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화는 문득 며칠 전에 읽었던 책의 구절이 떠올랐다.
먼저 좋아하는 쪽이 원래 지는 거라고 하던 그 책의 이야기. 지금에서야 완전히 수긍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그 이야기가 맞는 것 같았다.
유독 자신이 여주다에게 약한 모습을 자주 보였으니까.
그저 헛웃음만 흘렀다. 이러면서도 여주다만 보며 흐뭇한 표정이 절로 지어졌다. 아마 여주다는 말하지 않으면 끝까지 모를 비밀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해가 맑았다. 이상하리만치.
" 도화야. "
" 주다야, 왜? "
"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우리 셋이 사귀는 건 어떨까? "
" 뭐? "
" 월요일이랑 수요일, 금요일에는 너랑 사귀고 화요일이랑 목요일은 오남주랑 사귀는 거야. "
" ... 그럼 주말에는? "
" 주말엔... 혼자만의 시간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
이도화는 여주다의 말에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상하는 것도 쉽지 않은 말을 여주다는 쉽게 이야기했다. 사실 그녀 역시 며칠 동안 길게 생각해 보고 하는 말이었지만, 이도화가 그걸 알 리 만무했다.
되물어오는 이도화의 말에 여주다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월수금은 이도화와, 화목은 오남주와 사귀는 거라고. 그러자 문득 궁금증이 생긴 이도화가 주말에는 뭐 하냐고 덧붙였다.
그러자 그건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여주다가 짧게 생각한 뒤 말을 이어갔다.
이도화는 깊이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라도 여주다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기에, 그는 자신이 상처받을 걸 알고 있으면서도 여주다의 의견을 승낙했다.
" 그래, 네가 원하는 거라면 그렇게 하자. "
" 정말? "
" 응. 남주에게는 말했어? "
" 아니... 아직. 어떻게 말할까 싶어. "
" 남주라면 네 의견을 들어줄 거야. "
" 그렇겠지? "
이도화는 되물어 오는 여주다의 말에 답을 주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아는 오남주라면 이런 관계, 절대 승낙하지 않을 게 뻔했다. 오남주가 사랑에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걸 여주다에게 굳이 알려주지 않았다.
오남주에게 말해야겠다며 달려가는 여주다의 뒷모습에도 이도화는 붙잡지 않았다. 이대로 그녀가 오남주에게 가서 말하면 상처받는 건 여주다인 걸 알면서도. 이도화는 여주다를 부르지 않았다.
어쩌면 이도화는 자신의 끝을 어느 정도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여주다가 결국 선택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오남주라는 것을.
" 도화야... 남주, 남주가... "
" 뭐라고 했어? "
" ... 그러자고 했어! 완전 의외인 거 있지? "
" ... 어? 정말? "
" 응! 근데 이상한 질문을 하더라? "
" 어떤 질문... 이었는데? "
" 도화 너도 찬성했냐고 물었어. "
" ... "
" 그래서 나는 그렇다고 했지. "
이도화는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오남주는 알고 있었던 거였다. 자신이 어째서 여주다를 붙잡지 않은 건지. 그녀를 그대로 내버려둔 이유를 오남주가 알고 있다.
순식간에 이도화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이내 다정한 표정으로 바뀌긴 했지만, 그 변화를 여주다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두 사람의 승낙으로 세 명이서 사귀게 된 이후 조금씩 상황이 바뀌었다.
스테이지가 종종 열리긴 했어도 세 사람은 여전했지만.
그러다 이도화가 매번 걱정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던 사건이 터졌다.
" 나 스리고 서열 1위 오남주의 여자야! "
" 뭐?! "
" ... "
월수금, 여주다와 데이트를 즐기고 화목은 오남주와 데이트하는 모습을 보고 있어야 할 때였다.
하필 오늘이 또 화요일이었고, 내일이 자신과 데이트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또 하필이면 두 사람이 데이트할 때 오남주 팬클럽 중 한 명이 여주다에게 시비를 걸었다. 거기다 여주다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공식 선언과도 같았다. 그 말은 이도화에게 있어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여주다가 이도화의 감정을 거절하는 것과 동시에 아슬하게 유지해 오던 관계가 깨지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이도화는 멍하니 여주다를 보았다.
고개를 돌려보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지만, 여주다는 이도화를 그곳에 내버려둔 채 오남주와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 도화야, 아무리 생각해도... 우린 친구가 좋을 것 같아. "
" ... 왜 자꾸 날 힘들게 만들어. "
" 미안해... "
" 왜 자꾸 네가 날 좋아할 수도 있다는 기대를 하게 해. 너랑 이어질 수 있다는 착각을 들게 하느냔 말이야. "
" ... 미안. 달라져 보려고 했는데... "
예전에 잠시 했었던 대화가 되풀이되었다.
이도화는 그렇게 여주다를 붙잡아 보지도 못한 채 놓아주어야 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의 친구에게로 가는 걸 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숨죽이고 우는 것뿐이었다.
한껏 숨을 죽인 채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조용히 눈물을 훔치며 여주다를 보았다. 그녀를 응원해 주고 싶었으나, 이미 잔인하게 갈기갈기 찢겨진 마음은 원망만 남아 응원조차 해주지 못했다.
이도화는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그늘 쪽으로 옮겼다.
마치 그곳이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기라도 하듯이.
" ... 주다야, 여주다. 정말... "
" 하... 난 네가 웃는 게 제일 예뻐. "
" 내가... 내가 너한테 가고 있었는데... "
이도화는 이제까지 스테이지 위에서 읊조렸던 대사들을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이 감정이 한낱 정해진 대사일 뿐인 건지, 아니면 진짜 자신의 마음인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무지했다.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여주다가 기쁨을 알려주고, 설렘을 알려주고, 결국 아픔까지 알려주었다. 헤어지는 것에 대한 아픔이 이렇게나 아프다는 것을.
여주다도 이도화에게 알려주지 못한 게 있었다.
그 아픔을 어떻게 잊는지, 그녀는 알려주지 않았다. 이도화는 눈시울이 잔뜩 붉어진 채 눈물이 고인 눈으로 여주다의 뒷모습을 보았다.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머리카락까지 지켜보았다.
" 난... 아직도 여주다를 좋아해. 작가가 정한 게 아닌, 진짜 내 마음이야. "
이도화는 여주다가 들을 리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갑갑함이 차오르는 자신의 심장 위를 꾹 짓누르며 통증을 참아냈다. 마치 심장의 살점을 강제로 떼어내는 듯한 통증이 계속 들었다.
이도화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듯이 웅크렸다.
여주다의 모습이사라지자, 이도화의 눈에서는 수도꼭지가 터진 것처럼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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