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릴리
휘파람이 들려왔다.
그 순간 잠을 자고 있던 승대가 악몽이라도 꾼 듯 사색이 된 채 벌떡 일어났다. 승대는 며칠 전부터 계속 반복되는 꿈을 지독하게 받아들였다.
지독한 이유는 항상 그 끝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억이 흐릿했지만, 곁에 있는 누군가를 은애하고 사랑하고 있었다. 이 감정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고 또 미묘한 감정이었다.
꿈에 빠질수록 점점 그 꿈에 동조되는 기분이었다.
휘파람이 불어올 때면 꿈속의 남자가 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상대가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 하... X발... 이게 대체 무슨 감정이지? "
승대는 자꾸 떨어지지 않고 끝을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는 미련한 감정에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 아닌데, 꿈에 동조되어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너무 싫었다. 인상을 찡그렸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질척거리고 진득한 이 감정은 애원, 서러움, 그리움, 애정, 집착까지 있었다. 복잡하게 뒤섞인 감정이 끝자락에 머문 채 승대는 등교 준비를 했다. 복잡하게 뒤섞인 감정이 끝자락에 머문 채 승대는 등교 준비를 했다.
복잡한 감정을 뒤로 하고 셔츠와 바지를 입은 후 넥타이와 마이까지 걸쳤다.
책상 옆에 있는 가발을 매고 등굣길에 나섰다. 책상 옆에 있는 가발을 매고 등굣길을 나섰다. 그리고 학교에서 승대는 마치 누군가 망치로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수업 중에 문득 떠오른 얼굴이 그 이유였다.
정말 아무 관계도 없이 역사를 수업하다가 진재유의 얼굴이 떠올랐다.
" 재유... "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수만 가지의 감정들이 얽히고설켜 간다.
먼저 지상고에서 떠나온 사람은 자신이었는데, 다시 찾게 될 사람도 자신일 줄 꿈에도 몰랐다. 재유를 떠올리자, 누군지 알 수 없었던 꿈속의 상대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먹구름이 낀 듯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얼굴이 하나하나 새록새록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승대는 눈 안쪽에서부터 무언가가 울컥 치솟으며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울분? 격함?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눈물을 만들었다.
눈 끝에 고인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흘러내렸다.
너였다. 진재유, 네가 내 꿈속의 그 사람이었다. 그토록 그립고, 사랑하고, 애원하게 되던 상대. 그게 바로 진재유 너였었다.
" ... 진재유. "
꿈속의 상대가 재유라는 사실을 깨달은 승대는 곧바로 부산으로 향했다.
얼마 없는 용돈으로 무작정 부산까지 찾아와 자신이 떠났던 지상고에 도착했다. 무슨 생각으로 내려온 건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 겨울이었던 탓에 코끝은 새빨갛게 물들었고, 뺨은 미친 듯이 얼어가고 있었다.
숨을 몰아쉴 때마다 뿌연 연기가 나왔다가 흩어졌다. 문득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다가 재유, 네가 나를 반겨주지 않으면 어쩌지. 그 생각에 걸음이 느려졌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고, 콧등이 찡그려졌다.
빨리 걷다가 천천히 걸어가는 발걸음은 어느새 완전히 멈춰버리고 말았다.
" 니 만나고 여까지 와있는데. "
" 으응, 재유 니 기다린다고 여 있지. 언제 마치는데? "
" 아직 모르겠는데. 더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
" 그라모 기다리지, 뭐. "
" 밖은 춥다. 안에서 기다리라. "
" 어? "
" 와? "
" 아, 아니. 익숙한 얼굴이 보이가... "
승대의 눈에 들어온 건 재유와 한 여학생이 다정다감하게 붙어있는 모습이었다.
그 여학생은 자신이 지상고에 있을 때 재유와 함께했던 사람이었다. 그와 동시에 승대의 꿈속에서 항상 재유와의 사이를 방해하던 여자이기도 했다.
승대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고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고스란히 남을 정도로 꽉 쥔 탓에 절로 파르르 떨렸다. 승대의 눈은 어느새 붉은 핏줄까지 올라올 정도로 붉게 물들었다.
그때 어디선가 들어봤던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휠릴리
승대는 눈앞이 어지러웠다. 공간이 어그러지는 듯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여학생이 자신을 알아보기 전에 후다닥 벽 뒤로 숨었다. 자신이 왜 숨어야 하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두 사람의 앞에서 초라해진 자신이라던가, 괜히 무슨 사이인지 물어보고 싶어지는 찌질함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익숙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휠릴리
휘청, 몸에 힘이 빠져나간 것처럼 휘청거렸다.
마치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서서히 주저앉았다. 승대는 허공을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꼴을 보자고 자신이 부산으로 내려온 게 아니었는데.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리움과 애절함, 사랑이 감정을 차지했다면 지금은 정반대였다.
질투와 집착 그리고 고단한 감정이 온몸을 장악한 듯 느껴졌다. 승대는 꿈속의 이야기와 지금이 교차하여 현실을 인지할 수 없게 되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 우욱...!! "
한 번 역하게 올라오는 구역질은 멈출 줄 몰랐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아버리고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미친 듯이 흘러서 앞을 제대로 보기도 힘들었다. 승대는 비틀거리며 힘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마치 환상 속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비틀거리다가 주저앉고, 힘겹게 일어나서 또 비틀거리며 걷기를 반복했다. 주변 사람들은 승대를 보며 부러 발걸음을 돌리기도 했다.
하아, 승대가 깊은숨을 내뱉자 뿌연 입김이 쏟아져나왔다가 사라졌다.
승대는 자신의 입김을 잡기 위해 허공에 손짓했다. 잡히지 않는 모습에 아쉬우면서도 그립고, 또 매달리게 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때 꿈에서도 들었고, 어릴 때도 들었고, 떠나기 전에도 들었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역시... 야! 임승대!! "
" ... 잼민이? "
모든 일은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여학생의 말이 계속 신경 쓰였던 재유는 안으로 여학생을 데려다준 다음 곧바로 걸음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학교 주변을 둘러보다가 익숙한 뒤통수에 승대를 불렀다.
재유의 목소리에 승대가 고개와 몸을 돌렸다.
승대는 재유의 목소리가 마치 꿈속에서 다정하게 자신을 불러주던 모습과 겹쳐 보이면서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꿈결에 머무는 사람처럼 화사하고 또 화려하게.
재유가 승대에게 다가가려고 한 순간 승용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달려와 승대를 들이박았다.
쾅, 큰 소리와 함께 승대의 몸이 크게 떠올랐다가 아스팔트 바닥에 그대로 꽂혀버렸다. 승대는 점점 흐릿해져 가는 눈앞에 겨우 재유를 보며 흐릿하게 웃어 보였다.
귀에서 강한 이명 소리가 들려와 재유의 목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내가 잊지 못해서, 널 잊을 수가 없어서.
잊으려고 매번 노력해도 그게 잘 안되더라.
승대는 재유에게 무언가 말하기 위해 입술을 뻐끔거렸다.
" 임승대! 야! 정신... 임...!! "
" 잊... 려고 해도... 그게... 안... 더라... "
" 야! ...감지... 마! 정신, 야! "
승대의 눈에는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와 눈물을 흘리며 애타게 무어라 말하는 재유의 모습이 담겼다. 비록 무슨 말을 건네는지 몰라도 분명 재유라면 정신 차리라고 할 게 분명했다.
머리 쪽에서 뜨거운 액체가 느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희미해져 가는 시야와 촉감마저 느껴지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완전히 눈을 감았다. 승대가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푸른 초원 위에서 해맑게 웃으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재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목소리가 직접적으로 들리지 않고, 뻐끔거리는 입술 뿐이었지만 승대는 재유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차렸다.
[ 임승대! 빨리 와! 왜 이리 늦었냐? ]
" 미안, 잼민아. 내 마이 늦었제? "
[ 잘 알믄 다행이다. ]
" 내가 니 찾는다꼬... 길을 너무 돌아가가 그릏다. "
[ 만다꼬 그리 돌아가는데. 바로 니 앞에 있는데. ]
" 그러게나 말이다. "
승대는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주는 재유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저 보기만 해도 좋다. 네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네가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해도 그저 곁에만 있고 네게 너를 보여주기만 한다면 다 좋다.
네가 다른 사람과의 행복이 나를 불행하게 한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휠릴리
다시 익숙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승대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자 재유가 양손으로 승대의 뺨을 감싸 자신을 보게 했다. 승대의 시선에는 다시 재유가 담겨졌다.
[ 니 자꾸 어델 보노? ]
" 그러게. 니가 여 있는데 자꾸 왜... "
[ 됐다, 마. 이리 온나. ]
승대는 그렇게 재유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향했다.
그 끝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재유와 함께라면 좋았다.
.
.
.
사고가 일어난 당일, 재유는 자신이 무슨 정신으로 119를 불렀고 또 구급차에 올라탔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중환자실이었으니까.
분명 횡단 보도 앞에서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던 승대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한데.
그런데 지금의 승대는 중환자실에 누워 머리에는 붕대를 두르고 환자복을 입은 채 산소호흡기를 끼고 아슬아슬한 심장박동수를 보이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승대의 모습에 재유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 재유야... 니 괘안나? "
" ... 임승대... 와 눈을 안 뜨는데... "
" 재유야... "
지상고의 친구들이 소식을 듣고 한 걸음에 달려와 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장도고 학생들도 부산까지 내려와 승대의 병문안을 하러 왔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어도 재유의 눈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재유의 눈에는 그저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눈을 감고 있는 승대의 모습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재유는 의사에게서 승대가 식물인간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고 흐느끼듯이 서럽게 울었다.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지만, 돌아오길 바라는 사람은 전혀 답을 주지 않았다.
휠릴리
들어본 적 없지만 어딘가 애처롭고 서러워 보이는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재유의 눈에 산소호흡기를 낀 승대가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재유는 승대와의 이별을 인정할 수 없었다. 마치 꿈이라도 꾸듯이 잠든 것 같은 승대가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그를 놓아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도 이미 이별을 해야 하는 상태에서 재유 혼자만이 미련하게 붙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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