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지 로즈 타입

[GL/나페스/250125] 엄친딸, 그 언니들 11화

나비의 보관함 2025. 3. 1. 03:35

지금부터 우리는
 
 
부제 :: 정당하지 못한 이유
 
 
뒷마당의 쉼터에 도착해서도 두 사람은 조용했다.
5분간 대화조차 하지 않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건 이 선생이 아닌 은진이었다. 은진은 이 선생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잔뜩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전학 첫날부터 어색해 하는 자신을 위해 힘써주고, 괴롭힘에서 구해준 사람.
이 선생은 은진에게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너무 믿은 탓일까,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믿기지 않았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너무 쓴맛을 미리 알아버린 탓에 속상하기만 했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까지는 이 선생을 믿고 있었다.
비록 댄스부 언니들이 그 선생을 너무 믿지 말라고 말하긴 했지만.
 
 
" ... 선생님, 왜 그러신 거예요? "
"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
" 멈출 순 없는 건가요? "
" 은진아. 네가 건강해져서 다행이야. "
 
 
은진의 진지한 물음에도 이 선생은 그저 입꼬리를 올려 실실 웃으며 동문서답으로 답했다.
이 선생의 반응을 알지 못하던 은진조차도 그녀의 답이 이상하다는 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점점 답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사실에 은진이 인상을 찡그렸다. 
은진이 오죽 갑갑했던 모양인지 이 선생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다.
은진의 손이 이 선생의 팔을 붙잡으려던 순간 이 선생이 빠르게 허리를 돌려 팔을 휘둘렀고, 그 순간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유나가 이 선생의 팔을 붙잡았다. 은진의 눈에 들어온 유나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처음 보는 유나의 표정에 은진이 화들짝 놀랐다.
 
 
" 어, 언니?! "
" 하! 이럴 줄 알았지. 은진아, 너는 이 선생님을 믿었겠지만 그 믿음이 배신으로 돌아온 건 어쩔 수 없어. "
" 네? "
"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 배신한 어른의 잘못이지. "
" 어머,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
 
 
유나의 뒤로 뒤늦게 쫓아온 작은 은비가 이 선생의 손목을 쳐냈다. 
댄스부 내에서도 체육을 잘하기로 소문난 유나가 더 빨랐던 것이었다. 유나는 은진을 보며 절대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은진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기도 했지만, 유나가 해준 말이 큰 감동을 주었다.
자신도 모르게 맺혀버린 눈물을 닦아내며 작은 은비를 보았다.
그녀가 이 선생의 손목을 쳐냄으로써 멀리 떨어져 나간 물건이 있었다. 핑그르르 돌며 바당에서 돌던 물건은 바로 주사기였다. 심지어 안에 뿌연 액체가 들어가 있는. 
은진은 조금이라도 두 사람이 늦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그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쫙 돋자,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만약 두 사람이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 어머... 무슨 일이니? "
" 방금 은진이한테 뭘 놓으려고 한 거죠? "
"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
" 유감이에요, 선생님. 전부 녹화되고 있었거든요. "
" ... 그거 이리 내놔!! "
 
 
이 선생은 천연덕스럽게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무슨 일이냐는 듯이 말했다.
유나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물어보는 말에도 이 선생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뒤늦게 나타난 소정이 녹화하고 있다며 캠코더를 들이밀자, 그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소정이 들고 있는 캠코더는 댄스부 동아리에서 연습할 때, 무대를 올라갈 때 찍던 그 캠코더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은진은 당황했으나, 이 선생의 태도가 전 뒤집듯이 한 번에 바뀌는 것을 보고 정말 저 사람은 목적이 있어서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서 개인적으로 찾아왔던 건 혹여나 잘못 알게 된 사실에 의해 오해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선생의 반응을 직접 보게 되었으니 오해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면하기로 했다.


" ... 선생님, 왜 그러셨어요. "
" 하! 누가 너 따위. 시골에서 온 학생을 챙겨준다고 그러니? "
" ... "
" 여긴 알아주는 집안의 자식들이 다니는 명문고야! 그런데 내가 왜 널 챙겨줬는데! "
" 선생님... "
" 너 멍청이 아니니? 내가 널 챙겨준 것도 얘네들이랑 가까워진 이후잖아. 그것도 몰라? "


이 선생이 이젠 자포자기한 듯 은진에게 모든 걸 나불거렸다.
가식적인 태도를 집어치우기로 결정한 모양인지 부드럽고 나긋나긋하던 목소리를 치우고, 표독스럽고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쏘아붙이는 듯한 그 목소리에 은진이 움찔거렸다.
생각해 보니 이 선생이 잘해준답시고 상냥하게 굴기 시작했던 건 자신이 댄스부에 들어가서 언니들에게 인정을 받았을 때였다.
멘토 멘티가 되었을 첫날부터 다정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색한 구석이 있었는데, 댄스부와 함께 다니고 난 이후부터는 달라졌던 이 선생의 태도가 이제야 떠올랐다.
은진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이 선생을 보았다.


" 하... 조금만 더 하면 됐었는데, 네년이 다 망쳤어!! "
" 힉...! "
" ... 그만하시죠, 선생님. 경찰 불렀습니다. "
" 하! 경찰 불러서 뭘 할 수 있는데? "
" 할 수 있는 건 많죠. "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던 상황이 점점 크게 치달았다.
소정의 말대로 누군가 신고를 한 모양인지 뒷마당으로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와 이 선생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가녀린 이 선생의 몸을 짓누르고 수갑을 채우며 미란다 원칙을 줄줄 읊었다.
너무 큰 충격에 은진이 비틀거렸다.
은진을 지키기 위해 앞을 막고 있던 유나가 비틀거리는 은진의 몸을 붙잡아주었다. 은진의 표정은 처음보다 명백하게 창백해진 상태였다.


"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당신이 한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변호사... "
" 은진아! 괜찮아? "
" ... 언니... 죄송해요... "
" 혜, 은진아! "


은진은 점점 감기는 시야 사이로 경찰들에게도 발악하는 이 선생의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유나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힘없이 쓰러졌다. 연달아 일어난 큰 충격에 몸이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 것이었다.
근처에 있던 소정을 포함한 댄스부 학생들이 은진을 보고서 다급하게 달려왔다.
그녀들이 은진의 상태를 살피고 있을 때, 한 경찰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 수고 많으십니다, 학생들. 참고가 될만한 것들이 있습니까? "
" 경찰 아저씨, 고생 많으세요. 여기 증거품 있습니다. "
" 캠코더와 주사기... 로군요. "
" 네, 방금 저 선생님이 이 학생에게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은 캠코더에 찍혔고요. 피해 학생들 진술도 캠코더에 있습니다. "
" 감사합니다. 가해자는 마약 소지법 및 사용, 유통죄로 처벌받을 겁니다. 일단 기절한 학생부터 옮겨야 할 텐데... "
" 은진이는 저희가 옮길게요. 꼭 저 사람 처벌받게 해주세요. "


소정이 맏언니로서 먼저 나서서 상황 설명과 증거물 전달을 나섰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다음 경찰까지도 기절한 은진을 걱정했다. 유나와 작은 은비가 괜찮다며 은진의 팔을 어깨에 걸고 그녀와 함께 교내 안으로 사라졌다.
현장에 남은 네 사람이 상황을 정리하고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유나와 작은 은비는 은진을 보건실 안 침대 위로 눕힌 뒤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안절부절못하는 유나와 그런 유나의 곁에서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걱정하고 있는 작은 은비가 있었다.


" 어머... 너네 최근에 자주 오는구나? "
" 보건 선생님! "
" 선생님, 은진이가 기절했는데 상태 좀 봐주세요. "
" 그러마. "


잠시 외출하고 돌아온 보건 선생이 익숙한 두 사람을 보았다.
물론 침대에 누워있는 은진을 포함해서 자주 본다고 말했다. 특히 은진은 전학생이면서 보건실에 꽤 자주 오는 편이었다. 학생 프로필에서는 건강에 이상이 없어 자주 못 보겠구나, 생각했던 학생이 이상할 정도로 자주 보건실에 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청진기와 라이트를 들고서 은진의 상태를 확인했다.
청진기로 심장 소리를 듣고, 라이트로 동공 상태를 보면서 상태를 전부 확인한 보건 선생은 나름대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은진이 어떤가요? "
" 괜찮아요? "
" 언니들이 참 극성이네, 그럴 만도 한가... 일단 학생의 상태는 양호해. 약간의 영양실조가 보이긴 하는데, 나쁘진 않고. "
" 그럼 왜 못 일어나고 있어요? "
" 아무래도 큰 충격을 받은 거 같구나. "
" 아... "
" 아마 한 두 시간 내로 깨어날 테니 기다리고 있으렴. "
" 네... "


보건 선생은 차트를 가져와 무언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유나가 힐끗 그 차트를 보았지만, 알아보기 힘든 영어 필기체였기에 알아보지 못했다. 차트를 보던 유나의 시선이 다시 은진에게로 옮겨졌다.
두 사람이 은진의 곁에 앉아 상태를 살피고 있을 때, 보건 선생은 잠시 일어나더니 약장을 뒤적거렸다.


" 일어나면 이 약이라도 먹이렴. 아마 머리가 상당히 아플 거란다. "
" 네... "
" 물은 여기 있고. "
" 감사합니다. "
" 그럼 선생님은 잠시 나가있으마. "


유난히 은진만 바라보며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보는 두 사람의 모습에 보건 선생이 다정히 웃으며 자리를 비워주었다.
잠들어있는 은진과 그런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두 사람만 보건실에 남아있었다.
은진이 잠든 모습에 유나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작은 은비가 입술을 달싹이며 목울대를 치는 말을 삼키지 못하고 내뱉었다.


" 유나 언니... "
" 응? "
" ... 자꾸 은진이한테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게... 꼭 우리랑 얽혀서... "
" 그런 말 하지 마, 은비야. "
" 하지만... "
" 유나 말이 맞아, 그런 말 하지 마. 은비야. "
" 언니들... "


작은 은비는 은진이 처음 왔을 땐 그리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해도 함께 어울리려고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자신이 춤을 처음 배웠던 그때의 모습 같았기에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있었다.
그렇게 몇 달 사이 정들어버린 건지.
저보다 어린 은진에게 이런 고난과 힘든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는 게 측은해지고 괜스레 미안하게 느껴졌다. 우리들만 아니었더라면 학교에서 평화롭고 안전한 생활을 했을 테니까.
한 번 시작된 불안함은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걸 작은 은비만 생각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