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 엘리자베스 타입

[HL/드림/230822] 지독한 악몽 속에서 너를 찾을 때

나비의 보관함 2025. 2. 3. 13:34

 

제논은 눈을 깜빡거렸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온 세상이 회색빛이었고, 하늘은 검은색이었다. 허공에는 씨르래기 같은 것이 흩날리고 있었다. 

막힌 것만 같던 숨을 내뱉자 훅하고 입김이 나왔다. 

 

' 아, 겨울이구나. '

 

흩어지는 입김을 보며 든 생각이었다. 

씨르래기 같은 것들이 흩날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어도, 벌거벗겨진 나무들이 바람에 흩날려도 이상하게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약간 더운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제논은 멍하니 하늘을 보다가 하얗게 덮인 땅을 보았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처럼 보였다. 익숙한 덩치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멍하니 있던 시야에 이채가 감돌았다. 오랜 추억을 간직했던 소중한 사람이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상대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 표정이었다. 

 

 

" ... 스구루? "

" ... "

" 안 추워? 아무래도 지금 겨울인가 봐. "

" ... "

" 스구... 아... 아악...!! 아아아아...!!! "

 

 

제논은 어느새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스구루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의 이름을 불러도 그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답을 주지 않고 가만히 서있기만 할 뿐이었다. 머쓱했던 모양인지 말을 돌리기 위해 날씨와 계절의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여전히 답이 없었기에 짧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제논은 제 몸 위로 덮쳐지는 그림자에 고개를 돌려 스구루를 부르려고 했다. 애석하게도 제논의 앞에서 스구루의 몸이 점점 비쩍 말라가더니 완전히 바스러지고 말았다.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스구루의 몸에 제논이 허공에 손을 뻗어 허우적거렸다. 

마치 흩어지는 가루를 모아 원래대로 만들려고 하는 행동처럼 보였다. 날카롭고 높은 비명이 하늘을 가를 정도로 높게 퍼졌다. 

정신없이 비명을 질러대던 제논은 흠칫 떨었다. 

 

 

" 흡...!! "

" 뭐야, 제논. 악몽이라도 꿨냐? "

" ... 스구루? "

" 엉? 덥다. 이제 여름인가 봐. "

" ...응, 여름이네. 덥다. "

 

 

제논이 정신을 차렸을 땐 햇빛이 쨍쨍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새까맣게 하늘을 물들이던 검은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푸른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익숙하고도 그리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저를 설레게 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선선하게 바람이 부는 데도 더운 지 땀을 뻘뻘 흘리며 창밖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스구루를 보며 제논은 생각에 잠겼다. 방금 전까지 현실처럼 느껴졌던 그곳은 대체 뭐였을까. 당장 눈앞에 있는 스구루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평소라면 그러지 않았을 테지만, 스구루의 얼굴을 꼭 확인해야만 했다. 

제논의 손이 스구루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제논은 스구루가 다정하게 웃으면서 뭐 하냐고 물어볼 음성이 미리 들리는 것만 같았다. 불안한 마음과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서 그를 기다렸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스구루는 전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 스구루, 여기 좀 봐. 어? "

" 그거 알아? 여기서 나갈 방법은 없어. "

" 어? 그게 무슨 말이야, 스구... 꺄아아악!!! "

 

 

다급해지는 제논의 목소리에 돌아오는 건 스구루의 낯선 모습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어보려는 제논의 말은 이내 막히고 말았다. 수많은 벌레들이 스구루의 몸을 감싸더니 서서히 줄어 들어갔다.

순간 놀란 제논은 화들짝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났다. 

왜 자꾸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제게서 스구루를 빼앗아 가는 건지. 무엇이 문제인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이걸 멈출 수 있는지가 문제였다. 

스구루를 애타게 부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제 곁에는 스구루가 함께 했다. 

제논은 한참이고 말없이 스구루를 보았다. 제논의 시선에 스구루는 마주 봐주었다. 그 시선을 마주 보며 제논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스구루가 제가 아는 스구루가 아닌 것 같았다. 

제논의 발걸음이 뒤로 주춤거렸다. 

그녀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린 스구루가 가만히 제논을 보았다. 

 

 

" ... "

" 스구루, 우리가 함께 했던 친구들 기억해? "

" 그럼 당연하지. "

" 그럼 후배도 기억하겠네? "

" ... "

" 기억하지? 스구루. "

 

 

기억하냐는 제논의 말에 장난하냐는 듯 코웃음치며 답하던 스구루였다. 

후배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제논은 떨리는 눈으로 스구루를 보았다. 굳게 닫힌 입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신이 흔들릴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어느새 발걸음은 더 물러나 스구루와 거리를 만들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스구루를 지켜보았다. 생긴 것과 하는 행동, 사소한 습관까지도 전부 똑같았다. 

그때 제논의 머릿속에서 직접적으로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지만 당장 떠오르지 않는 목소리였다. 

 

 

' 제논...!! '

" 윽...! "

" 제논, 괜찮아? 오늘 왜 그래? "

" 스구루... "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자 동시에 두통이 일었다. 

제논은 끔찍한 두통에 비틀거리며 머리를 짚었다. 깨질 듯한 두통이 멈추지 않자 거친 숨까지 몰아쉬었다. 어느새 다가온 스구루가 어깨를 살짝 잡아오자 두통이 깨끗하게 나았다. 

이상한 일이 벌어지자 제논은 멍하니 스구루를 보았다. 

왜 그러냐는 그의 말에 제논은 스구루를 불렀다. 그 순간 제논의 눈동자에 붉은빛이 살짝 일렁이더니 당황하던 표정이 금세 사라지고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제논이 웃자 스구루 역시 어딘가 만족한다는 듯한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제논과 스구루의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 자락에서 검은 안개가 흩날리다가 이내 사라졌다. 

다음으로 제논이 정신을 차린 곳은 아무것도 없는 새까만 공간이었다. 

제논은 느리게 눈을 껌뻑거리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어둠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제논! 정신... 려! 지면... '

' 일, 어... 제ㄴ... '

" 누구... 야...? "

" 제논.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않아도 괜찮아. "

" 스구루...? "

" 응. 나만 보고 있어. 제논. "

 

 

고장 난 기계의 노이즈가 낀 것처럼 말이 툭툭 끊겨서 들렸다. 

누가 이다지도 간절하게 저를 찾고 있는 걸까, 주변을 둘러보아도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어둠에서 한참을 헤매며 목소리의 주인을 찾고 있을 때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없던 어둠 속에서 스구루가 모습을 보이며 양손으로 제논의 귀를 막아주었다. 

아까처럼 까무러칠 정도로 강한 두통은 없었지만, 목소리는 제논을 혼란스럽게 했다. 스구루가 그것을 막아준 것이었다. 다정한 목소리로 걱정스러운 말을 하는 스구루의 모습에 제논은 울먹거리는 눈으로 스구루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그저 웃음만이 걸려있을 뿐이었다. 

다른 복잡한 감정은 보이지 않았고, 단순한 미소만 걸려있었다. 제논은 속으로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저 이대로 스구루의 품에 있고만 싶었다. 

 

 

" 더운 여름인데 내일은 바다를 가볼까? "

" 바다? 나쁘지 않지. "

" 제논, 굳이 목소리를 떠올릴 필요는 없어. "

" 스구루... 하지만 누군지 기억날 거 같은데... "

" ... "

" 스구... 흡!? "

 

 

스구루는 제논이 다른 생각을 하게 두지 않을 생각인지 대화를 이끌어갔다. 

그러다 자꾸 눈동자를 굴리는 제논의 모습에 목소리를 떠올릴 필요가 없다고 한 마디만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제논은 자꾸 들려오는 목소리가 익숙해서, 그리워서 기억하고 싶었다. 

제논의 말에 스구루가 입을 꾹 다물었다. 

조용해진 스구루의 목소리에 제논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웃음기가 머물고 있던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사라지고 무거운 눈빛으로 가라앉아 정색하고 있는 스구루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공포에 제논은 순간 숨을 들이삼켰다. 

그 순간 스구루의 표정이 사라지고 그의 얼굴 위로 검은 덩어리가 생겨났다. 

제논에게 익숙한 스구루의 얼굴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제논은 겁에 질려 뒤로 주춤 물러나려고 했지만, 스구루의 팔이 제논의 어깨를 붙잡고 있어 그러지 못했다. 

너무 놀라 딸꾹질까지 하고 있으니 입이 보이지 않는데도 스구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제논. 다음에는 그 목소리를 떠올리려고 하지 마. "

" 흡...!! "

" 알았지? 제논. "

" 흐윽... "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제논이 아는 스구루의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가 자신이 스구루인 척 다정하게 제논의 이름을 불렀다. 제논은 공포를 느끼는 도중에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기시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눈앞에서 스구루인 척하며 다정하게 구는 존재가 두려웠다. 

그렇기에 그의 말에 장단을 맞추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 존재가 말하는 다음이라는 걸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상황부터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어쩐지 어둠뿐인 얼굴이었지만,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웃음이 이상하리만큼 소름 끼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낯선 바닷가 앞이었다. 멍하니 모래알 위로 부서지는 파도를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등 뒤로 그립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제논. "

" ... 스구루? "

" 바다에 왔는데 멍하니 뭐해? "

" 아... 그냥. 물멍 때리고 있었어. "

" 너도 참 웃긴다. 이거 마셔. "

" 이건 뭐야? "

" 여기서 팔던데? "

 

 

제논은 스구루와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가 건네주는 칵테일 잔을 받으며 몸을 돌렸다. 스구루는 제논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 감싸 안았다. 마치 연인이나 할 법한 행동을 보였다. 

멍하니 있던 제논은 스구루의 행동에 흠칫거렸다. 

분명 익숙하고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어딘가 이건 아니라는 기시감이 들었다. 머릿속에선 계속해서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다. 삐용삐용, 경고하는 음이 고막을 터트릴 기세로 울리는 느낌이었다. 잔을 보던 제논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가 스구루를 보았다. 

시선을 천천히 올리면서 제논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켜냈다. 

어딘가 불편하고 두려운 느낌이 가득했다.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오는 불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모든 감정을 내려두고 고개를 들자 스구루와 시선이 맞닿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냐는 듯 웃어주는 그의 얼굴에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방금까지 느꼈던 모든 것들이 전부 거짓말처럼 깨끗하게 사라졌다. 

 

 

" 스구루. 근데 여긴... "

" 기억 안 나? 우리 바다 여행하기로 했잖아. "

" 아... 우리가? "

" 그래. 우리의 2년을 위해서. "

" 2년? "

" 제논. 왜 그래? 어디 아파? "

" 아... 아니야. "

 

 

스구루와 시선이 맞닿던 순간 안도감을 느낀 제논은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수평선 너머로 아른거리는 아지랑이를 보았다. 조심스럽게 손에 쥐여진 칵테일을 홀짝거리며 말을 돌리기 위해 말을 걸었다. 

바다 여행이라는 말에 제논은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게 어디서, 누군가에게 들었는지 기억이 도통 나질 않았다. 계속 이어지는 질문에 스구루는 이상하다는 듯 제논을 보며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안부를 물어보았다. 

스구루의 반응에 당황한 제논이 고개를 저어댔다. 

그러자 스구루가 바로 몸을 뒤로 내빼며 고개를 돌렸다. 제논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느낌을 외면하기로 했다. 

 

 

" 제논. "

" 스구루... "

 

 

제논은 자신이 느꼈던 그 기시감을 무시하면 안 됐었다. 

계속해서 머릿속을 괴롭히는 목소리를 외면하지 말았어야 했다. 바보 같게도 계속해서 반복되는 상황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부정했다. 

스구루가 저를 보내는 시선이 좋아서, 그의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서.

모든 걸 가진 것만 같아서 긍정적으로 보고 싶어졌다. 비록 스구루를 끌어안을 때마다 차갑고 딱딱하게 느껴졌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을 때마다 그의 표정이 험악스레 구겨졌지만 그럼에도 좋았다. 

계속 다른 장면으로 반복되는 상황에서도 똑같았다. 

가끔 들려오는 그리운 듯한 목소리만 아니라면 모두 좋았다.

 

 

' 제논! 제ㄴ...!! '

' 돌아, 제...!! '

" ... 누구길래 날 그렇게 불러...? "

" 제논. 돌아가자. "

" 스구루... "

 

 

평소에는 조용하다가 어딘가 기시감을 느낄 때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릴 때면 항상 같이 검은 안개가 눈앞에서 흔들렸다. 마치 붙잡으라는 듯이 손길하고 있는 듯했다. 

한참을 멍하니 안개를 보고 있으면 스구루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긴박한 표정으로 제 이름을 부르고, 팔을 붙잡아 당기고 품에 저를 안는다. 평소라면 보여주지 않는 스구루의 당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를 설레게 하는 스구루도, 나를 찾는 스구루도 전부 좋으니까 떠날 생각은 없다. 

가끔 스구루는 마치 내가 멀리 떠날 것 같은 사람처럼 보고 있다. 

 

 

" 스구루, 어디 안 가. "

" 듣지 마. 듣지 말고 보지 마. " 

" 스구루... "

' 레이사 제논...!!! '

" ...!!? "

" 제논!! "

 

 

제논은 스구루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애가 타는 듯 긴장한 모습으로 다가오던 스구루는 제논을 꽉 끌어안았다. 그의 몸 근처에 검은 안개가 사납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 순간 큰 목소리로 제논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풀네임을 부르는 목소리에 제논은 순간 정신이 든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겁게 가라앉아있던 제논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제논이 정신을 차리자 그녀의 주변 모든 것들이 금이 가고 깨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깨져가던 공간은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제논의 바로 앞에 있던 스구루가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간절해 보이는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제논은 계속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스구루를 빤히 보았다.

 

 

" 제논, 가지 마... "

" 넌... 내가 아는 스구루가 아니구나? "

" ... 제논 "

" 하지만... 나는... "

 

 

제논은 한껏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스구루를 보았다.

이제서야 그가 제가 알고 있던 스구루가 아님을 깨달았다.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짓던 제논은 스구루의 손을 붙잡아주었다.

그녀의 행동에 스구루인 척하던 존재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