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 차일드 타입

서사

나비의 보관함 2025. 1. 16. 22:54

 


태율과 예휘가 처음 만난 건 따지고 보면 길을 지나면서 스치듯 지나간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서로가 기억하지 못했다.

지금은 서로를 의지하고 믿을 수 있지만 처음은 그러지 않았다. 서로를 의심하고 또 거부하기도 했다. 첫 만남에서 예휘는 태율을 그저 멘사 출신의 해군 잠수함 무장장으로만 보았고, 태율은 예휘를 지나가는 승무원 정도로만 기억했다. 처음은 그러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자주 만나며 인사를 하고 안면을 텄다. 처음에는 무미건조하기만 했던 그들의 감정은 서서히 가랑비에 옷 젖어가듯 변했다. 아주 천천히, 조금씩 말이다. 아무것도 없던 그릇에 하나씩 차오른다. 처음에는 적지만 어느 순간 가득 차 있는 걸 감당할 수 있을까?

 

" 태율 씨. 오늘도 바쁘나요? "

" ... 예휘 씨. "

 

하지만 두 사람의 직업이 다른 만큼 만나는 시간이 조금씩 줄어갔다.

연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구 같은 관계도 아닌 애매한 관계인 상태였다. 처음에는 불타올랐던 두 사람의 관계는 중간에 잠깐 식어가는 듯했다. 그것은 기우라고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태율은 예휘의 스케줄에 맞춰 시간을 내기도 했고, 예휘 역시 스케줄이 비는 날이면 태율을 찾기도 했다. 누가 본다면 이미 연인 사이로 보일 정도였다. 계속 반복되는 그런 관계 속에서 태율과 예휘는 서로를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천천히 서로의 구원이자 유일하게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사이가 되어갔다.

 

" 태율 씨. "

" 예휘 씨. "

 

누군가가 보기엔 별것 없는 것처럼, 두 사람에게 있어선 큰 변화를 겪은 것처럼 변해갔다. 큰 변동 없이 잔잔하게 변해 서로가 눈치를 채지 못해 괜한 오해를 사기도 했다. 태율은 자신의 감정이 사랑인지 단순한 우정인지 헷갈리기도 했고, 예휘는 이런 건 사랑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예휘에게 있어 태율은 단조롭고 평화롭던 일상을 깨부순 사람이었다. 태율에게 있어 예휘는 험난하고 힘들었던 일상에 평화를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이지만 서로를 구원하고 의지하며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조금씩 채워지는 감정의 변화를 너무 늦게 깨닫긴 했지만, 결과적으론 서로를 위하게 되었다.

 

"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기로 해요. "

" 예휘 씨, 제가 당신에게 힘이 될지 모르겠지만…. 부족하지 않은 힘이 되겠습니다. "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기로 약속했다. 서로 구원이기에, 서로 의지할 수 있고 또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에 그러자고 했다. 태율의 진지한 말과 표정에 예휘는 웃는다. 단조롭고 평화롭다는 건 어떻게 보면 지루하고 시시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 일상을 깨버린 그이기에, 예휘는 그와 함께 끝까지 가기로 했다. 그가 파멸의 길을 걸어가든지 아니면 나락의 길을 걸어가도 예휘는 자신의 구원자와 함께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던 감정이 서서히 변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태율은 시간이 지날수록 예휘와 미래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비록 그 끝이 좋지 않더라도 예휘와 함께여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