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적당히라는 단어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리저리 구른 탓일까, 몸은 성치 못했고 정신은 혼미하기 딱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혼란스러웠던 건 아무래도 자신의 얼굴과 쏙 닮은 얼굴로 부르는 이름 때문이렷다.
저 녀석도 그렇고 처용도 그렇고. 상당히 이상한 부분이 많았다.
평소에 처용이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장난을 많이 치긴 했으나 이렇게까지 하지 않는 녀석이었는데. 그래서 더 이상했다. 뭐가 문제일까. 사실상 따지고 보면 이제 처용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일 궁금한 건 자신의 얼굴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서 진이의 뒤에 숨어있는 녀석이었다.
' 랑, 랑...? 무슨 이름이 그래? '
거기다 처용과 저 녀석이랑 있을 때, 처용이 자신을 돌려보내려고 할 때 말이다.
그때 저 녀석을 보자 흐릿하게 그 녀석의 어릴 적 모습이 비친 듯했다. 허공을 보고 있던 모습, 멍하니 있던 모습이 신경이 쓰여서 자신도 모르게 팔을 뻗어버리고 말았다.
진이 녀석 말고는 누군가에게 신경을 써본 적 없는 자신이기에 방금 자신이 했던 행동에 대한 의문은 계속 들었다.
' 대체 왜 손을 뻗었던 거지? '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손만 빤히 바라보았다.
손만 본다고 해서 마땅한 이유를 알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계속해서 생각할 순 있었다. 기억 속에 편린으로 남아있는 그 어린 소년의 모습이 도통 잊히지 않았다.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 어릴 적의 이야기는 이제 지난 시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 녀석의 반응이... 그리고 처용의 하는 짓이 자꾸 시선을 끌었다. 헛된 생각임을 알고 있지만, 계속해서 떠오르는 건 왜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걸 뭐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골치 아픈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조용히 지내고 싶은데 주변에서 내버려두지 않는 느낌이었다.
' 무엇보다 독에 당했을 때 꿨던 꿈도... '
이젠 흐릿하기만 한 기억의 조각에도 여전히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린 유치원생 정도 되어 보이는 두 녀석이 있었다. 하나는 분명 저였고, 다른 하나는 누가 봐도 지금도 진이의 뒤에 숨어있는 녀석이 분명했다. 그리고 끊어지듯 이어지는 기억들은 전부 좋은 게 아니었다. 가장 힘들었을 때의 기억이었다.
왼쪽 팔에 남겨진 흉터의 이유.
그리고 마지막으로 처용의 일방적인 말들. 전혀 잊어버렸던 기억이었다.
' 젠장... 다른 건 기억 안 나는데 왜 거기만 유독 상세하게 기억되는 거냐고... '
모든 게 흐릿했지만, 신기하게도 차라리 죽는 게 더 편할 텐데. 라고, 말해주던 처용의 말 만큼은 선명하게 기억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기억이 뒤죽박죽이었지만, 지금은 그나마 여유가 있는 편이라 그런지 전부 떠 올랐다. 망할 뱀 자식에게 물린 뒤로는 기억이 없었다.
그러니까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상태랑 비슷하다는 거지.
' 두 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네. '
주먹을 쥐었다 피며 힘을 확인했다. 확실히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신은 사람에게 견딜 수 있는 시련만 준다고 하던데, 그건 사실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스스로 생각했을 때, 나 자신은 이걸 버틸 수 있는, 견딜 수 있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시련이 주어지는 건 분명 이유가 있어서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지만 버티기 힘든 건 어쩔 수 없었다.
비단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똑같이 느낄 거라고 자부한다.
쉐도우를 잃은 것도, 용마의 힘이 폭주하는 것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백정의 시체를 보게 되는 건 견딜 수 없었다. 형제인 호의 머리에서 피가 튀기고, 가장 믿고 있던 진이의 정체를 알게 되는 것까지.
' 마음을 열고 정말로 아꼈던 존재가... 처음부터 없던 사람이라고? 전부... 이 모든 게 거짓이었다고...? '
속에서 무언가 나오려고 하는 듯 크게 울렁거렸다.
욱, 헛구역질을 동반한 울렁거림이 계속되었다. 눈앞이 크게 흔들리고, 속이 뒤집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시작은 그래, 악우이긴 했으나 가까이에서 지내게 된 사람이자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인 백정의 시체를 보게 된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비각에게 배를 뚫리고, 형제인 호가... 이그나지오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한몫했다.
' ... 그리고 진이는 사실 처음부터 없던 사람이라고... '
사실 그렇게 진이가 처음부터 없던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부터는 기억 나는 게 전혀 없었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고, 그동안 어떤 상태로 지냈던 건지. 자해성 PTSD는 더 심해져서 무의식적으로 제 몸에 상처를 내는 날이 수두룩하게 늘어갔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호가 치료를 해주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스스로의 몸에 자해한다는 걸. 거기다가 안 그래도 심했던 건망증이 더욱 심해졌다는 것까지. 어쩌면 실의에 빠져 제정신이 아닐지도 몰랐다.
' 잘 알지만 멈추는 게 안 된단 말이지... '
가장 제일 큰 실의는 아무래도 그간 아들처럼 여겨왔던 진이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게 가장 크겠지.
백정을 이제 보지 못한다는 것도, 진이를 볼 수 없다는 것도. 무엇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어. 그나마 오랜 시간 잊고 살았다고 하는 형제를 찾게 되었다는 게 버틸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일 뿐이었지.
하지만 결국 계속 멈춰있을 수 없는 게 삶이라서.
그래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지. 계속, 계속... 그냥 멍하니 하늘만 보면서 지내던 시간들만 보내기엔 할 일이 너무 많았으니까. 회사를 지켜야 하기도 했고, 감염자를 회수하기도 해야 했으니.
그게 결국 살아가야 할 일이 되고 말았어.
' 가끔... 진이를 보고 싶어 하는 것 정도는 해도 되겠지. '
처음부터 없던 사람이라고 한들, 그렇다고 해서 진이와의 추억이, 기억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진이와의 기억을, 추억을 회상하는 것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물론 자신에게도 진이에게도 서로가 가장 깊은 인연일 테니, 진이를 기억하는 사람은 사실상 나 하나뿐일 테지만.
유일한 내가 기억을 함으로서 진이가 없었던 사람이 아니라 이곳에서 살아 숨 쉬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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