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로즈 타입

[HL/드림/221127] 이런 사랑이라도 괜찮나요

나비의 보관함 2025. 1. 6. 08:48

 

지예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무언가를 사각사각 갉아대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눈을 서서히 뜨자 흐린 시야 속에 들어오는 건 고작 어둠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려고 했지만 좀처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숨을 천천히 쉬고 손끝부터 조금씩 움직여보자 모든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시야 역시 어둠에 익숙해지자 어느 정도 보였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공간, 창문도 없었다. 지예는 돌아온 감각을 기억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기억이 나지 않는 낯선 곳이었다.

 

" 여기는... "

 

입을 열어보지만, 바짝 말라버린 입안에 목소리가 갈라졌다. 지예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기숙사로 돌아와 씻고 잠이 든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있는 이곳이 기숙사가 아니라는 건 잘 알 수 있었다. 낡은 판자로 조잡하게 이어 붙인 벽과 낡아서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쇠침대, 그나마 있는 거라고는 작은 탁상과 그 위에 올려진 타다 꺼져버린 양초 하나였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벽을 더듬어가며 발걸음을 움직였다. 겨우 찾은 문을 더듬어 문고리를 찾아 돌려보았다.

 

 

덜컥, 덜컥

 

" ...왜 안 열리지? "

 

 

숨을 삼키고 내뱉은 목소리는 갈라졌다. 문고리를 세차게 돌려도 헛돌기만 할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지예는 한숨을 내뱉고 고개를 돌렸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왔던 길을 다시 걸어갔다. 조심조심 혹여나 무언가에 걸려 넘어질지도 모르니까. 조금씩 발걸음을 움직였다. 낡아빠진 판자에서 나는 삐걱 소리가 소름 끼친다. 지예는 그저 빨리 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대체 자신이 왜 여기에 있어야 하고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생각해보지만, 답은 없었다. 답을 줄 사람도 없었다. 숨을 참고 뜨거워지는 눈시울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길 바랐다. 그때 문이 열렸다.

 

" 어라, 겁쟁이 아가씨께서 움직이고 있었어? "

" ... ...이현? "

" 후후, 표정이 좋네. "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현이었다. 지예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현의 어깨너머로 들어오는 빛으로 인해 역광이었지만 지예는 그의 표정이 마치 왜 불렀어? 라고 말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움직이던 발걸음이 멈추고 고개만 돌아간 채 이현을 보았다. 어째서, 그가, 여기에? 너무 놀란 나머지 입술만 벙긋거리고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이현의 손이 문을 닫으려 했다. 거기에 정신이 든 지예는 다급하게 외치며 문으로 달렸다. 문이 닫히지 않게 문고리를 잡는 순간까지 이현은 여유롭게 지예를 보고 있었다. 지예는 잠깐 본 그의 표정을 보고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을 이곳에 가둔 게 이현이 아닌가? 몸소 몸을 비켜주는 점까지 괜한 오해를 한 건 아닌지. 하지만 다음에 들려온 이현의 말에 지예의 착각은 산산이 조각났다.

 

 

" 안 돼...!! 문 닫지마요! "

" ...후후, 그렇게 달려도 아가씨는 못 나가. "

" ... 어? "

 

 

문 너머로 나가려고 하던 지예의 몸은 결국 나가지 못했다. 정확하게는 튕겨 나갔다.

지예는 튕겨진 탓에 바닥에 주저앉은 채 문과 이현을 번갈아 보았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자신이 지금 못 나가는 걸 이현은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지예는 이현에게 말을 걸어보는 것보다 다시 문으로 향했다. 하얀빛이 쏟아져 나오는 문 너머로는 나갈 수 없었다. 허공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겨우, 겨우 문이 열려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힘겹게 참았던 눈물이 조용히 지예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우는 그녀를 지켜보던 이현이 바짝 붙어 지예에게 얼굴을 드밀었다.

 

" ... 아가씨, 울어? "

" ... 흑, 왜... "

 

지예의 말은 시작했지만, 끝을 맺지 못했다. 왜 이러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이현의 입맞춤에 말이 묻히고 말았다. 벌어진 틈새 사이로 밀고 들어오는 혀가 진득하게 엉켰다. 지예는 점점 막혀오는 숨에 다급히 주먹을 쥐고 이현의 어깨를 쳐보지만, 그는 오히려 지예의 팔목을 잡고 밀어붙이듯 입을 맞췄다. 그의 혀가 입천장을 간지럽히듯 핥고, 치아를 고루 훑다 혀끼리 엉키며 타액을 주고받는 것으로 인해 지예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다. 모든 것이 두렵고 무섭던 상황이 180도 전환되듯 분위기가 바뀌었다. 고막이 터질 듯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입술이 떨어지자 두려워서 울던 지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다. 대신 첫 키스의 수줍음에 부끄러워하는 소녀만 남아있었다.

 

 

" 하아... "

" 읏, 에...?? "

" 아가씨. 그러게 내가 날 화나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

 

 

입맞춤이 끝나고 이현의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때리고 있는 지예를 두고서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이현과는 달리 지예는 자신의 첫 키스에 제 입술을 매만지며 멍때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현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이현은 주변을 둘러보며 조금 더 분위기를 바꿔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손을 비틀어 따버릴 수도 없고, 완전히 망가뜨릴 수도 없기에 이런 곳에 가두었다. 겁쟁이 현자인 만큼 겁에 질린 표정이 가히 볼 만 했지만, 그뿐이었다. 차라리 여기에서 짐승처럼 길들여서 더 귀여워해 줄 앞날을 상상하니 오싹해졌다.

 

 

" 아가씨, 이리 와. "

" ... 이현. "

 

지예는 지금 자신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분명 그는 자신을 이곳에 가둔 사람이고, 자신은 피해를 본 사람이 분명했다.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인식하고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지예는 자신에게 내밀어오는 이현의 손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매혹적인 마법처럼 느껴졌을 테니까. 마치 악마의 유혹같이 달콤하게. 지예는 마른침을 삼키고 이현의 손을 붙잡았다. 아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심하게 쿵쿵거려오는 심장 소리도 함께였다. 무섭지만 친해지고 싶었던, 그런 사람이 손을 내밀었다. 지예는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이현의 미소가 마치 달콤하지만 쌉싸름한 초콜릿 같다고 생각했다.

 

" 아가씨, 여기에 있으면 다른 놈들이 아가씨와 못 만나. 나는 그게 좋아. "

" 이현... 하지만... "

 

 

두 사람이 서로를 보는 시선에서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깊게 들여다보면 그 애정의 기본은 같지만, 어딘가 비틀려있었다.

서로의 짝사랑을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자신만이 상대를 사랑하고 있는 거로 생각했다. 지예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다는 말에 입술을 꾹 물었다.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이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사람 같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지예는 비틀거리다가 넘어질 뻔했지만, 중심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현의 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정작 그의 팔을 붙잡을 용기가 나질 않아 근처에만 있을 뿐이었다.

 

 

" 아가씨, 할 말이 있어? "

" 나 나가게 해줘요. "

" 그건 안 돼, 아가씨. "

 

 

나가게 해달라는 지예의 말에 이현이 몸을 돌려 지예를 보았다. 지예의 시야에 주변은 어두웠지만, 오언의 표정만큼은 잘 보였다.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소름 끼치고 어딘가 불안감을 자극하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 지예의 머릿속에는 이현이 자신에게 말했던 말 습관이 떠올랐다. 제 손을 비틀어도 되겠냐던 질문, 찌부러진 토마토처럼 되고 싶냐던 말, 방심하지 말라던 마지막 말. 지예는 증폭되는 불안감에 계속 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잘근잘근 물어대는 탓에 입술에는 핏물이 흘러내렸다. 이현은 그 모습을 보고 황홀감에 빠져든 사람처럼 표정을 지으며 지예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러주었다.

 

" 아가씨, 붉은 립스틱을 바른 것 같네. "

" ... 이현. "

 

말을 끝낸 이현이 상체를 숙여 지예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지예는 이현이 자신에게 입을 맞추어 올 때마다 강하게 고동치는 심장 소리 때문에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싫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현에게 들키게 될까 싶어서 마음을 졸여야만 했다. 조마조마한 마음도 잠시 갑작스럽게 싸늘하게 식어버린 이현의 표정과 한심하다는 시선이 지예에게로 박혀왔다. 지예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점점 가빠지는 숨이 목을 죄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씩 떨리는 손길로 이현의 손을 붙잡자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처음부터 싸늘한 표정은 짓지도 않았다는 듯 사랑에 빠진 소년 같은 표정에 지예의 동공은 흔들렸다. 혹시 이 모든 상황이 꿈이 아닐까? 눈앞의 상황도, 싸늘한 이현도, 이렇게 다정한 이현도 전부 꿈이었으면. 지예의 시선이 이현의 입을 향했고, 그의 입이 열렸다.

 

 

" ... 유감스럽게도 꿈은 아니야. 아가씨. "

" ...히끅, 히끅! "

 

 

마치 지예의 속내를 들추기라도 한 것처럼 이현이 답했다. 그의 말에 놀란 지예는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들썩거리는 자기 가슴 위로 손을 올리고 진정하려 애를 썼다. 이현은 그런 지예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상냥한 미소가 입꼬리에 걸쳐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계획이었다. 좁은 곳에 갇혀 어두운 곳에서 자신과 단둘이서 스킨십이라는 당근과 냉담함이라는 채찍 사이에서 그녀의 감정을 가지기 위한 계획. 모든 것이 완벽했다. 적어도 이현의 입장에서는. 손등에 짧게 맞춘 입맞춤을 뒤로 하고 이현은 고개를 들어 지예의 입술 위로 짧은 입맞춤을 다시 선사했다. 마지막 입맞춤이었다.

 

" 이현? "

" 겁쟁이 아가씨,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

 

지예는 마지막 입맞춤이 끝나자 끝없이 고동치는 제 심장에 이런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마치 질 나쁜 마법사가 사랑의 마법을 걸어버린 기분이 들었지만 당장의 두근거림을 외면할 수 없었다. 지예는 이현의 시선과 마주할 때면 계속해서 두근거려오는 심장과 뜨거워지는 얼굴 때문에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붉어진 홍조에 손등으로 열을 식히고자 대기도 했다.

지예가 마냥 부끄러워서 시선을 돌리고 있을 때 이현이 다시 가까워져 왔다.

 

" 아가씨, 언제나 내 곁에 있어. "

 

두 사람은 언제라도 금방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조금씩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워지고 지예의 팔이 이현의 어깨를 감쌌다. 지예의 고개가 추어올려지고 이현의 고개가 내려갔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물렸다. 그들의 근처에서는 달콤하고 쌉싸름한 초콜릿 향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