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지 로즈 타입

[GL/나페스/250216] 엄친딸, 그 언니들 13화

나비의 보관함 2025. 3. 4. 00:45


 

지금부터 우리는

 

 

부제 :: 새로운 전학생
 

 

어깨가 절로 들썩이는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정의 등장에 춰봤자 얼마나 추겠냐며 낮잡아보던 학생들은 예정의 춤 실력에 감탄하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정에게 반감이 없는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호응을 해주고 노래를 즐겼다.

다만 반감을 가진 사람들은 예정의 모습에 의외라 생각하며 놀라고 있었다. 

노래가 다 끝나고, 포즈를 잡았을 때. 일순간 강당 안은 일제히 조용해졌다. 10초 간의 정적, 그 이후에 함성이 쏟아지며 댄스부 6명의 이름과 예정의 이름이 불렸다.

예정은 춤을 추느라 거칠어진 호흡을 색색 내뱉으며 차오르는 감각을 느꼈다.

 

 

" 와아아아!!! "

" 소원! 예린! 은하! 유주! 신비! 엄지!! 너무 예쁘다!! "

" 예정아!!! 너무 멋져!!! "

" 별빛 밤하늘!! 멋지다!! 예쁘다!!! 우와아아악! "

" 헉... 허억... "

 

 

춤을 추고 나면 후련할 줄 알았지만, 후련함 뒤로 벅차오르는 감정은 예정이 참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목이 막혀올 정도로 설움이 북받쳐 오르고, 참으려 했던 눈물이 결국 터져서 예정의 뺨 아래로 툭툭 떨어졌다. 무대 인사를 마친 뒤 소정과 작은 은비가 예정을 다독여주며 무대를 내려왔다.

7명이 무대를 내려가고 나서도 여전히 들려오는 함성이 그간 노력을 보답받는 기분이었다.

곁에 있던 예린이 손수건을 건네주며 예정의 등을 쓸어주었다.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예정을 보고 있었다. 여러 차례의 연습, 연습, 또 연습. 그 연습의 빛이 오늘 발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대에 뛰었던 의상을 갈아입을 때, 큰 은비가 예정을 보며 말했다.

 

 

" 예정아, 우리 댄스부는 따로 숙소 배정받았거든? 네가 원하면 친구들이랑 있어도 되는데... "

" 정말요? 저 숙소 가볼래요! "

" 친구들에게는 안 가봐도 되겠어? "

" 네, 사실... 그리 친한 친구는 없어요. "

" 큼... 빠, 빨리 가볼까? "

 

 

예정이 친구가 없다는 말에 조금 우중충한 분위기가 되자, 눈치를 보던 예원이 웃으며 말했다.

7명은 옷을 갈아입은 뒤 예정의 가방만 챙기고서 고등부 숙소로 향했다. 댄스부가 워낙 잘 나가다 보니 동아리 개별 숙소를 받는 것도 있고, 중학생이 고등부로 와서 지내는 특혜도 있었다.

7명은 숙소로 향하는 내내 도란도란 가을에 있는 운동회와 축제 때 어떤 무대를 할지 대화를 나누었다.

고등부로 막 넘어왔을 때, 7명에게 다가오는 학생이 있었다. 어깨에 닿는 단발, 살짝 올라간 눈꼬리. 애굣살이 집히는 도도해 보이는 인상의 여학생이었다. 예정은 웃고 있다가 6명이 발걸음을 멈추자, 덩달아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길을 막은 사람을 보는 순간 몸이 흠칫 굳어버렸다.

 

 

" 어라, 너네 이제 오는 거야? "

" 응. 수연아, 너는 방에 안 들어가고 뭐 해? "

" 나야 뭐... 너네 찾다가... 그런데 뒤에는 누구야? "

" 아, 우리 댄스부 멘토멘티 하는 거 알지? 너도 있잖아. "

" 응. 알지~ 나도 3학년 선배 멘토 있잖아. "

" 그래. 얘가 너 오기 전에 왔던 전학생이야. "

" 예정아, 인사라도... 예정아? "

 

 

몸이 굳어버린 예정과는 달리 작은 은비와 예원은 친하기라도 한 듯 서슴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작은 은비와 예원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소정은 예정의 몸이 겁에 질린 듯 덜덜 떨고 있는 걸 발견했다. 사시나무 떨듯 떠는 예정의 모습에 걱정이 앞선 소정이 예정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러는 사이 맞은편에 있던 수연이라는 학생이 씩 웃더니 예원을 향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예원과 작은 은비가 웃으며 수연에게 예정을 소개해 주려고 했지만, 덜덜 떨던 예정이 참지 못하고 자리를 뛰쳐나가 버리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예정의 반응에 남겨진 6명은 당황스러웠다.

정작 예정의 불안함을 증폭시킨 수연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서 입을 가리며 웃고 있었다.

 

 

" 어머... 미안해, 혹시 내가 낯가리는 애한테 너무 다가간 걸까? "

" 어? 그럴 리가. 예정이가 그리 낯가리는 성격은 아닌데... "

" 일단 내가 쫓아가 볼게. 너네 먼저 숙소에 들어가 있어. "

" 언니, 같이 가요. "

 

 

당황한 예원과 큰 은비, 작은 은비, 유나는 어리둥절하며 예정이 가버린 방향을 보았다.

소정이 힐끗, 수연을 보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떼며 예정의 뒤를 따라갔다. 예정이 떠나기 전부터 그녀를 걱정하고 있던 예린이 소정의 뒤를 따랐다.

떠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네 사람의 뒤로 수연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

.

.

 

예정은 혼란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무작정 발걸음이 닿는 곳으로 달렸다.

예정이 정신을 차렸을 땐, 발목에 시원한 바닷물이 닿았을 때였다. 푸른 하늘과 밤하늘의 보랏빛이 오묘하게 섞여가고 있었다. 예정은 발걸음을 멈춘 채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달리는 내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내린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왜 자신이 도망쳤고, 달아나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기어이 피하고 피했는데도 여기까지 따라오는 수연의 행동에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자신의 고백을 거절해 놓고, 집착하고 강압적으로 구는 수연이 싫었다.

예정은 자꾸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벅벅 닦아냈다.

 

 

" 혜, 예정아... 괜찮아? 일단 거기서 나올까? "

" 혜... 예정아! "

" 하아... 언니들...? "

 

 

예정은 멍하니 지평선 너머의 노을을 바라보고 있다가 자신을 뒤쫓아온 소정과 예린을 보았다.

두 사람은 해안가에 선 채 예정을 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마치 예정이 나쁜 마음을 먹고 바다에 들어가려는 듯한 느낌이 들어 얼른 나오라고 손짓하며 양팔을 벌렸다. 

때마침 예정이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기 때문에 더 오해하기 쉬운 상황이었다.

수연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아직 정신을 못 차린 예정은 아무리 두 사람이 불러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뿐이었다. 소정이 이대로는 안 되겠던 모양인지 입을 꾹 다물고 달리며 예정을 끌어안았다.

순간 예정이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는 걸 소정의 뒤로 예린이 붙잡아 주었다.

 

 

" 헉... 허억... "

" 소정이 언니? 예린이 언니? "

" 너... 왜 안 나오는 거야...! "

" 이, 일단 나가자. 얼른. "

 

 

두 사람은 예정을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 꽉 끌어안으며 긴장감에 의해 숨을 훅 내뱉었다.

세 사람이 해변을 벗어나 숙소 근처의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예린이 수건을 가지고 와 예정의 발을 닦아주고 있었고, 소정은 예정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예정은 두 사람의 애정 가득한 손길에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예정의 웃음에 두 사람이 잇따라 웃었지만, 그 미소 속에 예정을 향한 걱정이 함께 묻어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소정이 예정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주며 물어보았다.

예린은 곁에 앉아 괜찮다는 듯 예정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 예정아, 아까 왜... 도망친 건지 알려줄 수 있을까? "

" ... "

" 물론 네가 말하기 힘들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

" ... 소정이 언니... "

" 응, 편하게 말해. 나 말고 예린이도 함께 있잖아. "

" 맞아, 언니들은 예정이 편인걸? "

 

 

예정은 두 사람이 자신의 편이라고 말해주는 것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왈칵 쏟아지는 감정을 주워 담아야 하는데, 지금은 줍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감정이 흘러넘치게 내버려두고 싶었다. 언제나 항상 꾹 누르며 참고 견뎌야만 했다. 

특히 전학을 오고 난 이후로는 더더욱. 그나마 최근에는 그게 덜하긴 하지만.

하지만 참고 견디는 걸 이제 그만두고 싶었다. 한참 뜸을 들이던 예정은 눈동자를 굴리고, 입맛을 다시다가 두 사람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정말... 제 편이에요? "

" 물론이지. 우릴 믿어, 예정아. "

" 그게... "

" 응, 천천히 말해도 돼. "

" 아까 본 전학생이요. 언니들도 알고 계셨어요? "

" 음... 아무래도 예원이랑 작은 은비에게 듣긴 했지. "

" 언제 전학 왔는데요? "

" 수련회 오기 일주일 전이던가. "

" 아... "

 

 

예정의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이 조금씩,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예정은 두 사람에게 전학생인 수연에 대해 말했다. 모든 걸 알려주기 전에 수연이 언제 전학온 건지 물어보고, 그 답을 듣고 나서야 예정이 말했다.

수련회 오기 일주일 전이라면 한참 연습에 빠져있는 탓에 서로 바빴을 시기였다.

예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수연은 자신이 이곳, 서울로 이사 오기 전에 지내던 광주에서부터 알던 사람이고 그리고... 자신의 첫 사랑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의도치 않게 커밍아웃을 하긴 했지만, 예정은 그게 불안해져서 힐끔 두 사람의 반응을 살폈다.

 

 

" ... 그래? "

"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에 이유는 없지. 그래서? "

" 맞아, 계속 말해줘. "

 

 

짝사랑한 사람이 여자라는 사실에도 두 사람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눈치였다.

예정은 안도하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예정의 말을 들으면서 소정은 자신이 예정을 향해 품고 있는 이 마음을 계속 숨길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같은 동성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면 예정이 싫어할까 봐 숨기려고 했었다.

그런데 예정의 첫사랑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에 화가 났지만, 안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들 하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이런 마음은 예린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예린은 예정을 보자마자 반한 걸 인정했던 소정과 달리 예정의 커밍아웃에 자신의 마음을 알아버린 것이었다.

두 사람 다 예정을 보며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예정은 안심하며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