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로즈 타입

[HL/드림/230804] 빌리가 편지를 쓰기까지

나비의 보관함 2025. 2. 3. 13:26


빌리는 제가 힘겹게 만들었던 음식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음식을 만들어 그 사람에게 가져다주길 반복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더라, 찰나의 순간에 스쳐 간 생각은 꽤 긴 고민의 시간을 안겨다주었다.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음식이 담긴 냄비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시선은 오로지 음식에 꽂힌 채 몸은 자연스럽게 의자를 빼내 앉았다. 턱까지 괴어가며 고민에 빠졌다. 처음이 언제였더라. 주변을 서성거렸을 때? 미지의 반요인 그를 만났을 때? 아니었다.

15년 만에 처음으로 재회하게 된 형인 디에고를 만나고 나서였다.

아마 그때부터 이야기가 진행된 게 아닐까 싶다. 기공방에 머물고 있을 때, 쫓겨오듯 이슈가르드로 왔던 제 형. 어색하긴 했지만, 형제는 형제였다.

빛의 전사인 형과 함께 활동하다가 보이드 공간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 빌리? "

" ... "

 

 

미지의 공간에서 처음 본 미지의 반요인 제로에게 호기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그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고, 미지의 존재였다.

사람이란 자고로 미지의 것을 보면 두려워하거나 궁금해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아무래도 저는 후자인 쪽이었던 모양이었다. 다른 이들은 미지의 존재에 겁을 먹었지만, 유독 저만 달랐다. 호기심이 생겼고, 그 호기심이 관심으로 번져 근처를 맴돌았다.

감정과 감각이 무뎌진 그를 보며 더 큰 호기심이 생겨났다.

보이드 공간으로 가서 만났던 그날 이후로 계속 주변에만 맴돌았었다. 그러다 디에고의 파티에 합류하게 되면서 궁금하던 것들을 풀어나갔다.

가장 놀랐던 건 음식을 먹는 법도 몰랐던 그의 모습이었다.

 

 

" 음식을 먹는 법도 모른다고? "

" 그래... 모른다. "

" 허... 그러면 내가 도와줘도 괜찮을까? "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상대가 맛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빌리가 당황한 시선으로 제로를 보며 되물어 보자, 제로는 별 반응이 없는 얼굴로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가 찬다는 듯 숨을 내쉬고는 도와줘도 되냐고 물어오자, 답을 주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빌리는 그날 이후로 제로에게 음식을 잔뜩 만들어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처음으로 음식을 만들어서 건네주었던 날, 빌리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녀가 맛을 느낄 수 있도록,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을 잔뜩 만들었던 날이었다. 항상 대화할 때마다 묵묵부답 수준으로 말수가 적었던 제로가 처음으로 답을 해주었다.

 

 

" 네가 가져다준 음식이 맛있었어. 고맙다. "

" 어, 어? "

 

 

고맙다는 말을 듣는 순간 빌리는 제 얼굴이 뜨거워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점점 달아오른 얼굴의 온도를 체감상으로 느낄 수 없을 정도가 되자 그는 말을 더듬거렸다. 빌리가 말을 더듬거리자, 제로는 신경 쓰이는 듯 시선을 주었지만,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빌리는 발걸음을 옮기는 제로의 뒷모습을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시선을 내려 빈 그릇을 보니 심장이 크게 쿵쿵 울려왔다. 귓가에 때려 박히는 듯 세차게 울리는 심장 소리는 몸에 문제가 생겼나? 싶을 정도로 크게 들려왔다.

찌릿하고 저리는 감각까지 더해지자, 빌리는 제가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자각했다.

그날 이후 자신의 마음을 자각한 뒤 하루하루가 전전긍긍이었다. 제로의 앞에만 다가가면 크게 울리는 심장 소리에 혹여나 그가 듣지 않을까, 싶은 두려운 마음도 컸고 제발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가장 큰 건 제로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저로 인해 느끼길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 오늘도 고맙다. "

" 어, 어... 별거 아니야. "

 

 

매일 음식을 한껏 가져다줄 때마다 모든 음식을 다 먹어 치우고 나서 건네주는 감사의 말.

그 말 한마디가 빌리를 설레게 했다. 언젠가 제로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그의 곁을 맴돌겠다는 다짐까지 하게 되었다.

빌리는 과거를 떠올리던 걸 멈추고 눈앞에서 식어가는 음식을 보았다.

정성을 들여 만든 제 음식을 제로가 맛있게 먹어줄 때면 항상 고마움과 설렘이 같이 찾아왔었다. 그가 맛을 알아갈 때마다 제가 노력한 것이 쓸모없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한 번 시작되고 나니 멈추질 못하자 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짙은 한숨도 함께 흘러나왔다. 복잡한 심경을 대변할 수 있을 만한 게 없었다. 그가 제 마음을 알아주기를 마냥 기다리는 것도 체력이 닳는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무언가를 해보기 전에는 변하는 게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뭐라고 해보지 않으면... "

 

 

무어라 중얼거리던 빌리는 냉큼 일어나 제 방으로 들어가 종이와 잉크, 펜을 꺼내왔다.

테이블 위로 종이를 올려두고 마른침을 삼켜냈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종이와 펜을 들고 온 건 좋았지만, 막상 뭘 하려고 하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참 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을까, 도통 떠오르는 게 없었다.

제 마음을 전하면서도 그가 전혀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게 하기 위한 방법이란 없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어 버리고 말았다.

잘근대며 씹어대고 있을 때, 펜에 잉크를 묻히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첫 말은 별 보잘것없는 안녕이었다.

 

 

" 이게 아닌데... "

 

 

빌리는 편지를 쓰다 말고 멈추고는 제 머리를 움켜쥐었다.

테이블 위에는 어느새 여러 장의 종이가 한껏 구겨진 채 뒹굴고 있었다. 제로에게 주기 위해 만들었던 음식은 이미 다 식어버린 상태였다.

그는 음식이 식어버린 건 안중에도 없는지 적고 있던 편지를 구기며 어깨너머로 날려버렸다.

구겨진 편지가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다가 몇 번 구르고 나서야 멈추었다. 테이블 위로 새 종이를 꺼내 올린 뒤 다시 펜촉에 잉크를 묻히고 적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계속 반복되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빌리였다.

제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편지에 몰두하고 있었다.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무슨 주제로 이어 나가야 할지 몰라 막막하기만 했다.

빌리는 펜을 잠시 내려두고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시간은 어느새 저녁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아차 싶었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어버린 음식을 다시 데우고서 제로에게로 향했다.

 

 

" 제로, 미안. 다른 걸 하느라 시간이 늦은 줄 몰랐어. "

" ... 괜찮다. "

" 여기, 오늘은 다른 걸 만들어 봤어. "

 

 

비록 식었다가 다시 데워진 음식이긴 했지만, 제로는 여전히 맛있다고 해주었다.

그는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고 전해주었다. 빌리는 그 모습에 오늘은 기필코 그를 향한 제 마음이 담긴 편지를 작성하겠노라 다짐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빌리는 빈 접시를 가지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릇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뒤 다시 새 종이를 꺼내 펜을 집어 들었다. 잉크를 묻히고 마음을 써 내려갔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꽉 막혀있던 글들이 술술 써 내려져 갔다.

못다 한 말을 담아, 진심을 담아, 사랑을 담아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간결하게 처음 만났던 그 시간을 이야기했고, 복잡한 제 심정을 꺼냈다. 자신이 반요라고 생각하는 그를 떠올리며 제가 느꼈던 것들을 담아냈다.

 

 

" 이런 비유를 하면 넌 모를지도... "

 

 

편지를 써 내려가다가도 비유해도 그는 모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껏 써 내려갔던 종이를 구기고 새 종이를 꺼내 들었다. 다시 새롭게 써 내려갔다. 필요 없을 수도 있겠지만, 알렉산더의 이야기도 적었다.

빌리는 편지를 쓰면서 제로를 떠올렸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처음 만났던 감정이 떠올랐다. 신기하고 호기심을 불러오던 제로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13세계가 아닌 그날의 기억도 담아냈다.

휘갈겨지는 펜촉에 맞춰 잉크가 빠르게 글씨로 만들어 갔다.

악몽 같던 그날의 기억과 제로를 만났던 이야기를 적었다. 비교하기 싫었지만, 강하고 멋진 모습에 절로 저와 비교가 되던 그 모습을 기억해 냈다.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빌리의 입꼬리가 꿈틀거리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 후... 그리고... "

 

 

반요에 대한 이야기, 알렉산더의 이야기, 보이드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새 종이를 찾게 되었다. 종이를 찾아 더듬거리는 손길은 종이가 없다는 걸 깨닫고서야 멈추었다.

빌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새 종이를 가지러 갔다.

종이 뭉텅이를 가지고 오면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종이를 끄다가 구겨버렸는지 알아차렸다. 허탈하게 웃었지만, 그 속에는 그를 향한 마음이 크다는 걸 알려주었다.

다시 자리에 앉아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마음을 털어놓다 보니 고백 편지라고 하기엔 애매한 비속어가 들어가기도 했다. 빌리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계속 이어서 써 내려갔다. 간결하면서도 담백하게, 좋아하는 마음을 담았지만, 상대가 부담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만 썼다.

빌리는 편지를 쓰면서도 제가 욕심이 아주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끄적거리던 펜을 멈추고 턱을 괴며 창밖을 보았다. 밖은 어느새 껌껌한 밤이 된 이후였다.

 

 

" 차라리 내가 음유시인처럼 말이라도 잘했더라면... "

 

 

그랬더라면 투박하지 않고 부드럽게 너에게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사랑이라는 감정을 바로 알려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라는 게 복잡하고 또 단순해서 글로 설명하기도 애매했고, 마음을 보여줄 수 없어서 더 힘들었다.

빌리는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서 펜을 잡았다.

멈춘 편지를 이어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술술 풀리듯 써 내려가던 편지는 다시 멈춘 상태가 돼버리고 말았다. 빌리는 펜을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며 생각에 잠겼다.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제로가 너무 보고 싶었다.

상상이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제 마음을 담아낸 편지를 제로에게 건네는 걸 생각해 보았다. 여전히 변함없는 표정의 그가 편지를 읽어내리는 모습은 상상했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제 편지를 보고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 탓에 전해줄 거라고 다짐했던 마음은 한풀 꺾여 보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해졌다.

마음을 담을 글을 써 내려갈 때마다 그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깨닫고 있는 것 같았다.

 

 

" 하... "

 

 

펜을 내려둔 빌리는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속이 복잡해진 탓인지 짧은 머리카락을 북북 긁어댔다. 편지를 써 내려갈 때마다 제로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무표정한 모습과 아름다운 외모, 강하고 멋있는 모습까지.

거기에 더해 제가 음식을 들고 갈 때면 먹으면서 미묘하게 달라지는 모습까지 더해졌다. 

빌리는 씰룩거리는 입가를 막으며 더 복잡해진 심정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가 생각했을 때, 이 정도로 사랑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상체를 뒤로 기울인 채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

천장을 보아도 제로의 모습이 비쳤다. 빌리는 화들짝 놀라며 제 뺨을 가볍게 찰싹거렸다. 상당히 중증이라는 걸 스스로가 깨닫는 순간이었다.

 

 

" 미치겠다... 떠나질 않네. "

 

 

머릿속에서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는 제로의 모습에 이젠 헛웃음까지 나기 시작했다.

빌리는 다시 펜을 붙잡고서 이런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써 내려갔다. 마지막은 이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걸로 그가 알아차려 준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다 쓴 편지를 정성껏 봉투에 넣어 밀랍으로 봉했다.

두툼해진 편지를 보니 복잡했던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빌리는 편지에 짧게 입을 맞추며 어딘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입맛을 다시면서 중얼거렸다.

 

 

" 내 마음이 네게 닿기를... "

 

 

편지를 건네줄까 말까 고민을 계속 반복했지만, 정해진 건 없었다.

이제는 죄 없는 봉투를 한껏 노려보며 고민에 잠겼다. 제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쓰면서 다시 감정을 깨달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어떻게 전해야 할지 앞이 깜깜했다.

그렇다 보니 전하지 않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편지에는 죽어도 편지를 전할 리 없다고 말하기까지 했으니 괜찮지 않을까 하고 자기합리화하기까지 했다. 고개를 저으며 그래도 제 마음을 전하고 싶어 쓴 편지를 전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두 마음을 번갈아 가며 고민했다.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이 되었음에도 빌리의 고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빌리는 제로가 보고 싶어졌다.

 

 

" 보고 싶다, 제로... "

 

 

빌리는 제가 말해놓고서도 흠칫 놀라며 저도 웃기는지 낮게 웃었다.

제가 정말로 제로를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