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입 성향에 따라 BL/GL/HL 나뉠 수 있습니다.
모험가는 라하르트와 연인 사이가 된 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비록 라하르트가 나에게 해주는 것처럼 제 사람들 한정적으로 다정하고 이해심 넘치는 모습을 보이는 건 그의 천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내가 이걸 하고 싶다고 부탁하면 별다른 말 없이 그러지! 라고 말하며 들어주었고, 저걸 해달라고 요구한다면 자네가 원한다면 기꺼이. 라며 그 요구를 해주기도 했다. 어쩌다 한 번. 실수하기라도 하면 그저 웃으면서 하하! 자네도 이럴 땐 인간미가 보인다며 호탕하게 웃으며 넘어갔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서 내가 매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입가에는 늘 웃음이 머물렀고, 시선이 항상 그에게 머물러있었다. 이 벅차도록 차오르는 감정 하나하나가 사랑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곁에 더 남아있었고, 그에게 관계를 가지자 청했으며, 라하르트에게 하고 싶다는 말을 건넸다. 그럴 때마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은 답을 주었다. 원한다면 기꺼이. 돌아오는 대답에 의구심이 드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것이 착각일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함께 한 시간 속에서 의문이 하나씩 싹 트기 시작했다.많은 시간을 함께 하면서 연인으로 지냈고, 그 긴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육체적인 관계까지 이어졌다.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닐 텐데도 라하르트는 여전히, 언제나, 항상 과거에 머무르고만 있는 사람 같았다.
" 라하르트... "
그의 이름을 낮게 읊조려보지만 갑갑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그러다 문득 한 번 꼬리를 물기 시작한 의문은 끝없이 이어져갔다. 쉴 새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과 의문이 이어졌다. 멈출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연인이 되기 전과 지금의 상황에서 다른 점이 있던가? 라하르트가 먼저 입맞춤을 바라고 제게 원하던 적이 있던가? 침대로 먼저 이끌어 저에게 요구했던 적은? 먼저 달아올라 하자고 한 적은 있던가? 제게 다가와 짧은 입맞춤 마저 해준 적이 있던가.아니, 라하르트는 연인이 된 이후에도 나에게 먼저 무언가를 요구해왔던 적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그렇게 시작된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의 끝은 하나뿐이었다. 라하르트는 나에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준 적이 없기에 나는 그에게서 사랑이라는 말을 들은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무언가 뒤통수를 강하게 내려친 기분이 들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서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한 번 깨달아버린 사실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던 그 질문들이 멈추었음에도 복잡하고 갑갑한 심정은 여전했다. 계속되는 고민거리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입술을 잘근거리며 씹었다가 비릿한 피 맛을 보기도 했다. 잔뜩 찌푸려진 인상은 좀처럼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내가 그에게 했던 행동들이 떠올랐다. 항상 자신이 먼저 그에게 선물을 건네주며 마음을 바랐고, 그에게 연주를 들려주며 마음을 전하고, 매일매일 찾아가다 못 버텨 사랑을 고백한 것도 저였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끼고 있었다.
" 이건... "
그렇게 깊어져 가는 생각은 한없이 곤두박질치듯 아래로 내려갔다.더 없이, 그 깊이가 어느 정도가 되는지도 모르는 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암울해진 생각 속에서 새로운 고민이 나타났고, 그 역시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내가 그를 사랑한 만큼 라하르트 역시 나를 사랑하고 있을지, 그의 반응을 얻어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고민했다. 친한 사람에게 부탁해 더 친한 척하며 스킨십을 하면서 질투심이라도 유발해봐야 하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고백받는 모습을 보여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자 줄줄이 이어지는 질문의 끝은 없었고, 답은 더더욱 알 수 없었다.라하르트, 그의 감정이 진심이든 아니든지 간에 스스로 생각한 대로의 행동을 실천한다면 그건 분명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불쾌한 행동이 분명했다. 이런 생각들을 지우기 위해 고개를 내저어댔다. 하지만 이미 깊어진 고민은 멈추지 않았다.밑이 빠져버린 둑에 계속해서 멈추지 않는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기분이었다. 그 정도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머릿속에서 한 번 떠오른 의구심은 멈추지 않고 계속 떠올랐고,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어. "
이렇게 그에게 매달리는 건 나 하나뿐인 것만 같아 생각할 수록 비참해지기만 할 뿐이었다.계속 이어지는 질문에 결국 포기하고 그냥 그에게 찾아가 대놓고 말하기로 했다. 우리 잠시 시간을 가지자고 말하러 가는 길에 끝없는 고민을 다시 이어갔다. 어떤 말을 해야 그가 상처받지 않을까, 이런 말을 하러 가는 길에도 라하르트를 걱정하는 생각이나 하는 제 모습이 어딘가 씁쓸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기사단에 도착해 그를 찾자 투구를 쓰고 있던 라하르트가 나를 보았다.나를 발견하자마자 다가와선 습관처럼 쓰고 있던 투구를 벗고 땀이 흐르는 얼굴임에도 시원한 미소를 짓는 얼굴로 연인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 그에게 잠시 시간을 가지자는 말을 건네야만 했다.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입술 사이로 풀이라도 붙은 것처럼 옴짝달싹 못 했지만, 말해야만 했다. 그의 애정을 생각해서, 내가 생각하는 그를 생각해서라도. 이대로 계속 의심만 하게 된다면 라하르트에게도 좋지 않을 테니까. 그런 표정 하나만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도 미안한 마음이 들게 되는 건 여전히 그를 사랑해서겠지.그러니 용기를 내 짧고 간결하게 말하기로 했다. 오기 전에 했던 어떤 말을 해야 그가 상처받지 않겠느냐는 소용없었다. 라하르트의 앞에서는 다른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그저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이 말이 되었다.
" 라하르트, 우리... 잠시 시간을 가질까. "
" ... "
그 말을 듣자마자 시원하게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다.점점 굳어지던 그 얼굴은 이내 완전히 정색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는 게 유지되었다. 라하르트에게 자세한 설명을 하기 위해 입을 떼어냈다.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하려고 할 때, 라하르트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그 순간 뇌리를 스쳐가는 한 가지 생각이 강타했다. 제 한 마디에 눈물까지 보이는 그의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제 목소리보다 더 먼저 반응을 보이는 눈물에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작은 눈물을 뚝뚝 떨구는 그 모습에 적잖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너무 당황한 나머지 스스가 내뱉었던 말도 떠올리지 못한 채 라하르트에게로 성큼 다가섰지만, 그는 여전히 소리 없이 눈물만 조용히 떨구고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해 제 옷 끝 소매를 끌어다 라하르트의 눈 아래로 흐르는 눈물을 훔쳐내 닦아주었다. 제 손길을 다정하다 느꼈던 모양인지 라하르트의 표정은 묘하게 구겨져 갔다. 복잡하고 미묘한 심정을 그대로 나타낸 듯한 그의 표정에서 생각을 어렴풋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 또한 어떤 표정으로 그를 보았는지 느꼈지만 그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생각하던 라하르트는 평소와는 달리 말까지 더듬어가면서 답을 해주었다. 그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흔들리는 눈동자와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방울이 그대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쩐지 심장 언저리가 따끔거려왔다.
" 내, 내가 고쳐보겠네. 잘못, 한 게 있다면, 고쳐볼테니. 그 말, 거두, 거두어주게. "
" 라하르트... "
파르르 떨리는 입술과 뚝뚝 떨어지는 맑은 눈물 속에 나를 담고 있는 그의 시선, 일그러진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말을 거두어 달라는 그의 말을 들은 이후 가지고 있던 생각이 바뀌었다. 라하르트 그는 기사였다.그냥 연애의 연 자도 할 줄 모르는 뼛속까지 기사인 사람이었던 거였다. 그걸 깨닫자 다른 사실 또한 떠올랐다. 두 번째 삶을 함께 시작하게 되면서 이어가고, 만들어간 것이 전부 나였기에 라하르트는 사랑이라는 단어 이상의 의미로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던 거였다.그에게 있어 연모와 동경은 같은 선에 존재하고 있으며, 주군을 따르는 것 역시 그와 비슷한 선상의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연애를 할 줄 몰랐던 기사였기에 자신에게 있어 최대의 배려와 애정을 주려 했던 것이었다는 걸 과거의 편린에서 그의 행동을 보고 떠올렸다. 애절하게 떨려오는 눈동자에는 애원이 담겨 있었다. 놓지 못한다는 의미인 건지, 어떤지는 몰라도 그는 지금 조급해 보였다.
" 부디... 부탁이네. "
" ... "
정말로 진실한 기사가 하나의 주군만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처럼. 그가 나를 그렇게 따르는 거였다.그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바보같이 그의 사랑을 의심했다.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는 만큼 사랑하는 방식이 다 다르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걸 기억해 내지 못하고 그에게 시간을 두자고 말했다. 옷소매를 넣고 조심스럽게 엄지손가락으로 눈가를 문질렀다.미안함이 묻어나오는 나긋한 목소리로 라하르트, 그를 불렀다. 여전히 눈물을 흘리면서도 애달프게 나를 보는 그의 시선에서 한 눈도 떼어낼 수가 없다. 올곧은 신념을 가진 기사, 하나의 주군만을 따르는 기사. 그는 기사였다. 이 사실을 나는 알고 있음에도 그를 기사이자 연인으로 본 것이 아니라 연인으로만 본 것이었다. 그의 긍지가, 명예가 드높은 기사라는 것도 잊은 채 괜한 의심을 해버린 거였다.눈가를 문지르던 손길을 내려 부드럽게 뺨을 감쌌다. 감싼 손바닥에 약한 열이 느껴졌다. 힐끗 보는 라하르트의 귀는 붉게 번져있었다. 역시 너였구나.
" 당신은 기사였지. "
" 모험가여... "
" 내가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어. 방금 한 말은 거두도록 하겠네. "
라하르트는 거두겠다고 하는 제 말에 희망이 번지는 화사한 미소를 지어주었다.하지만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당황해버린 채 그의 눈물을 닦아주자 라하르트는 호탕하게 웃으며 이건 좋은 대답을 들어서 흘리는 눈물이니 당황하지 말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렇게 의심과 오해가 풀린 나와 라하르트는 다정하지만 다소 거친 포옹을 했다. 서로의 감정을 다시금 확인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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