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우리는
부제 :: 예정의 과거 이야기
예정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차분하게 이어졌다.
아주 오래전, 예정이 유치원생이었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람이 바로 장수연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같은 마을에 사는 언니였지만 크면서 그 관계는 변했다고 말해주었다.
언제나 마을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거나 괴롭혀질 때면 항상 달려와 주었던 사람이 수연이라는 것.
수연은 예정에게 있어 소중한 언니였고, 첫사랑 같은 존재였다. 예정에게 부모님이 계시긴 했지만, 두 분 다 일을 하는 탓에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았고, 그 탓에 자연스럽게 예정이 수연의 집에 놀러 가는 일이 많았다.
두 사람이 서로의 집안에 교류하면서 그사이는 더 깊어졌다.
" 예정아, 울지 마. 언니가 멀리 가는 거 아니야. "
" 흐으... 하지만... 학교가 다르잖아... "
" 그야 언니는 이제 초등학생이니까. 예정이도 언니가 다니는 학교 오면 또 같이 다닐 수 있어. "
" 정말...? "
" 응, 언니랑 같은 학교 다니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겠는데? "
수연이 중학생이 되어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로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정은 수연과 같은 곳을 다니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싫어서 수연의 옷을 붙잡고 울기까지 했었다. 그런 예정을 달래고 가까이하지 않았던 공부를 가까이하게 해준 것도 수연이었다.
예정의 어린 시절이 전부 수연과 연관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예정은 수연을 많이 의지했고, 좋아했으며 함께하길 원했다. 예정이 초등학교에 올라가고 나서도 똑같았다. 학년과 반만 달랐을 뿐, 두 사람은 교내에서도 함께였다.
그러다 예정이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것은 그녀가 초등학생 고학년이 되었을 때였다.
" 언니, 나 할 말이 있어. "
" 응? 뭔데? "
" 그게... 언니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
" 천천히 말해도 괜찮아. "
" 나... 나, 언니 되게 좋아해! 같은 동성이어도 괜찮을 정도로! "
" 어? "
" 나랑 사귀어 줘! "
13살, 첫해의 발렌타인 데이 날.
예정은 그날을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 날이라고 정했다. 고심 끝에 만들었던 초콜렛과 함께 수연에게 고백했었다. 어린 나이에 준비한 엉성한 초콜렛과 용돈을 털어 산 장미꽃 한 송이.
그 두 가지의 물건은 예정의 마음을 표현하기에 알맞았다.
하지만 금방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답변은 예정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예정이 긴장한 나머지 수연에게 초콜렛이 담긴 상자와 꽃다발을 건네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기에 수연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 너무 조용한 나머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힐끔 수연을 보았다.
" ... 언니? "
" 미안, 미안해. 예정아. 많이 놀라서... "
" 아, 아니야! 갑자기 고백한 거니까... "
" 미안해. 네 마음은 받아주지 못할 거 같아. "
" 아... "
" ... 먼저... 갈게... "
예정은 분명 수연도 자신과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명백한 거절이었기에, 그것이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예정이 여전히 수연의 표정을 보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건네지 못한 마음은 너무나도 커서 거절당했다는 것 자체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예정을 두고서 수연이 먼저 자리를 피했다. 예정은 수연이 떠나고도 한참이나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멍하니 있었다. 거절당했다는 것에 상심하여 온갖 이유를 붙이며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고 변명했다.
다음 날, 예정이 학교에 등교했을 땐 교내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 쟤야? 같은 여자를 좋아한다고 고백한 애가? "
" 그렇대.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그런 애랑은 놀지 말라고 하셨어. "
" 맞아, 그거 병이래. 옮는다고 놀지 말랬어. "
" 저기... "
" 꺄아악!! 저리 가! "
예정은 함께 놀던 친구들이 자신을 피하는 모습에 어리둥절했다.
용기를 내어 먼저 다가가려고 할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표정은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았다. 그 정도로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고백에 차인 것도 모자라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까지 변했다는 걸 버틸 수 없었다.
이후로 예정은 졸업 때까지 홀로 지냈다.
조용히 지냈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소문으로 인해 친구들뿐만 아니라 선배들까지 합세하여 예정을 괴롭혔다. 왕따를 시키고, 가방 안에 썩은 우유를 넣어둔다거나 책상을 더럽혀둔다거나 하는 일이 생겼다.
이런 시간을 보내는 도중에도 수연은 여전히 예전처럼 예정을 대했다.
" ... 언니, 이제 그만해요. "
" 뭐가? "
" 우리는 저번에 끝났어요. 왜 이러시는 건데요. "
" 예정아, 너는 날 좋아한다면서.. 그 마음이 금방 사라졌니? "
" ... "
예정은 연달아 이어진 일에 완전히 수연을 향한 마음을 정리한 지 오래였다.
그녀를 향한 마음이 가벼웠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무겁고 짙어서 문제였다. 제대로 자아를 가지고 스스로 생각을 할 수 있던 나이부터 알아 온 사람이었다. 가족 대신 자매가 되어준 존재였다.
어찌 그 마음이 가벼울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예정이 겪은 건 그보다 더 심한 것이었기에 정리할 수 있었다.
예정이 못된 소문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을 때 수연은 방관했다. 마치 자신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듯이 굴었다. 예전이었으면 예정이 힘들어할 때마다 달려와 구해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일방적으로 예정을 피하고 다녔다.
" 그 마음은 정리했어요. "
" 뭐? "
" 그러니까 언니는 언니가 살던 대로 사세요. 저는 언니 잊고 살 테니까. "
" ... 어디 가? 예정아, 언니 여기 있잖아. "
" 윽... 아파요...! "
예정이 냉정하게 마음을 정리했다고 말하니 수연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상냥하게 웃고 있던 미소가 사라지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표정으로 어딘가 싸한 기운을 풍겼다. 예정이 자리를 피하기 위해 일어나려고 하니 수연이 다급하게 예정의 팔을 붙잡으며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예정은 자신의 팔을 강하게 잡아 오는 수연의 팔이 너무 아파서 인상을 찡그렸다.
수연의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기에 예정은 당황스러웠다. 수연의 힘이 조금 떨어졌을 때, 그 팔을 뿌리치며 자신의 팔을 문질렀다. 예정의 입장에서는 수연의 행동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먼저 고백을 거절한 것도 수연이었고, 이상한 소문에 부정은커녕 의문스러운 행동으로 인해 힘을 실어준 것도 수연이었다.
" 왜, 왜? 예정아, 왜?? 아, 혹시 내가 거절해서 그래? "
" 하... 언니야말로 왜 이러시는 건데요? "
" 그건... 그땐 다 이유가 있었어. 예정아! 내가 너랑 같은 마음인 걸 너도 알고 있잖아. "
" 아뇨, 모르겠는데요. 솔직히 지금도 모르겠어요. "
" 혜, 예정아...!! 어디 가는 거야! "
" 더 할 이야기 없어요. "
예정이 팔을 뿌리치자, 수연이 당황한 듯 횡설수설했다.
수연의 말은 마치 예정이 갑자기 변심해서 수연을 차갑게 대하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예정은 이대로 같이 있다간 정말로 자신이 가해자라고 믿어버릴 것만 같아서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예정이 교실을 벗어나려고 할 때, 그녀의 뒤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도 예정은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고 했다. 여기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잠시 멈칫하던 예정이 입술을 짓이겨 물더니 그대로 달려 교실을 나갔다.
남겨진 수연이 교실 안에서 예정의 이름을 불러댔지만, 예정은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 허... 진짜야? "
" 네, 그 뒤로 계속 쫓아다니면서 집착하더라고요. "
" ... 걔가? "
" 그 뒤로 그 언니가 중학교랑 거리가 있는 곳으로 갔어요. "
" 예정아... 고생했어, 얼마나 무서웠을까... "
예정은 두 사람에게 어릴 적 이야기를 하며 차오르는 눈물을 꾹 참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코 안쪽이 시큰거렸지만 모든 걸 털어놓기 위해선 울음을 참아야 했다. 그날 이후로 수연이 자신을 상대로 유독 집착하던 것,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집착이 커져갔던 것, 달아나려고 하면 더 강압적으로 변하던 것까지 말했다.
예정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정과 예린이 표정을 일그러트리더니 예정을 꽉 안아주었다.
예정은 두 사람의 온기에 참고 있던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왈칵 쏟아지는 눈물은 멈출 줄 모르고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물에 소정과 예린이 예정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던 그 집착과 강압적인 행동 속에서 홀로 괜찮은 척 버텨야 했던 예정이었다.
"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예정아. "
" 이제는 언니들이 너를 지켜줄게. "
" 소정이 언니... 예린이 언니... "
" 다른 애들에게 말하는 건 조금 더 있다가 하자. 괜찮겠어? "
" ... 네, 괜찮아요. 다른 언니들이 절 있는 그대로 받아줄 걸 알지만... "
"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 "
두 사람의 위로를 받은 예정이 눈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린의 말대로 사람의 일은 모르는 게 맞았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어렸을 때 그 사실을 직접 몸소 겪어본 사람이 바로 예정이었기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예정의 눈물이 완전히 멈추고 나서야 소정과 예린이 예정과 함께 기숙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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