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우리는
부제 :: 처음으로 느낀 분노
" 상태가 심각하더구나. 영양실조에 피로까지... 조 나이대에 걸리기 쉽지 않은데 말이다. "
" ... 영양실조에 피로요? "
" 그래, 거기다가... ... 아니다. 이건 조금 더 확실해지면... "
" 뭔데요, 아버지? "
" ...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저 아이에게서 마약 성분이 검출되었구나. 아주 미약하긴 하다만... "
" 예?! 마약이요? "
예린과 큰 은비, 예원은 듣게 된 소식에 화들짝 놀랐다.
영양실조에 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인데 거기다가 미약하긴 하지만 마약 성분이라니.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이게 현실적인 일인가, 싶을 정도였다.
충격적인 눈빛으로 세 사람이 연진을 생각했다.
그녀들의 시선에서 걱정을 읽어낸 예원의 아버지가 옅게 웃으시더니 예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 안심하려무나. 지금은 며칠간 수액 맞으면 몸에서 빠져나갈 테니 걱정할 것 없단다. "
" 휴... 그건 다행이네요. "
" 그나저나... 학교에서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지... "
" ... 범인을 찾아야죠. "
예린, 큰 은비, 예원은 동시에 서로의 시선을 보았다.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더니 예린이 대표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상대는 소정이었다.
소정과 예린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전화를 끊은 뒤 세 사람은 연진이 있는 병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수액을 맞으며 잠들어 있는 연진과 그런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는 소정과 작은 은비, 유나가 있었다.
예원의 아버지가 해주신 배려 덕분에 연진을 1인실에 입원시켰다.
" 언니, 우리... 그 선생 가만히 둘 거 아니죠? "
" ... "
" 아, 언니! 감히 연진이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
" ... 알아. 하지만... "
" 일단 우리 연진이가 일어나길 기다리자. "
" 맞아, 이렇게 시끄러우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거 같긴 하지만... "
여섯 사람에게는 당장의 가해자보다 피해를 입은 연진이 더 중요했다.
그날 저녁이 될 때까지 연진은 눈을 뜨지 않았다. 마치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처럼 눈을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럴 때 왕자님이라도 있었더라면.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으나, 작은 은비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분위기를 풀고자 말을 꺼낸 언니들을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 연진이... 이러고 있으니까 꼭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 같다. "
" 백설 공주에 더 가깝지. "
" 그럼 왕자님도 있겠네? "
" 없지 않을까... "
" ... 연진이에게 제가 왕자님이 되어줄래요. 앞으로 연진이에게 이런 일, 생기지 않게 잘 챙겨줄 거예요. "
" 은비야... 좋아, 우리 모두 연진이의 기사님이나 할까? "
" 공주님 지키는 기사인 거죠? "
호호, 웃고 떠드는 소리에 연진이 인상을 찡그리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가 눈을 뜨자, 주변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연진이 눈을 뜨긴 했지만 어째서인지 미동도 없이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말도, 움직임도 없는 그녀의 모습에 모두의 걱정이 시작되었다.
여섯 명이 돌아가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연진아... "
" 쩡아, 언니들 보여? "
" 여긴 병원이야. 정신이 좀 들어? "
몇 번의 말을 걸어도 답이 없는 연진의 모습에 유나가 먼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물기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가 다른 이들에게로 옮은 것인지 다른 사람들까지 눈물을 그렁그렁거리며 연진을 보았다. 조심스럽게 연진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때 예원의 아버지가 들어오시더니 그녀들을 보며 옅게 웃었다.
" 이런... 아직 약 기운이 덜 빠져서 그런 것이니 안심하렴. "
" 약 기운 빠지고 나면 다시 돌아오나요? "
" 그럼. 아마 하루, 이틀 정도는 더 있어야 할 거야. 다행이지, 투약된 마약이 적어서. "
예원의 아버지는 다행이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투약된 양이 많았더라면 수액으로도 힘들었을 수도 있었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그 사실에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연진을 이렇게 만든 그 선생이라는 작자, 가만두지 않겠다고.
어린 나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의 제약이 많았지만, 학생이기에 가능한 것이 많았다. 그러다 문득 예원이 의문이 들어 자신의 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 아빠, 그러면 약 성분이 뭔지 알 수 있어요? "
" 추출된 성분은 펜타닐이더구나. "
" 허... "
" 아무래도 요즘 유행하는 나비약인가인가 그 약인 거 같던데. " 맞아... 나 전에 본 적 있어. 나비약 먹고 다이어트한다던 애! "
" ... "
나비약이라는 단어, 일전에도 그녀들끼리 대화를 나눈 적 있었다.
대화를 나누던 도중 기억이 떠오른 유나가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여섯 명이 서로에게 시선을 주고받으며 암묵적인 대화를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연진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들은 돌아가면서 연진의 병간호를 자처했고, 병간호를 하는 사람을 제외한 5명이 나비약에 대해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나비약은 생각보다 학교 안에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학생들이 나비약을 먹던데. "
" 우리 반에서만 10명이 나왔어. "
" 저희 반은 14명이요. "
" 수급처를 알아야 하는데... "
" 미친 척하고 구한다고 해볼까요? "
" 으음... "
오늘 연진의 병간호를 해주는 사람은 소정이었다.
딱 7일째 되는 날이라 순서가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5명은 저들끼리 머리를 맞대고서 어떻게 상황을 해결할지 고민에 휩싸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교내에 나비약을 사용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소식이 큰 충격을 주었다.
그녀들이 고민하고 있을 때, 치료를 끝낸 연진과 소정은 대화를 이어갔다. 연진은 상태가 이전보다 훨씬 괜찮아진 모양이었다.
" 연진아, 내가 누군지 알겠어? "
" ... 네, 소정이 언니... "
" ... 정말 다행이다. "
" 죄송해요... 제가... "
" 아니야, 너는 잘못이 없어. 잘못은 그 선생이지. "
연진은 일어나자마자 소정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건넸다.
그녀의 사과에 소정이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답했다. 이 일은 연진의 잘못이 아님을 정확하게 짚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연진에게는 잘못이 없음을.
소정의 말에 연진이 울먹거리더니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그렇게 냉정하게 굴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올 수 있는 곳을 지켜준 소정과 다른 사람들에게 고마웠고, 또 미안했다.
선하고 다정한 연진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분노했다.
마치 그녀의 분노는 잔잔한 바다가 해일을 준비하듯이 고요했다.
" 이 선생님이 저에게 그러셨어요. 언니들이 저를 불편해한다고... "
" 그렇지 않아, 연진아. "
" 이제는 알아요. 그렇지 않다는걸. "
" 그래, 네가 알아주니 고마워. "
다정하고 상냥한 소정의 미소에 연진이 옅게 웃었다.
연진은 소정과 대화를 하는 내내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전학 첫날부터 챙겨주던 선생님의 배신이 생각보다 뼈저리게 아파졌다. 그리 친절하게 베푼 것도 아니었지만, 낯선 타지에서 받은 친절이 얼마나 크던가.
연진은 소정과 대화를 하는 내내 그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사람을 믿고, 신뢰하고 가까이했지만 돌아오는 건 정 반대의 배신이라니.
" 그래서 곧 있으면 수련회잖아. 거기서 우리 춤추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
" 그럼요. 그런데... 제 몸이 그걸 기억할지 모르겠어요. "
" 퇴원하고 나서 연습도 해보자. "
" 네! 전 좋아요! "
" 쩡아~~ 언니 왔다! "
소정과 연진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병실로 그녀들이 왔다.
매일같이 오는 그녀들이었지만, 정신을 차린 연진과 대면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밝게 인사하며 들어오는 유나도 문을 열기 전까지는 상당히 긴장했을 정도였다.
평소처럼 행동하며 대화를 하는 그녀들을 보며 연진이 웃었다.
그녀들에겐 너무 고맙고, 미안한 감정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음 날, 연진이 무사히 퇴원할 수 있었다.
" 언니, 이제 아픈 건 괜찮아? "
" 응. 괜찮아. "
" 딸... 아프면 아프다고 해도 되니 참지 말거라. "
" 네! 저 정말 괜찮아요! "
퇴원하는 날, 연진의 가족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를 맞이했다.
연진의 부모님은 휴가를 냈고, 동생인 혜민은 학교를 마치자마자 연진에게로 왔다. 입원하고 있는 내내 병문안을 와준 가족이었지만, 댄스부의 그녀들이 자진해서 병간호를 해준 덕분에 가족들이 안심할 수 있었다.
그날 돌아온 연진은 잠시 학교에 가야겠다며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연진이 학교로 가는 모습을 보던 부모님은 그저 속상했지만, 다녀온 연진이 알려줄 거라 생각하며 기다리기로 했다.
" 뭐야, 쟤. 아파서 입원했다더니 멀쩡한데? "
" 꾀병이었던 모양이지. "
" 하! 쟤 때문에 언니들만 피곤하잖아. "
" 얘, 너. 나한테 할 말 있니? "
" 무, 뭐? "
학교로 돌아온 연진은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뒤에서 속닥거리는 뒷담화를 들어도 애써 웃으며 괜찮은 척하던 그녀가 이젠 자신의 뒷담화를 하던 학생들 앞으로 가 용건이 있냐는 듯 먼저 물어보았다.
그녀의 당당함에 어이가 없는 학생이 반문하며 두 사람의 말싸움은 점점 커져갔다.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선생님을 불러와도 상황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이 선생님이 학생의 앞에 서서 연진을 보며 꾸짖었다.
" 연진아, 오랜만에 오자마자 이게 무슨 일이니? "
" ... "
" 허! 선생님 오시니까 바로 조용해지기는! "
" 그렇게 입 다물고 있을 거니? "
" ... 저 학생이 먼저 제 욕을 했어요. 저는 그에 방어했을 뿐이고요. "
" 그게 진심일 리가 없잖니. "
" 진심이면요? "
이 선생은 지금의 상황이 매우 당황스러웠다.
고교 댄스부 학생들과 떨어트린 뒤 약까지 먹여가며 굴렸을 때는 순종하던 애가 갑자기 반항하기 시작하는 게 탐탁지 않았다.
괜히 시끄러워지는 주변을 살펴보다가 연진에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 선생님이랑 잠시 볼까? "
" ... "
" 별꼴이야, 정말! "
연진의 뒤에서 뒷담화하던 학생은 아직 제 잘못을 알지 못했다.
그저 선생님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니, 잘못인지를 모르고 있는 듯했다. 연진과 이 선생은 복도를 걸으며 아무런 대화를 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이 뒷마당의 쉼터에 도착하고 나서야 대화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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