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을 것 같은 체육관, 그곳에 농구부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내와 교복을 입고 있는 여학생이 있었다.
통통, 농구공이 튕겨지는 소리가 체육관을 울리고 조용한 그곳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상호가 농구공을 튕기며 드리블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현은 난간에 앉은 채 다리를 살살 흔들었다.
상호가 연습을 하는 모습을 지켜본다고 한 건 자신이었지만, 지켜보고만 있으려니 심심했다.
발을 굴리던 현은 그대로 난간에서 내려오며 순간 삐끗하며 넘어지고 말았다. 하필이면 그날 오후에 체육관 바닥을 왁스 칠하며 청소를 한 탓이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순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쿠당탕, 소리를 내며 현이 넘어지는 순간 상호가 던지려던 농구공을 놔두고서 현에게 달려왔다.
" 현아, 니 개안나?! "
" 아으... 하필 오늘 청소한 걸 깜빡했네. "
" 조심해서 인나라. "
" 고마워, 아기상어. "
" 그 호칭 좀 어떻게 안 되겠나... "
" 응, 안 돼. "
현은 자신에게 내민 상호의 손을 붙잡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엉덩방아를 찧은 부분을 살살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상호를 보며 고맙다고 말했다. 서울말과 부산 사투리의 사이에서 대화가 오갔다. 현이 상호를 부르는 호칭에 상호가 얼굴을 붉힌 채 인상을 찡그리며 불만을 토해냈다.
부루퉁한 그 모습에 현이 웃으며 검지손가락으로 상호의 뺨을 콕 눌렀다.
상호는 현을 완전히 일으켜준 다음 멀쩡히 서 있는 모습에 등을 돌려 농구공을 향해 걸어갔다. 상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현은 가만히 서서 생각했다. 자신이 넘어지니 농구공도 내버려두고서 달려와 주는 상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을 상호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 고딩한테 아기 상어가 뭐고, 아기 상어가. "
" 호야. "
" 왜, 현아. "
" ... 아무래도 나 발목 삐었나 봐. "
" 가지가지 한다... 업히라. "
상호는 농구공을 주워 들며 입을 비죽 내민 채 구시렁거렸다.
투덜거리는 소리가 체육관을 가득 채웠다. 그런 상호의 모습에 현이 키득거리며 웃다가 한 발짝 내딛는 순간 찌릿하고 통하는 느낌에 움찔거리더니 그 자리에 서서 상호를 불렀다.
장난처럼 부르던 호칭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이름을 부르며 상황이 심각함을 알렸다.
그러자 여전히 입을 비죽 내밀고 있던 상호가 농구공을 든 채 몸을 돌려 현을 보았다. 상호는 현이 웃으면서도 사색이 된 표정을 보고서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단번에 파악했다.
농구공을 보관 트레이에 넣어두고서 현의 앞에 무릎을 꿇고 등을 보였다.
" 뭐, 뭐해? "
" 뭐하기는. 니 치료 받아야지. "
" 그건 너 연습 끝나고 해도... "
" 치료는 빨리 하는기 좋다. "
치료를 받아야 한다며 업히길 재촉하던 상호의 말에 현이 어쩔 수 없이 상호의 등에 업혔다.
상호가 현의 다리를 잡고 천천히 일어서면서 천천히 움직였다. 현을 엎은 상태에서 농구공 보관 트레이를 쥐고 움직여 트레이를 먼저 창고에 넣어둔 뒤 체육관 입구에 잠시 멈추었다.
의자 위로 현을 앉혀두더니 상호가 일어나 현에게 말했다.
" 니 잠시 여 있어라. 내 옷 갈아입고 올게. "
" 어? 어어... 다녀와. "
" 어데 가지 말고 딱 거 있어라! "
" 알았다니까. "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상호의 말에 현이 알았다며 손사래를 쳤다.
금방 다녀온다던 상호는 정말 그 말을 지켰다. 5분도 걸리지 않아 상호가 교복으로 갈아입고서 나타났다. 현의 앞에 다시 무릎을 꿇고서 등을 보였다. 현은 업히라는 듯한 상호의 행동에 이번에는 군말 없이 업혔다.
보건실을 하기 위해 걸어가는 동안 두 사람 사이는 평소처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하던 도중에 현은 괜히 부끄럽고 쑥스러워지는 기분에 고개를 푹 숙였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온 게 불만이었지만, 학교 안에서 이야기가 잘 통하는 친구를 만나 다행이라고 여겼다. 같이 지내다 보니 상호에게 생겨난 마음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걸 현은 누구보다도 잘 느끼고 있었다.
현은 뺨을 상호의 어깨에 기댄 채 그의 호흡을 들었다.
" ... 호야, 나 할 말이 있는데... "
" 어. 무슨 할 말인데. 꼭 지금 해야겟나 "
" 응. "
" 뭔데 "
" 나... 너 많이 좋아해, 나랑... 사귈래? "
" 그러든가. "
현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이 고백하고 있는 건지 알지 못했다.
그저 차오르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서 가지고 있던 감정이 뜬금없이 입 밖으로 나와버리고 말았다. 정말 앞뒤 가리지 않고 갑작스러우면서도 가볍게 툭 나와버린 고백에 상호는 별다른 동요 없이 답을 주었다.
현은 상호에게서 답이 오지 않거나 혹은 거절을 예상했다.
하지만 자신의 갑작스러운 고백에도 별다른 동요 없이 그러든가, 라며 무심하게 받아주는 답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기분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혹시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 정말 사귀는 거야? "
" 그러든가, 라고 말했는디. "
" 나... 장난치는 거 아니야. "
" 내도 장난 아닌데. "
현은 마지막으로 장난이 아니라고 콕 집어서 말했다.
그러자 상호가 피식 웃으며 자신도 장난이 아니라고 답했다. 상호의 말에 현은 이제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은 건지 깨달은 사람처럼 얼굴을 순식간에 붉게 물들였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그 흔히 하던 이런저런 이야기도 목 안쪽으로 삼켜졌다.
상호가 현을 데리고 보건실에 도착하자마자 발목을 살펴보고, 파스를 붙여주었다. 현의 시선 끝에 들어온 상호의 귀 끝이 묘하게 붉어져 있었다. 현은 상호도 자신처럼 부끄러운 거구나, 생각이 들었다.
" 그럼... 우리 이제 사귀는 사이인 거지? "
" ... "
" 왜 말이 없어, 아기 상어. "
" 그니까 그 호칭은 좀...! "
" 애칭인데? "
누가 부산 남자 아니랄까 봐서. 현의 질문에도 상호는 얼굴을 붉히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 않고 있다가 아기 상어라고 부르자 욱하는 마음에 다시 고개를 돌려 현을 보았다. 현이 싱그럽게 웃으며 애칭이라고 말하자, 상호의 얼굴이 더 새빨갛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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