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 차일드 타입

[HL/1차/250209] 이것은 그녀를 향한 나의 회고록이다.

나비의 보관함 2025. 3. 3. 01:09


시라노, 그것은 나의 이름. 록산느, 그것은 나의 팔촌 여동생이자 내가 연모하는 상대.

옅어진 상태라고는 하나, 신께서는 감히 친인척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은 것이냐며 나에게 벌을 내린 것이 분명했다. 그것 말고도 벌을 내리기엔 충분하다는 걸 알고 있다.

록산느의 편지에 크리스티앙이 아닌 내가 답을 함으로서 그녀의 사랑을 우롱한 죄.

아마도 그것이 가장 크겠지. 그간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괴롭고 힘들며 버티기 어려웠으나 끝까지 버텼다. 그저 그녀에게 크리스티앙의 편지를 전달한다는 걸 목표로.

뭐, 막상 편지는 사랑에 대해 말주변이 없던 크리스티앙이 아니라 내가 쓴 것이지만.

 

 

" 으윽... "

 

 

그래. 이젠 여기까지인 것이겠지. 나의 운명도, 나의 사랑도.

아아,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녀에게 편지의 주인은 나라고 진실을 알려주기라도 할 것을. 그대에게 사랑을 노래했던 사람은 크리스티앙이 아니라 나라는 걸 고백이라도 해볼 것을.

이제 와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안다.

고백할 수 있던 순간들은 언제나 있었다. 그걸 바보같이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두 사람을 응원한다는 명목으로 모른 척 넘긴 건 자신이었으니, 그 벌은 달게 받아야겠지. 

무엇보다 가장 알리기 좋았던 순간에도 숨기지 않았던가! 

크리스티앙의 죽음이 기회라고 여길 수 없었기에 그랬던 것도 있었지만, 크리스티앙의 죽음을 힘들어하며 괴로워하는 그녀에게 더 큰 아픔을 줄 수 없었다. 분명 록산느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크게 좌절했을 테지.

 

 

" ... 상처가, 윽... 어쩔 수 없군. "

 

 

크리스티앙의 죽음 이후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스스로 수녀원에 들어간 록산느의 곁을 장장 15년을 지켰다.

매일 같이 수녀원을 들러 록산느를 위로하고 세상 소식을 전한 것도 나였다. 망할 제 성격 때문에 적은 점점 많아졌고, 생활을 걷잡을 수 없이 쪼들려 가기 시작했다. 

오늘도 그래, 록산느를 위해 수녀원으로 가던 길이었다.

그런데 누군지 알 수 없으나, 누군가가 머리 위로 집어 던진 굵은 장작개비 때문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말았다. 이것이야말로 신이 내린 천벌이지 않은가! 크리스티앙의 죽음을 기회로 생각하고, 록산느의 사랑을 기만했으며 우롱한 죄!

물론 그 외에도 친인척을 사랑한 죄도 있겠지만, 차라리 그쪽보단 이쪽을 생각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움직이면 왈칵하고 쏟아지는 피가 곧 죽을 것임을 알려주는 마지막 경고처럼 보인다. 아아, 하지만 나는 오늘도 록산느에게 가서 그녀를 위로하고 세상 소식을 전해야만 한다. 

그것이 나의 속죄니까.

 

 

" 후우... 큭, 후... "

 

 

피가 치솟는 곳을 옷가지로 꾹 눌러 지혈이라도 해볼까, 했지만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순간마다 피가 쏟아져 나온다. 눈앞이 핑글 돌아가고,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질 것만 같다. 입안에서는 역겨운 쇠 맛이 강하게 났다. 아무래도 장작개비를 맞을 때 혀를 잘못 씹은 듯하다.

아아, 내가 곧 죽음을 맞이하겠구나. 하얗게 점멸되는 눈앞에 그리운 이가 보인다.

크리스티앙, 그대와의 내기에 나는 솔직하지 못했어. 록산느는 그대의 죽음에 15년이나 기리더군. 그런 그녀의 앞에서 모든 진실을 밝힐 수 없었지. 그래서 벌을 받는가 보오.

순간 어지러움이 느껴지고, 다급하게 벽을 짚었다.

비틀거리는 순간에도 부상은 점차 커져갔다. 어차피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를 향한 이 감정은 사랑보단 그녀를 존경하고, 동경에 가까운 것이었으니.

 

 

" 하하... 이거 시간이 좀 걸리겠군. "

 

 

내 예상대로 록산느에게로 향하는 발걸음은 점점 속도가 줄어들었고, 희미해진 정신은 점점 과거에 붙잡히게 되었다.

아아, 코끝을 스치는 향기들이 추억을 되새기게 만든다.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그곳, 전쟁통에서도 펜을 붙잡고 그리는 이를 향해 편지를 써 내려가던 시간들, 손끝에 스치던 얇고 거친 종이, 펜촉에 묻어나오던 잉크.

나의 동경과 존경에 크리스티앙의 사랑을 담아.

그녀는 여자의 몸으로 검술을 배우고, 시를 배우며 자신과 같은 여자를 위해 문예지를 창간할 정도로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이었기에, 동경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고, 지금까지도 동경하고 있지.

눈앞에 언뜻 보이는 수녀원의 입구에 마지막 힘을 짜내어 본다.

 

 

" 아, 이런... 멀리 있던 거로군. "

 

 

평소라면 금방 코 닿을 거리, 15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였지만 부상을 당한 상태라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게 당연했다.

내가 죽음과 코앞을 다투고 있는 부상을 가지고도 이렇게까지 버틸 수 있는 사람이었을 줄이야. 록산느를 만난다고 해서 진실을 밝힐 생각은 전혀 없다. 이 죄는 나만이 안고 가야 할 문제니까.

수녀원을 보고 있으니 크리스티앙과 록산느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특히 크리스티앙과 록산느의 결혼식이 뇌리에 강렬하게 떠올랐다. 드 기슈 백작의 구애를 벗어나기 위해 비밀리에 크리스티앙과 록산느가 결혼하게 되었지.

그 자리에서 크리스티앙과 록산느를 응원했던 자신을 떠올렸다.

 

 

" 아아, 록산느... 크리스티앙... "

 

 

나는 곧 죽음이 나를 덮칠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흐려지는 눈앞과 말라가는 입술, 과도한 출혈,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정신과 자꾸만 힘이 빠져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되는 이 순간이 죽음의 앞이 아니고서야 말이 되겠는가.

하릴없이 계속해서 치고 올라오는 죽음을 애써 무시하며 록산느를 떠올린다.

록산느, 록산느. 경애하는 사랑스러운 나의 팔촌 여동생. 지금 내가 그리로 가고 있으니 너무 오래 기다리지 말아. 너를 향하는 길이 무척이나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마지막으로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하지만 그 말이 결코 진실은 아닐 테지.

 

 

" 록, 산느... "

 

 

힘겹게 도착한 수녀원을 보자, 눈앞이 다시 핑하고 돌았다.

애써 멀어지는 정신을 가다듬고 수녀원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을 록산느를 찾아 발걸음을 움직인다. 끊임없이, 끊임없이. 오로지 그녀만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힘겹게 움직였다. 

빛바래지지 않은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움직이지만, 점점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있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맛과 힘이 빠진 탓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지금 상태를 록산느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가야만 했다. 가고자 했다.

내 오랜 기억이여, 나를 조금만 더... 그녀에게로 이끌어주길 바란다.

 

 

" ... 록산느, 오늘도 찾아왔어. "

" 시라노, 어서 와요. "

" 크리스티앙이 남긴 마지막 편지를 읽어주고 싶어. "

" 읽어주세요. "

 

 

나는 나의 죽음을 직감했기에, 크리스티앙을 핑계로 나의 마지막 감정을 그녀에게 전하기로 했다.

록산느가 나의 죽음을 의심하지 못하게 유창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편지를 읽어 내려간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수녀원에서 진실로 편지를 읽는다면 한치도 보이지 않아 읽지 못할 어둠 속에서. 

그녀를 향한 진심을 써 내려가듯 말한다.

아아, 진심을 전하는데도 그녀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던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나는구나. 이 편지는 크리스티앙이 아닌 내가 록산느를 향해 쓰는 마음이자 마지막 인사다.

심각한 부상에도 이 마음을 전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아아, 록산느에게 진실을 전하진 못했지만,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나의 마음을 알려줄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다. 마지막까지 나의 삶에 있어 비겁함과 위선에 맞서 싸워왔지만, 그녀의 앞에서는 진실을 알릴 수 없다는 게 한탄스럽다.

 

 

"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

" 시라노, 나에게 진실을 알려주세요. "

" ... 록산느. "

 

 

결국 버티던 힘이 빠지고, 시라노가 무너지듯 주저앉아버렸다.

록산느는 대번에 쓰러지는 시라노를 향해 달려오고, 그를 품에 안으며 진실을 요구했다. 끝까지 진실을 알리지 않으려고 다짐했던 시라노의 다짐은 록산느의 눈물에 전부 녹아버려 사라진 뒤였다. 시라노는 숨을 거두기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록산느에게 지금까지 숨겨왔던 진실을 고백하고, 그녀의 품에서 마지막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