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로즈 타입

[BL/드림/240705] 핀의 일상

나비의 보관함 2025. 2. 7. 04:50



핀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그저 당황스러웠다. 

처음에 느낀 점은 그저 당황뿐이었다. 분명 자신의 세상이 멸망하고 있는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고,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잠깐 눈앞이 어두워졌다가 차가운 느낌이 들 뿐이었다. 

이후 따뜻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떠보니 낯선 천장과 어색한 공기가 느껴졌다. 당황함도 잠시 전신을 찌르고 오는 고통은 그대로 느껴졌다. 

욱신거리는 통증에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당황을 넘어 놀라고 말았다.

 

 

" 윽...?! 이, 이게 무슨... "

 

 

시야에 들어온 손 크기는 죽기 전 자신의 손 크기와는 사뭇 비교되는 크기였다. 

핀은 자신의 손 크기가 이전보다 줄어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도, 손 끝에서 느껴지는 것도 전부 자신의 손이 맞았다. 양손으로 뺨을 문질러 보자 죽기 전의 투박하고 퍼석하던 피부와는 달리 살결이라는 게 느껴지는 피부였다. 

당황한 핀이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일어서는 순간 허리를 타고 흐르는 통증에 참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겨우 힘겹게 일어나 그릇에 고여있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 어...? "

 

 

핀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물에 비친 모습은 죽기 전의 모습과 동일했지만, 전보다 더 어려진 느낌이 드는 모습이었다. 다만 흉터나 잔 상처는 그대로였고, 동료라고 믿었던 이들에게 받았던 상처 또한 그대로였다. 

분명 다시 살아났을 때 치료가 되어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다.

이상하게도 물에 비친 모습 속에는 눈 한쪽에 큰 붕대, 목과 가슴에 둘러진 붕대. 누가 봐도 자신이 이전 삶에서 당한 흔적들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보이는 거라고는 낡은 나무로 이루어진 집뿐이었다. 

순간 느껴지는 오싹한 느낌에 다급하게 밖으로 나섰다. 이대로 안에 계속 있다간 어째서인지 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하아... 하... 여긴...? "

 

 

처음 보는 하늘, 처음 느껴보는 바람, 처음 듣는 웃음소리.

'평화'라는 단어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화목하고 따뜻한 느낌이 드는 곳이 눈 앞에 펼쳐졌다. 자신이 살던 곳과는 또 다른 느낌이라 어색하기만 했다.

어색하고 거부감이 드는 느낌에 서서히 죽기만을 간절하게 바랐다. 

조금씩 말라 죽는 것처럼, 그렇게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죽을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가와 따스한 말을 걸어도, 걱정을 해도 무시했다.

그렇게 이전 세계의 용사였던 핀이 새로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

 

이후의 핀은 자신의 소원대로 서서히 죽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매번 꾸준히 저에게 다가와 주었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응답이 없으면 포기할 법도 하건만, 그는 포기를 몰랐다. 꾸준히 다가와 인사를 걸고, 하루 일과를 알려주며 말을 걸어왔다. 

어느샌가 그의 말과 일상에 저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 정도였다. 

그에게 이끌려 원하지 않던 산책을 하게 되고, 먹고 싶지 않던 밥을 먹게 되니 저절로 어릴 적 성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핀은 자신의 입으로 들어오는 것의 맛을 떠올렸다.

음식을 먹을 때면 속에서부터 돋아나는 기분을 느꼈다. 

잊고 있던 오감이 다시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핀은 상대가 학원에 다닌다는 말에 함께 다니게 되었다. 

 

 

" 핀, 거북이가 아니라 용이라고? "

" 응. 그래도 나 전직 용사니까... "

" 그건... "

 

 

핀은 황족이나 귀족이 들어가는 푸른 용의 탑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어떤 능력인 건지 입학 첫날에 푸른 용의 탑에 배정받았다. 핀의 친구, 아니 이한은 핀이 용의 탑에 배정되었다는 소식에 놀랐다.

아무래도 수식이 '오만한'이 붙는 만큼 황족이나 귀족만 배정해 주는 용의 탑이 정확히 알 수 없는 핀을 그곳에 배정해 준다는 게 신기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내 곧 핀이라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의 고민을 하지 않기로 하는 걸 택했다. 

핀은 저에게 궁금한 게 많으면서 굳이 물어보지 않는 이한이 좋았다.

 

 

" 여기서 뭘 배우는데? "

" 그냥, 이것저것? "

" 흠... 난 잘 모르니까 당분간은 너랑 같이 수업받아도 돼? "

" 어... 그래도 괜찮아. "

 

 

주변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경악했다.

다른 학생도 아니고 이한의 수업을 따라 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도 한몫했지만, 작은 체구의 핀이 이한의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이한은 학원 내에서도 알아주는 다른 수준의 괴물이었기에.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몇 개월 뒤 완전히 바뀌었다. 핀은 마법이라면 마법, 검이라면 검, 수업이라면 수업. 전부 이한에게 뒤처지지 않고 잘 따라갔다. 오히려 핀을 보며 사람들이 이한 못지않는 괴물이라고 칭할 정도였다. 정작 핀이나 이한은 그 소문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 핀, 다음 수업 말인데... "

" 응. "

 

 

그래도 핀은 이전의 성격으로 돌아와서 그런지 금방 학생들과 친해졌다.

어쩌면 이한과 함께하는 시간이 조금 줄어들었을 정도였다. 친해진 학생들과 함께 파티를 가기도 했고, 소소한 티타임을 한다거나 영애들과 친하게 지내기도 했다. 그런 핀의 모습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이전 생의 동료들이 취했던 행동에 비하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핀은 그저 지금의 평화로움과 한가함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마왕을 물리치기 위해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되었고, 동료들에게 배신당할 일도 없었으며 고된 수련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검은 이미 용사로서 끝의 경지에 다다른 상태였고, 마법은 단순한 호기심이 커져 더 배우고 싶어질 뿐이었다.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핀이 유일하게 힘들어하는 건 아인로가드 마법학원의 원장인 오수와 마주칠 때뿐이었다.

일개 학생이 그리 자주 마주치겠냐마는 핀의 일상은 대부분 이한과 함께하기 때문인지 오수를 만나는 것도 적지 않았다. 이한과 함께 오수를 볼 때면 핀은 어딘가 정신이 나가버린 사람 같았다.

 

 

" 리치? 리치... 리치를 만나면진짜힘들었지... 부셔도부셔도다시조립되고뼈부러지는소리는끔찍하게계속들리는데그소리를들으면서베어야하는데그소리를계속들으면정신이미칠것만같고이미죽은상태라죽여도죽지않아... "

" ... 핀? 너... "

" 아야, 어? 나... 내가 또 그랬어? "

 

 

심각한 PTSD는 오수만 보면 숨을 쉬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걸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까지 힘겨워질 정도로. 핀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호러적이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럴 때 이한이 곁에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한은 익숙한 건지 핀이 중얼거리기 시작하면 등짝을 때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지 금세 정신을 차리더니 자신은 기억에 없었다는 듯 행동했다. 핀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이한은 어쩐지 측은해지는 마음을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신경 쓰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 이한!! 같이 쿠키 먹을래? "

" 왠 쿠키야? "

" 아까 여학생이 먹으라고 주던데? 너랑 같이 먹어도 되냐니까 된대. "

" 다른 건 안 줬어? "

" 아! 편지도 하나 주긴 했는데. "

" 하... "

 

 

이런 일도 다분히 발생했다.

활발하고 남을 도와주기 좋아하는 핀을 짝사랑하는 여학생이 용기를 내서 핀에게 고백을 하지만, 정작 핀의 다정함은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보니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핀이 받아오는 대부분의 고백은 이한도 알고 있었다.

고백과 함께 오는 선물을 이한과 나누는 게 대부분이다 보니 이한은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한이 1학년 수석을 받고, 핀이 1학년 차석을 받는 날도 많았다. 가장 특별한 건 아무래도 이한이 1학년 겨울 방학 때 오수와 함께 제국의 황제를 만나러 갔을 때도 함께였다. 

이동할 때는 따로였으나 제국에서 황제를 알현하고 난 뒤 제국 수도에서 머물 때 함께였다.

오수를 만났던 탓인지 그 후유증이 남아버려 황제의 알현까지 할 수 없었던 핀이었다. 무엇보다 이전 삶에서 황제와의 기억은 끝이 좋지 않았기에.

 

 

" 핀, 괜찮아? "

" 으응... 괜찮아... "

 

 

그 일이 아니더라도 핀이 아플 때면 이한이 항상 병문안을 와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간호를 해줄 때도 있었다. 아무래도 핀은 이 세상에서 혼자였기에. 핀은 그래서 이한이 고맙고 또 미안했다. 친구라고 하기엔 그리 가깝지도 않으면서 챙길 땐 또 친구처럼 챙겨주는 다정함에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핀은 이한을 볼 때면 항상 생각에 잠겼다.

우리의 사이를 정의할 수 있다면. 그건 대체 어떤 관계일까. 너는 우리의 관계를 어떤 관계라고 정의하고 있는 걸까. 

너는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걸까.

 

 

" 이한... "

" 아픈데 쉬어라. 이상한 헛소리 할 거면 그래도 자. "

" 하하... 응. "

 

 

핀이 무슨 말을 할 건지 예상이라도 한 건지 이한은 괜히 퉁명스레 말했다. 

일어서려고 하는 핀의 몸이 되려 눕히며 짧은 한숨을 내뱉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핀은 힘없이 자리에 다시 누우며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허파에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이리 힘도 못 쓰고 누워있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전 삶의 핀은 아프지도, 잘 다치지도 않았었는데. 그리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분명 머리에 열이 몰려서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 몽글몽글하고 따스한 기분이 드는 게 무엇인지 설명할 길이 없었으니까.

그렇게라도 생각해야만 했다.

 

 

" 핀, 일단 내일 보자. 수업 빠진 건 내가 따로 파일 만들어 놓을게. "

" 응... "

 

 

이한이 떠났음에도 따스한 느낌은 그대로였다.

핀은 몇 번 입맛을 다셔 마른 입술을 축이다가 푸흐, 홀로 웃어버리다가 잠에 빠져들었다. 앞으로도 이런 일상이 계속되길 간절하게 바라면서 잠들었다. 많은 생명을 죽이고, 또 구하지 못한 못난 용사인 자신이지만 부디 신이 계신다면, 신이 자신을 보고 있다면.

제발 부탁이니 이 안락하고 평온한 삶이 계속되게 해주길 바랐다.

 

[ 아이야, 너의 삶을 누리거라. ]

 

다정한 듯 온화한 목소리가 퍼질 때, 핀의 몸에 남아있던 잔열이 조용히 사라졌다. 그러자 식은땀을 흘리며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핀의 표정이 곱게 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