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에게.
너에게 편지를 또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안 그래? 너는 분명 기억이 안 난다고 하겠지만,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양 측의 너는 전부 너였어. 기억을 잃었을 당시에도 너였지.
너와 나는 언제나 말로 시작해도 끝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울며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하는 네 말에 넘어갔던 모양이야.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동안에도 너는 전장을 보고, 계속해서 학살하고 있겠지. 지도 위에 철저한 계획을 올리고, 숫자로 계산하고, 보급선의 흐름이나 병력의 이동 같은 거 말이야. 어디까지 밀어붙이면 가장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하면서.
그 모든 게 너무 익숙해서 눈을 감아도 떠올라.
그 모습이 너무 선명해서, 그게 더 괴로워.
네가 기억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기뻐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조차 판단하지 못했어.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지, 네가 돌아왔다고.
재능 있고, 냉혹하고, 전장을 완벽히 지배하던 박사가.
네가 얼마나 철저한 사람인지, 얼마나 계산적인 사람인지, 얼마나 확신에 차서 이 전쟁을 밀어붙이고 있는지 나는 너무 잘 알 거 같거든.
그래서 말이야. 이 편지가 정말 너에게 닿을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워.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나는 숨이 턱하고 막히더라.
돌아온 건 네 기억이 아니라, 내가 가장 증오하던 너였으니까. 너는 여전히 똑같았지. 사람을 물건으로 보고, 지도 위의 소모품으로 보고, 죽음을 필요한 비용이라고 불렀으니까.
민간인과 병사를 구분하지 않고, 아이와 어른을 전술의 일부로 취급하지.
그러지 말아 달라고 이 편지를 쓰는 게 아니야. 애초에 하지 말아 달라고 네가 하지 않을 인간도 아니니까. 쓰는 이유가 하나인 건 아니야.
설득도, 타협도 아니고, 도망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네게 멈춰달라고,
그만두라고 울며 매달리는 글도 아니야.
네가 사랑이라고 부르던 이 모든 것에 대해 내가 침묵한 채 칼만 드는 건 너무 비겁하잖아.
다른 사람들은 다들 안심해.
네가 기억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말이야. 이 중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건 유일하게 나뿐일 거야. 로도스가 다시 제대로 된 지휘관을 얻었다고, 전장이 다시 질서를 되찾을 거라고.
다들 입을 모아 말하던데...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나만 달랐어, 나만 달랐다고. 다른 사람들은 안도를 느끼고 있을 때, 너 때문에 나는 불안을 느끼고 두려워했어.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제대로 된 지휘관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여자였거든.
나는 그 순간, 네가 다시 나를 내려다보던 눈빛을 떠올렸어. 살카즈를 말할 때마다 미묘하게 입꼬리를 내리던 얼굴. 피 묻은 손을 가진 종족을 효율 좋은 소모품이라 부르던 목소리.
그 얼굴 위로 기억을 잃었을 때의 네 모습이 겹쳤어.
겁 많고, 울보에, 판단도 서툴렀지.
전장에서 늘 내 뒤에 숨었고, 폭발음이라도 들리면 내 이름을 그렇게 불러댔어. 그때의 넌 정말 약했어. 분명 지금의 넌 인정하지 않겠지만.
하지만 그때의 넌 진짜였어.
무능해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떨었고, 계산해서 지휘하는 게 아니라 나를 믿었지. 그게 연기라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모두를 속이는 거라면 제대로 속였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그런 너에게 내가 마음을 열었던 건데... 그런데 지금의 너는... 그때의 너와는 비교가 안 돼. 잔인한 여자.
날 더러운 살카즈 계집이라고 다시 부르던, 걸레짝으로 취급하던 그 여자가 된 거야.
너는 늘 그랬지.
손을 더럽히는 건 싫어하면서 누가 대신 피를 흘릴지는 정확히 골라냈어. 직접 죽이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이 결과만을 사랑했지.
그런 네가 나를 보며 웃을 땐, ... 그게 얼마나 악몽인지 너는 모를 거야.
카즈델을 재건하기 위해서. 살카즈가 다시는 짓밟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더 이상 울지 않게 하기 위해서.
네가 나에게 그 말을 할 때마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불타서 사라져.
나는 그런 걸 원한 적 한 번도 없었어. 내 종족의 이름으로 다른 종족의 아이를 죽이는 것도,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네가 학살자가 되는 것도.
전부 원한 적 없었어.
나를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학살자가 되지? 그게 말이 되는 거라고 생각해? 나는 네가 여전히 무서워. 전장에 서 있는 너를 볼 때마다. 예전의 기억이 아니라, 지금의 네 눈빛이.
하지만 더 무섭고 두려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아직 널 향하고 있다는 거야.
그래서 더 혼란스러워.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반박조차 하지 못했어. 부정하지도, 비웃지도 못했지.
그게 ... 거짓이 아닌 걸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더 용서할 수 없어.
사랑이라는 이유로 민간인까지 죽이는 너를, 사랑을 이유로 세상을 불태우는 너를,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핑계로 삼는 너를.
나는 그런 걸 바란 적 없어.
살카즈의 피로 세워진 왕국도, 네 손이 더럽혀진 채 나를 바라보는 것도. 네가 기억을 잃었을 때, 나는 네 옆에 서는 걸 선택했어.
너와 함께하며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고.
하지만 너는 그런 내 선택을 후회하게 만들었어.
너를 여전히 좋아하고 있지만, 나를 핑계 삼아 학살을 저지르는 너는 원망스러워. 도대체 나에게 이러는 이유가 뭐야?
내가 너에게 뭘 잘못했지?
어째서 나에게 이런 혼란스러움을 안겨주는 거야?
이 편지가 너에게 닿을지 정말 모르겠지만...
아마 이 편지를 네가 받았을 땐 내가 이미 너에게 칼을 겨누고 있거나, 적이 된 뒤겠지. 그리고 네가 편지를 읽는다면 비웃을 것 같아.
감정적인 글이라고, 비효율적인 대화라고.
그래도 괜찮아. 이건 설득이 아니라, 기록이니까. 너는 나에게 가장 깊이 들어온 사람이고, 가장 깊게 파괴한 사람이야.
나는 널 미워해.
그리고 아직도, 아직도 널 사랑한다는 사실을 지우지 못해서 들게 될 칼이 더 무겁게 느껴져. 그러니 부디, 제발. 오래도록 기억해.
네가 불태운 건, 없앤 건, 세상만이 아니라 너와 나, 우리 사이에 남아있던 모든 가능성이었다는 걸. 그리고 한 가지만 알아둬.
나는 너를 미워하면서도 끝까지 너를 기억할 거야.
너는 나에게 가장 잔인한 적이자, 가장 위험한 사랑이었으니까.
위셔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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