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부터 가문 회의랍시고 오가가라 명령해 대는 본가의 일방적인 통보 때문에 쿠로이는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지 못했다. 상당한 컨디션 난조로 인해 짜증이 절로 올라왔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꽤 괜찮은 기분이었다.
그놈의 망할 가문 회의가 무엇이라고. 그래도 결국 끌려가게 돼서 괜찮았던 기분을 된통 망쳐버리게 되었다. 어찌저찌 가문 회의를 끝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오늘따라 집안의 조용한 적막이 영 적응되지 않았다.
그 탓인 건지 유독 혼자 산다는 게, 살고 있는 집이 얼마나 큰 건지, 너무 잘 느껴졌다. 쿠로이는 신발장에 서서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혼자서 이러고 사는 것도 꽤 지치는구나.
" 하... "
쿠로이는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겉옷을 벗어 한쪽 팔에 걸친 후 곧장 거실로 향했다.
쓸데없이 너무 넓은 집이지 않은가, 언제나처럼 혼자 살고 있는 것일 뿐인데. 이토록 집이 넓게 느껴지는 건 또 처음이었다. 쿠로이는 그대로 소파 구석에 털썩 앉으며 등을 기대었다.
근처에 있는 리모컨을 집어 들고 TV를 켰다.
쿠로이는 너무 조용한 집안을 시끄럽게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화면을 돌렸다. 그러다가 금발의 한 사내가 나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모습을 발견했다.
분주하게 채널을 돌리던 쿠로이의 손이 멈추었다.
멍하니 자신도 모르게 그 사내에게 시선을 꽂은 채 계속해서 보고 있었다. 유려하게 뻗어나가는 손끝, 끝을 모르고 올라가는 가창, 화려한 빛줄기에 따라 변하는 표정. 모든 게 새롭게 다가왔다. 무미건조하고 흑백만 있던 세상에 색깔이 있는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점점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쿠로이는 리모컨을 던져두고 화면 속 에이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 하... "
그러다 화면 속 노래가 끝나고, 에이치가 사라지자 정신을 차렸다.
쿠로이의 속에서부터 알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묵직하게 올라오는 이 감정은 형용할 수 없었지만, 하나만큼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화면 속 사내를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쿠로이의 시선 끝에는 에이치만 있었다. 화면 속 많은 사람들이 움직여도 당연하게도 쿠로이의 눈에 들어오는 건 오로지 에이치, 단 한 사람뿐이었다.
" 에이치... 피네라고...? "
그리스의 코린트식 기둥으로 꾸며진 신전의 느낌이 나는 무대 위에서 에이치의 모습은 가히 신과 같았다.
아니, 그저 그의 존재만으로도 신이었다. 에이치는 신성함을 인간이라는 생물체로 표현한 듯했다. 신성함을 넘어선 신과 동급, 아니 그 이상이었다. 에이치의 머리 뒤에서 후광이 내리쬐고 있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쿠로이는 에이치의 무대가 끝나고도 광고가 틀어지는 순간까지도 한참 동안이나 TV 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노래, 감미로운 목소리, 황홀하던 모습까지. 귓가와 눈가에서 떠나지 않아 장시간의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무대 아래의 에이치도 아름답지만, 역시 무대 위에서의 에이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모든 것을 들이밀어도, 온갖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여도 그를 전부 표현할 수 없다는 걸 새삼 느꼈다.
" 하... 망할 가문만 아니었으면... "
쿠로이는 지금 나오고 있는 방송이 재방송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가문의 부름이 아니었더라면 에이치의 무대를 본 방송으로 볼 수 있었을 텐데. 두 눈에 담아 평생 간직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화나기도 했고, 동시에 허탈함까지 느껴졌다.
본 방송이었더라면 녹화도 바로 할 수 있었을 텐데.
무대 위,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이돌인 에이치를 가지고 싶다는 소유욕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바쁜 자신이 가는 게 아니라 항상 에이치가 곁에 있는 거라면 언제나 볼 수 있는 게 아니던가. 쿠로이가 이렇게 타오르는 건 마치 찬란한 태양을 갈구하는 이카로스처럼, 에이치를 품 안에 가두고 놔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흠... 일단 에이치에게 어떻게 이 마음을 표현하지? "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에이치를 어떻게 하면 자신의 곁으로 데리고 올 수 있을지에 관한 걸 생각했다. 동시에 오늘 보고 느꼈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에 관한 걸 고민했다. 단어 하나, 하나를 신중하게 고르면서.
에이치의 귀에 더럽고 추잡한 단어를 들려주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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