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로즈 타입

[HL/드림/221227] 첫사랑의 시작

나비의 보관함 2025. 1. 16. 22:55

 

아후로 테루미는 수업 도중에 닫힌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에 인상을 찡그렸다. 점심시간 이후였다 보니 배불러 몰려오는 잠과 나른함에 멍때리고 있었다. 그러다 시선을 돌려 운동장을 보았다. 운동장에서는 한참 체육을 하는 다른 반 학생들을 발견했고, 그중에서도 해맑게 웃으며 운동을 하는 여학생을 눈여겨보았다. 그런 □□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날은 작년 입학식 때 있었던 일이었다. 봄날의 입학식.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고 벚나무에서는 아름다운 꽃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교정 앞 학교 본관으로 들어가는 거리에는 거리에 따라 벚나무가 일정한 간격으로 심겨 있었다. 그 벚나무 아래에서 □□의 모습이 보였다.  테루미는 한참이나 벚나무 아래에서 뛰놀고 있는 듯한 그녀의 모습을 한참이나 보고 있었다. □□은 신입식에 가야 한다는 것조차 까먹은 모양인지 바람에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막 입학했을 당시의 테루미는 아름다움과 힘에 취해 오만하고 거칠기만 했던 신입생이었다. 어렸던 초등학생 시절을 지나 성장을 위해 입학한 거였다. 테루미는 한참이나 그녀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 ... 신경 쓰이는군. '

 

원래라면 흩날리는 벚꽃잎은 매번 짜증 나기만 할 뿐이었지, 이렇게까지 보게 되는 건 아니었다. 우연히 발견한 □□의 모습이 그의 호기심을 끌었다. 테루미는 천천히 그녀를 살폈다. 바람에 나부끼는 갈색 머리카락과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호기심 가득한 검은 눈동자,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꽃잎을 붙잡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까지. 힘들 법도 할 텐데 포기하지 않고 떨어지는 꽃잎을 잡아보려고 움직이는 모습이 더 눈에 띄었다. 그 모습마저도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 무렵 꽃잎을 잡지 못해 시무룩해진 그녀의 모습을 보고 테루미는 무의식적으로 생각이 들었다.

 

' 그냥 내가 가서 잡아주는 게 빠를 거 같은데. '

 

단편적으로 본다면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아름다움과 힘하고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딘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어딘가 마음을 끌리고 있었다. 마치 봄바람의 여신이 사랑을 태우고 날아와 자신의 전신을 감싸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비유를 하자면, 그래. 사랑의 천사 큐피드가 사랑의 화살을 제게 쏘아 그녀를 반하게 한 건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할 정도였다. 정신을 놓고 그녀만 보고 있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느꼈던 모습은 숨을 쉬게 하는 것조차 까먹게 했다. 천진난만하고 순진한 아이처럼 웃으며 뛰어다니는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했다.

 

" □□쨩! 조금 있으면 입학식 시작이야! 빨리 와!! "

" 미안해! 금방 갈게! "

" 저... "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는 □□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는 거슬렸지만 난감해 보이는 기색을 비치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건 좋다는 느낌이 들었다. □□을 불렀던 다른 이에게 했던 말과는 달리 한참이나 같은 자리에서 꽃잎을 붙잡기 위해 더 열심히 폴짝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테루미는 어느새 한 자리에 멈춘 채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작 본인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은 열심히 폴짝거렸던 효과가 있기라도 한 모양인지 얼마 가지 않아서 꽃잎을 붙잡았다.

하늘하늘 바람에 실려 내려오던 걸 붙잡은 그녀는 소중하다는 듯 양손으로 쥐더니 수줍게 웃어 보였다. 테루미는 그 모습을 보고 제대로 반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심장 정중앙을 꿰뚫어오는 느낌에 말없이 그녀만 보았다. 꽃잎을 쥐고 자신을 부르는 친구들 쪽으로 달려가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테루미는 아쉬운 마음에 그만 손을 뻗어버렸다. 급하게 불러보기도 했지만 이미 □□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뒤였다. 테루미는 저만 남은 거리에서 자신이 뻗은 손을 보았다. 테루미는 처음 겪어본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난생처음 겪어본 이 감정을 무어라 정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이 감정은... 뭐지? "

 

감히 인간 따위에게 반하기라도 했다는 건가? 끝내 내뱉지 못한 뒷말은 목구멍 안쪽 깊숙한 곳으로 집어삼켰다. 태어나 처음 알아버린 이상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자 괜스레 뻗어진 자기 손을 한참이나 쥐었다 펴길 반복하며 보았다. 주먹을 쥐었다가 피길 반복해도 바뀌는 건 없었다. 그럼 그건 무슨 감정이었지? 의문이 들어 고개를 들어 보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사라진 거리에는 벚꽃의 향만 아득하게 남아있었다. 의식도 없이 자신이 했던 행동을 뒤늦게 알아차리자 끝없는 분노와 비슷한 감정과 설레는 간질간질한 감정이 서로 부딪혔다. 테루미는 인상을 찡그리고 손을 보았다.

 

' 이토록이나 신의 마음을 어지럽히다니... '

 

씁쓸함의 끝에 자리 잡은 아련한 감정이 마음 끝자락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았다.

그 감정은 스멀스멀 끝에서부터 커졌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퍼져가는 감정에 테루미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때 따뜻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꽃잎 하나가 테루미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테루미는 꽃잎을 바로 잡아버렸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꽃잎을 보며 그녀를 생각했다. □□은 그렇게나 붙잡기 위해 폴짝거리며 잡으려고 애쓰던 모습이었는데, 자신은 바로 잡아버리는 것이 기분이 더 이상하게 여겨졌다.

꽃잎을 잡은 손을 보다가 꽃잎 위로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바람에 나부끼는 갈색 머리카락과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 분홍빛으로 물든 수줍은 뺨, 빨간 입술까지. 그렇게 멍때리고 있다가 그만 신입식에 늦게 도착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작 몇 분 늦은 것으로 신의 힘을 받은 테루미를 감히 누가 혼낼 생각이라도 할까, 싶지만. 테루미는 어색하지 않게 자신이 배정받았던 반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긴 연설이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이곳 제우스 중학교의 위신은... >

 

장대한 설명 앞에서 조금 지겨워지는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무심코 돌린 시선 안으로 그녀가 들어왔다. 한눈에 찾아버린 그 모습에 테루미는 놀라고 말았다.

앞좌석의 사람과 즐거운 듯 웃고 떠드는 그녀의 모습이 단번에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 놀라운 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타인에게 관심을 이토록이나 가지고 있다는 게. 아름다운 것과 강한 것 외에는 그리 관심도, 애정도 없었던 자신이었기에 여전히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건 알지만 그녀만은 예외였다. 이리 단번에 찾고 다시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다가왔다. 두근두근 귓가에 울려오는 심장 고동 소리가 마냥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수많은 군중 속에서 그녀를 단번에 찾아냈다는 것도 놀랐지만 이제 보니 찾을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나 빛을 내는 사람을 어떻게 찾지 못할 수가 있겠는가. 살며시 웃고 있는 그녀의 주위로 환상처럼 꽃이 피어나는 듯한 착각도 들 정도였다.

 

< 에, 음... 그러니까... 신입생 여러분, 제우스 중학교에 입학한 것을 환영합니다. >

 

긴 연설을 끝으로 입학식이 막을 내렸다. 많은 인파가 흩어지듯 강당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그 인파들 속에서 그녀를 찾으려고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러지 못한 편이 가깝다. 많은 인파 속을 헤집고 들어가 찾으려고 했지만 이미 나간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나간 건지 그녀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첫사랑이라는 아릿한 감각을 안겨주었던 봄이 지나가고 뜨거웠던 여름, 쓸쓸했지만 즐거운 축제가 있던 가을이 지나가고 옆구리가 시리기만 하던 추운 겨울이 지나 다시 봄이 되는 계절이 다가왔다. 봄은 확실히 따뜻한 계절이었다. 하얗게 쌓여있던 눈을 녹여 내리는 온기처럼, 차갑게 얼어버린 마음을 녹이는 사랑처럼 따뜻한 날이 분명했다. 이제는 2학년이 된 테루미는 여전히 나른하고 무의미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신의 힘에 취해 오만하고 거만했다. 하지만 봄이 다시 사랑의 바람을 데리고 왔을 때 테루미의 마음을 간지럽혀댔다. 등교하던 길에 또다시 벚꽃 잎을 잡기 위해 폴짝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테루미는 다른 사람들 모르게 웃고서 그녀의 모습을 눈에 계속 담아냈다.

 

' 이 마음을 전하는 날이 오긴 할까. '

 

문득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을 전하는 날이 오긴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운 마음이 목 안쪽까지 차올라 올 때 그녀가 사라지는 걸 또 보기만 할 뿐이었다. 테루미의 입에서 한숨을 내뱉었다. 그 뒤로 테루미는 자신의 교실로 들어갔다. 테루미는 떠올리던 기억을 지우고 수업 도중에 비추는 햇빛에 나른함을 느껴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지금은 봄이 가려 하고 여름이 오려 하는 그사이의 계절이 되었다. 테루미는 기억을 떠올리는 걸 멈추고 창가에서 수업 따위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계속 그녀를 보기만 할 뿐이었다. 입꼬리에 걸쳐진 그의 미소는 아주 잠깐 비추었다가 사라졌다.

 

.

.

.

 

시간이 흐르고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테루미는 항상 등교할 때면 차를 타고 오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걸어가고 싶어지는 마음에 차가 아닌 걸어서 등교하는 것을 택했다. 느긋하게 걸어 주변을 둘러보면서 가고 있는 도중에 골목이 나왔다. 신경 쓰지 않고 걸어가다가 골목에서 튀어나오는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테루미는 갑작스러운 충돌에 뒤로 물러나고 상대를 보았다. 자신과 부딪힌 사람은 다름 아닌 □□였다.

서로 부딪히는 바람에 테루미는 뒤로 물러났고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많이 놀랐지만, 겉으로 티 내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보기만 하던 그녀가 눈앞에 있다는 것도 놀랐지만 자신으로 넘어졌다는 게 그가 놀란 이유였다. 테루미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상냥하게 웃는 미소를 띠며 손을 내밀고 말했다.

 

" ... 괜찮아? "

" 앗, 그... 괘, 괘... 괜찮아요! "

 

그의 행동에 그녀는 빨갛게 익어버린 얼굴로 테루미의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빨개져선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괜찮다는 말을 더듬어가며 말했다. 그녀의 반응에 테루미는 더 당황해서는 □□의 손을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테루미 역시 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시선만 그녀를 담아내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먼저 테루미에게 수줍은 듯 웃으며 말했다.

 

" 가, 감사합니다... "

" 아니, 서로 부딪힌 거니까. "

 

테루미의 얼굴에는 티가 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난리가 나버렸다.

지켜보는 게 전부였던 날들과는 달리 그녀와 대화하고 있는 현재 상황이 당황스러워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와 처음으로 주고받는 대화였고 첫 대면이었기 때문이었다. □□가 어색하게 웃지만 난감한 기색을 보이며 수줍게 웃었다.

 

" 저... 손 좀 놔주시겠어요...? "

" 아. "

 

그녀의 말에 놀란 테루미는 붙잡고 있던 손을 황급히 놔주었다.

그러자 □□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테루미에게 자기소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화사한 미소에 눈이 멀어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보기만 할 뿐이었다. 테루미는 지금의 상황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는지 입만 벙긋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 아, 저는 제우스 중학교 2학년 B반 □□이라고 해요. "

" ... "

" 저...? "

" 아. "

 

자기소개에도 답 없이 보기만 하는 그의 반응이 난감했던 모양인지 그녀는 테루미의 옷 소매를 붙잡은 채 꾹 잡아당겼다. 그러자 테루미가 정신을 차리고서 자신 역시 소개하기 시작했다. 테루미가 소개를 끝내자 □□은 웃으며 그에게 함께 등교하자는 말을 했다. 그녀의 말에 테루미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다.

 

" 2학년 A반, 아후로 테루미. "

" 네, 그러면 함께 등교할까요? 이러다 지각하겠어요. "

 

테루미가 고개를 끄덕이자 동시에 두 사람은 발걸음을 움직였다.

등굣길을 걷기 시작하고 나서 처음에는 둘 사이는 조용하고 어색하기만 했다. 서로 어색해하면서 부끄러워하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먼저 용기를 내서 말을 건 사람은 그녀였다. 수줍은 듯 조심스럽게 걸어오는 말은 테루미의 부 활동에 관한 것이었다.

 

" 저... 축구 부의 MF... 맞으시죠? "

" 그렇지. "

" 와, 저 엄청 팬이에요! 응원하고 있어요! "

" ... 누구를 응원하고 있지? "

" ... 당신이요. "

 

테루미는 어째서 그녀가 자신의 부 활동을 알고 있냐는 거에 대한 건 생각도 못 한 채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답을 할 뿐이었다. 그가 답을 해주자 그녀는 손뼉을 치면서 해맑게 웃었다. 응원하고 있다는 말에 테루미의 얼굴은 티가 나지 않았지만, 귀만큼은 숨길 수 없다는 듯 새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테루미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누구를 응원하고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은 뺨을 물들이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동자를 굴리고 답했다. 그녀의 말에 테루미는 두근두근 뛰어오는 심장 박동수가 귓가까지 들려오자 이러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렇게 걸어가긴 했지만 무슨 정신으로 학교까지 온 건지 몰랐다.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교실에 앉아있었다. 테루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마른세수하며 책상에 얼굴을 숙였다.

 

' 망했군... '

 

눈을 감고 있으니 자신을 응원한다는 그녀의 수줍은 얼굴이 다시 떠오른다.

부끄러워서 붉게 물든 뺨과 진심인지 기대감에 가득 찬 눈동자, 오물거리며 말하는 입술까지. 사랑스러워 미치는 줄 알았다. 정작 아까의 상황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였더라 생각해보지만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신의 힘을 받은 테루미의 첫사랑은 앞으로도 갈 길이 멀어 보였다. 

*

테루미가 1학년 때부터 시작해온 첫사랑은 스스로가 판단하기에 씁쓸하고 달달한 카카오 초콜릿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의 사랑을 알아주지 않아 씁쓸하면서도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미소를 볼 때면 씁쓸함 마저 날아가 버릴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이런 제 기분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아침 등굣길에 항상 그녀가 다가와 아침 인사를 건넨다.

등교하자마자 보는 사람이 그녀라서 기분은 좋았지만, 제 마음을 몰라주는 그녀가 야속하기까지 했다. 매일 아침 해맑게 웃으며 제게 다가와 아침 인사를 건넸다.

 

" 좋은 아침이에요. "

" ... 좋은 아침. "

 

그 날따라 유독 기분이 가라앉아있었다. 계속 지속되는 외사랑에 조금 힘들어한 것 같았다. 그조차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그녀는 걱정하는 시선을 보였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이마에 손을 얻어 열을 확인하고 목소리도, 시선도 전부 걱정이 담겨있는 게 보였다. 거짓이 아닌 진실로. 테루미는 신의 힘을 받은 사람이었기에 상대의 진심 따위는 금방 파악했다. 거짓이 없는 그녀의 행동은 테루미를 더더욱 힘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자각 없는 애정이야말로 자각한 사람에게 있어 독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릿한 통증에 테루미는 그녀에게 향했던 시선을 돌렸다.

 

" ... 어디 아프세요? "

" 아니, 괜찮아. "

" 아프면 바로 양호실 가셔야 해요. "

 

테루미는 사실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친절이 애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우정이나 팬심에서 나오는 것인지.

물론 이런 고민 같은 거 말해도 그녀의 입에서 답을 듣는 게 두려워 정작 물어보지 못하는 거겠지만. 입술을 달싹거리며 이마를 짚고 있던 손길을 거두며 어색해 보이는 모습을 보았다. 괜찮다고 답해야 했지만 테루미는  상당히 가라앉은 탓일까, 답을 하기 싫어졌다. 그녀를 만나고 오만한 성격은 조금 누그러졌다고는 하지만 그 본성이 어디 가진 않았다. 그녀 외에 다른 학생들에게는 여전히 오만한 성격 그대로였으니까.

 

" 그래서 말이야... "

" ... 저, □□쨩...?? "

" 응? "

" 그... 듣기로는 옆 반의 테루미군이랑 친하다고 들었는데... 맞아? "

" 음... 친하... 다고 봐야 하나? "

" 그러면 혹시 이것 좀 전해줄 수 있을까? "

" 이게... 뭔데? "

" □□쨩... 이거 러브레터잖아. "

" 아. "

 

쉬는 시간, □□은 자기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처음 보는 여학생이 말을 걸어오자 놀란 눈으로 보았다. □□은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 답에 흥분한 여학생이  □□에게 작은 편지를 건넸다. □□은 왜 자신에게 이걸 내미냐는 눈빛으로 여학생을 보았고, 그녀의 곁에 있던 친구 중 한 명이 당황한 채 알려주었다. 여학생의 손에 쥐어진 편지를 보며 놀란 듯 짧은 단말마를 내뱉은 □□은 얼떨결에 편지를 건네받고 말았다. 항상 웃고 있던 □□의 표정이 멍한 채로 변하질 않았다.

 

" □□쨩... 괜찮아? "

" 편지 건네주고 올까? "

" 어? 으응, 아냐. 하교할 때 내가 줄게. "

 

□□은 수줍게 건네주고는 뛰어가는 여학생의 뒷모습을 힐끗 보고는 편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은 하굣길을 나서는 테루미의 곁으로 다가갔다. 웃는 얼굴로 테루미에게 인사를 건네자 그의 무뚝뚝한 반응에 □□은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평소와 다른 반응 탓이었다. 그를 걱정스러운 듯 보다가도 주머니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속에서 꺼내었다. 편지를 보고서 뒤늦게 기억이 난 □□은 테루미를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테루미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 테루미군! "

" ...?? "

" 이거... "

" 이건... "

" 아, 모르는 여학생이 테루미군에게 전해달라했어. "

" ... 네 것이 아닌 건가? "

" 에이, 내가? 테루미군에게? 무슨 무엄한 짓이야. "

" ... "

 

테루미는 □□의 손에 있는 편지를 보고 순간 설레었다.

혹시 자기에게 주는 그녀의 연애편지일 것 같아서. 묘한 기대를 했지만, 그 기대감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테루미는 들려오는 대답에 두 눈을 질끈 감고 인상을 찡그린 채 깨달았다. 자신이 아무리 신의 힘을 가졌다고 해서 그녀의 말과 표정, 행동 하나하나에 천국을 맛보고 지옥을 맛본다는 것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테루미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편지만 보고 있자 □□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테루미의 손에 편지를 쥐여주었다. 그녀의 행동에 테루미가 움찔거렸다. □□을 바라보며 테루미가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 ...□□, 나에게 이런 건 필요 없어. "

" 테루미군...?? "

 

순간 욱했던 마음 때문에 테루미는 참지 못하고 □□의 손에 있던 편지를 빼앗고 그대로 찢어버렸다.

제 편지도 아니면서 찢어져 가는 편지를 허무하게 보는 □□의 표정에 테루미는 조용히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처음에 그저 한눈에 반해버린 감정이 어느새 덧없이 커져서 이제는 보답까지 바라는 제 마음이 이제는 싫어질 정도였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어 입을 벙긋거려 보지만 좀처럼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눈썹 끝을 늘리고 미간을 찌푸린 채 물기 젖은 눈동자를 보자니 입을 열 수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말을 더 이어가봤자 자기에게 좋은 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테루미는 갈기갈기 찢은 편지를 날려버리고 등을 돌려 걸어갔다. 찢어진 편지지가 마치 봄날의 벚꽃처럼 흩날리자 □□은 마음 한 켠이 시리도록 따끔거린 걸 느꼈다. 여름 날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실수를 해버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테루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멍하니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와 관련된 생각 뿐이었다. 짧은 한숨을 내뱉은 테루미는 어느새 바다 밑으로 숨으려 하고 있는 붉은 석양을 보았다.

 

" 하... 이래도 심장은 뛰는군. "

 

삐이익 철컹철컹, 익숙하지 않은 전철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미지근한 바람과 함께 지나간 전철 탓에 테루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테루미는 다시 생각해도,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그녀를 이기지 못할 테고, 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그만 인정하기로 했다.

지나가는 전철과 하늘을 높이 나는 철새들, 바람에 흔들리는 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풍경을 지켜보던 테루미는 문득 알 수 없는 용기가 생겼다. 내일, 등교하면서 고백해볼까. 이름 모를 소녀가 저에게 했던 그 고백처럼.

 

" 의미 없으려나. "

 

솔직히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녀에게 거부당하진 않을지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고백하고 싶은 건 아마도 더 이상 외사랑의 고통을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이겠지. 제아무리 신의 힘을 받았고, 이름이 신의 이름과 비슷하고, 별칭조차 신의 이름이라고는 하지만 그 신의 타이틀을 직접 겪고 있으니 고통스럽기도 하고 만족감이 들기도 했다. 테루미는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움직이며 머릿속으로 다짐했다. 내일 아침이 밝아오거든, 등교하면서 너를 만난다면, 그때 제 마음을 고백하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