "

 

 

초아는 자신이 받은 충격을 지우기 힘들었다.

오랑캐 토벌, 소문으로는 익히 들었다. 병조판서인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걸 종종 귀담아듣기도 했었다. 탁상 위에 올려진 단아하면서도 예쁜 비녀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떨리는 손을 치마폭에 가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애써 물어보았다. 

운수는 초아의 질문에도 쉬이 답을 내어주지 못했다. 그저 기다려주기를 바라며 씁쓸한 미소만 보일 뿐이었다.

유모가 뒤늦게 차와 다과를 내어오자 둘의 대화는 맥없이 끊겼다. 

 

 

" 그것보다 비녀는 안 보십니까? "

" 운수야. "

" 제가 한양에서 일하다가도 누님 생각이 나 사 왔습니다. "

" ... 운수야! "

" ... 예, 누님. "

 

 

운수는 괜히 말을 돌리려 비녀를 콕 집어 말했다.

비녀를 보며 한양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붓을 들고 써 내려가는 와중에도 떠오르던 말간 얼굴. 

그 얼굴이 마치 겨울에만 피던 동백꽃과 닮았더랬다.

보고픈 님을 생각하며 동백꽃 모형이 박힌 비녀를 구매했었다. 크게 외치는 이름에 운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들어 초아를 보았다.

초아는 아녀자가 되어 큰 소리를 쳤다는 것에 아차 싶었지만, 눈치껏 자리를 피하는 유모를 보았다.

자신을 보는 운수에게 시선을 옮겼다.

 

 

" 만약, 만약에 네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

" 누님.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예요. "

" 운수야. "

" ... 울지 마요, 누님. "

 

 

운수는 자신을 보는 초아의 시선에 마음이 아려왔다.

항상 말갛게 웃어주며 붉게 물들이던 뺨이 사랑스러웠는데, 오늘은 다른 의미로 붉게 물들여졌다. 

눈가가 촉촉해지고, 뺨이 화로 인해 붉어진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미어졌다.

무릎 위로 올라가 있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운수는 애써 웃으며 부정적인 말을 하는 초아의 말에 긍정적으로 받아주었다. 탁자 위에서 떨리는 초아의 손을 고이 잡아주며 엄지로 손등을 쓸어주었다.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 꼭 살아 돌아와 누님의 곁에 있을 게요. "

" 약조... 하는 거지? "

" 그럼요. "

 

 

운수의 약조에 초아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만 같은 표정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님을 전쟁터로 보내야 한다는 불안감과 슬픔이 교차되었지만, 제 앞에서 괜찮다고 말하는 이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 없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가봐야 한다는 운수의 말에 초아는 몸을 일으켰다.

초아는 운수를 마중 나오며 시간이 오래되지도 않은 것 같아 아쉬웠다. 운수는 대문 앞에 서서 다시 그녀를 보았다.

 

 

" 다음에 볼 때는 꼭... 제가 사 온 비녀를 해주세요. 누님. "

" 그래, 살아서 돌아와. "

" 그리할게요. "

 

 

초아는 전쟁으로 나가야 하는 제 님을 붙잡고 싶었다.

그리해도 운수는 전쟁에 나갈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서도 쉬이 진정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운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발걸음이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보일 것 같은 초아의 모습이 계속 신경 쓰였다.

운수는 고개를 숙여 초아의 뺨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두 사람은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초아는 점점 멀어지는 운수의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 아기씨... "

" 유모, 조금만... 조금만 더 볼게. "

" 네... "

 

 

밖에서 모든 대화를 듣고 있던 유모의 표정도 많이 어그러졌다.

운수가 떠난 길 위로 새빨간 동백꽃잎이 찬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초아는 멀어지는 운수가 이따끔 등을 돌려 이쪽을 볼 때면 멍하니 손을 흔들어 주었다.

조금이라도 저를 떠올릴 수 있도록.

그가 부디 안전하게 저에게로 돌아오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차디찬 겨울바람이 초아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초아는 남몰래 챙겨 나왔던 비녀를 품에 꼭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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