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끝난 평화로운 어느 날이었다.
아발론과 갈루스의 전쟁이 끝나고 누군가에게는 평화롭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고통스러운 나날이 이어지던 날이었다. 중앙 홀에서 라리엘을 두고서 사소한 다툼이 있는 그저 평화로운 날 말이다. 아발론의 로드와 갈루스의 황제는 각자 허리춤에 손을 올리거나 팔짱을 낀 채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사이에 놓인 라리엘은 둘의 눈치를 보며 난감해 하고 있었다.
" 저... "
" 아무리 생각해도 라리엘의 양육권은 내가 가지는 게 맞겠어. "
" 짐이 데려가는 쪽이 라리엘에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보나? 대적자. "
" 저기... "
작은 라리엘의 목소리는 두 사람의 말다툼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로드와 황제 카르티스는 협박 같은 대화를 하느라 라리엘의 기분을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두 사람의 사이에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던 라리엘은 금세 울상을 지어버렸다. 몇 시간 동안 통하지 않는 대화를 하며 서로를 노려보기만 하던 두 사람이 그제야 라리엘을 보기 시작했다. 울먹이는 라리엘의 곁으로 로드와 카르티스가 다가왔다.
두 사람의 목소리에는 걱정 어린 톤이 라리엘의 귓가에 닿았다.
" ... 엘. 신경 쓰지 못했다. "
" 자, 엘. 어디 볼까? "
" 군주님... 대제 폐하... "
난감한 듯한 두 사람의 목소리에 물기 어린 목소리로 라리엘이 답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라리엘의 모습에 어찌할 줄 모르는 카르티스와 속으로는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덤덤한 척하며 라리엘의 뺨을 감싸고 물기 젖은 눈가를 닦아주는 로드였다. 라리엘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보았다. 걱정이 담겨있는 둘의 시선에 라리엘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때 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프람이 팔짱을 낀 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검은 머리의 사내에게 말했다.
" 우리 지금 몇 시간째지? "
" ... 4시간. "
" 켁, 회의가 끝나긴 할까? "
" 그건 모를 일이지. "
검은 머리의 두 사람 외에도 다른 모든 이들이 세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분명 모든 회의를 마치고 남은 안건이었던 라리엘의 양육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고사하고 두 사람만 저렇게 신경전이었다. 정작 중요한 라리엘의 말조차 듣지 않고서. 그나마 중간에 끼여있던 라리엘이 울먹이기라도 하면 로드와 카르티스가 반응을 보이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되돌아갔다. 마치 지금처럼.
" ... 안 되겠군. 이렇게 여려서야. 엘은 역시 아발론에서 내가 양육하겠다. "
" 짐에게 필요한 존재이니 내가 양육하는 게 맞다. "
" 황제. 포기하도록 해. "
" 그대가 포기하지 그러나. "
" 아~ 두 사람 다! 이제 그만! 4시간째라고? 엘도 힘들어하잖아. 정작 엘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말이야! "
" 프람 경... "
" ... 내 실수다. "
" 짐의 실책이로군. "
" 그래서? 엘은 누구에게 키워지고 싶어? "
계속되는 말다툼에 발켄슈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로를 마주 보고서 으르렁거리는 울림에 라리엘은 움찔거렸다. 참다못한 프람이 두 사람의 중간에서 막아서며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로드에게는 "로드도 참, 엘이 겁먹잖아."라고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프람이 나서준 덕분에 말다툼만 하던 상황이 정리되고 모두의 시선이 라리엘에게로 향했다. 라리엘은 프람을 구세주처럼 보다가 오히려 난감한 질문을 던지는 그녀의 말에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로드와 카르티스의 뒤에서 윙크를 날리며 입 모양으로 "나 잘했지? 하하!" 말하곤 웃는 그녀가 얄밉게 느껴질 정도였다. 누구에게 키워지고 싶냐는 질문이 끝나자 로드와 카르티스가 동시에 손을 내밀었다. 마지막 어필이라도 할 심산인 건지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한 마디씩 내뱉었다.
" 그대는 여전히 짐에게 필요한 존재다. "
" 엘이 아발론에 남아줬으면 좋겠어. "
" 저는... "
두 사람의 진심이 담긴 말에 라리엘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둘 중 누구 하나라도 선택하기엔 두 사람 다 좋아하기에 섣불리 선택할 수가 없었다.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지만 마땅한 선택이 떠오르지 않았다. 복잡한 심경에 굴리던 시선이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는 발켄슈드에게로 향했다. 순식간에 창백해진 안색과 바짝 말라가는 입술,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는 몸에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던 발켄슈드는 깊은 한숨을 내뱉고 라리엘과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아 섰다. 그걸 지켜보던 프람이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 오~ 나선 적 없던 사람이 웬일이래? "
" 적당히 해. 난감해 하잖아. "
" 요한... "
" 윽, 양육권은 정해야 한다. "
" 알지. 근데 적어도 엘에게 생각할 시간이라도 주던가. "
" 그렇군. "
프람은 뒤통수에 손깍지를 낀 채 현재 상황을 지켜보았다. 흥미로움의 휘파람도 잊지 않았다.
라리엘의 앞에 선 발켄슈드는 인상을 찡그린 채 차갑게 일갈했다. 그저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에 간절하게 보긴 했지만 도와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던 라리엘은 흔쾌히 도와주는 모습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로드와 카르티스가 동시에 양육권에 대해 언급하자 발켄슈드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두 사람을 보며 필요한 말만 내뱉었다. 반박할 여지가 없었던 로드와 카르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결국 라리엘에게 조금의 시간을 주기로 했다. 비록 하루도 아닌 몇 시간일 뿐이었지만. 로드와 카르티스가 물러나자 안도의 숨을 내뱉은 라리엘이 발켄슈드의 소매를 살짝 붙잡아 당겼다.
" 고마워, 요한. "
" 딱히. 미루는 게 전부니까. "
" 그래도... 그게 어디야. "
" ... 갈 사람은 정했고? "
" 아직... "
살짝 미세한 미소를 지어주며 고마움을 말했다.
여전히 냉소적이고 무뚝뚝한 반응을 보이는 발켄슈드였지만 익숙하다는 듯 라리엘은 답했다. 갈 사람은 정했냐는 질문에 라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지였다. 어릴 적 자신을 거두어준 군주님에게 갈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 곁에 있어 주기로 약속한 폐하에게 갈지. 사실 적시로 따져보면 군주님에게 가는 것이 맞지만 마음은 계속 다른 쪽을 원하고 있었다. 고민때문에 어둡게 가라앉은 표정을 알아차린 발켄슈드가 라리엘의 옆 의자를 당겨 앉고는 책상을 엄지로 두들겼다.
" 보니까 이미 정한 것 같은데. "
" 어? 아, 아니야. "
" 아니긴. 네 마음이 가는 대로 선택해. 어느 쪽을 선택하든 두 사람은 네 의견을 존중해 줄 테니. "
" 아... "
여러 고민을 하며 생각하던 걸 마치 들여다본 것처럼 말하는 발켄슈드의 말에 라리엘은 잠시 멍해졌다.
누구를 택할지 고민하면서도 반대쪽 사람이 제 선택에 상처받을까 그게 가장 큰 고민이었다. 그것을 몇 마디 나누지 않고 표정만 읽은 상태에서 발켄슈드가 정곡을 찔러버린 것이었다. 라리엘은 짧은 침음을 남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하게 웃지만 두 사람을 떠올리며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발켄슈드와 라리엘을 지켜보던 프람이 불쑥 말을 꺼냈다.
" 엘, 걱정할 거 없어! 누구에게든 네가 가고 싶은 사람을 택해. "
" 네, 프람 경. "
" 그나저나 당신은 엘을 과보호하네? "
" 과보호? 누가 누굴 과보호한다는 건지 모르겠군. "
해맑은 미소로 안심하라는 듯 어깨를 토닥여오는 프람의 손길에 라리엘은 조금 더 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사이 프람이 과보호라는 말을 꺼내며 발켄슈드에게 말을 걸자 발켄슈드는 인상을 찡그리고 프람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전기 스파크가 튀는 듯한 상황이 되어 버리자 당황한 라리엘이 두 사람을 말리기 시작했다. 난감한 듯 식은땀을 흘리지만, 아까와 다를 것 옶ㅇㅗㅄ는이 되어버리자 라리엘라리엘은로 갈지 마음을 먹었다.
.
.
.
" 선택의 시간이 왔군. "
" 엘. "
" 저는... "
시간이 흐르고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라리엘에게 다가왔다.
라리엘은 자신의 앞에 뻗어오는 두 손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손들의 주인을 보았다. 자신을 선택하리라는 믿음을 간직한 시선에 절로 마른침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 몇 분의 시간이 더 흘렀을까, 라리엘은 정했다는 듯 고개를 들추었다. 적막 속에서 모두의 시선이 라리엘에게 향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리엘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카르티스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로드는 속으로 실망했지만 그것이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고 숨겼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뜻을 비추었다.
" 저는 대제 폐하... 아니, 아버지와 함께 하겠어요. "
" 짐을 선택했군. "
" ... 그것이 엘의 의지라면. "
" 축하해, 엘! 드디어 선택했네! 하하! "
라리엘은 카르티스를 부르는 호칭을 바꾸어 말하며 웃었다. 그러자 카르티스가 라리엘의 손을 소중하다는 듯 꽉 잡고 그녀를 슬쩍 자기 쪽으로 안았다. 그녀에게 내밀어졌던 로드의 손이 거두어지면서 프람이 라리엘에게 다가와 축하를 건네주었다. 묵묵히 뒤에서 지켜보던 발켄슈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리엘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뜻이었다. 모두가 축하해 주는 분위기 속에서 라리엘은 웃었다.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나며 카르티스를 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얽혔다.
" 잘 부탁해요, 아버지. "
" 짐이 그대와 죽을 때까지 함께 하도록 하겠다. "
싱긋 웃는 라리엘의 미소에 화답하듯 카르티스는 눈으로 웃어주었다. 라리엘은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자신을 거두어 주었던 로드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의 애정을 그녀에게 답해주지 못한 미안함도 포함되어 있었다.
" 고맙습니다, 군주님. "
" 엘은 착하구나. "
" 엘은 착하지~ 이때까지 함께한 것만 봐도 말이야! "
로드의 미소에 라리엘은 작게나마 안심했다.
프람이 곁으로 다가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저러다가 한 대 맞거나 꾸중을 듣지 않을까 했지만 지금 뷴위기 속에서 그녀가 혼날 것 같지는 않았다. 라리엘은 모두의 가운데서 웃다가 시선을 돌려 발켄슈드를 보았다. 손으로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도록 그만이 볼 수 있게끔 손으로 입을 가려내고 뻐끔거렸다.
" 고마워, 요한. "
그녀의 입 모양을 읽은 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것으로 답했다. 라리엘의 양육권 다툼은 그녀의 선택으로 인해 카르티스가 최종적으로 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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