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L/드림/250519] 애정이 반복되는 만큼
기명은 분명 오늘, 다른 곳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으레 그렇듯 모든 일들이 순탄하게 진행되는 건 아니었다. 그가 떠나지 못한 건 전부 그가 모든 일을 놔두고서 떠나려고 했던 이유인 사람이 그를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기명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면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향했다.
여자는 수줍은 듯 뺨을 붉히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는 어딘가 삐뚤어져 있었다.
“ ... 야, 할 말 있으면 해. ”
“ 오빠, 솔직하게 말해줘. 날 떠나려는 이유가 뭐야? 내가 못생겨서 그래? 아, 아니다. 내가 골초라서? 아니지. 오빠 근처에 있는 사람들만 해도 골초들 넘치잖아. 그러면 내가 정신병자라서? 자꾸 자해해서? 그래서 그래? ”
“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일 있다고 했잖아. ”
“ 오빠, 내가 진짜 모를 거라고 생각해? ”
기명의 시선이 한번 오른쪽 아래로 향했다가 다시 올라오며 그녀를 보았다.
민채는 기명의 시선을 알아차린 듯 수줍게 웃던 표정을 굳히고서 말했다. 그녀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더니 비틀리며 한쪽만 올라갔다.
그의 거짓말에 민채의 속눈썹에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무릎 위로 올린 주먹을 꽉 쥐고 있다가 천천히 손을 올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담뱃갑을 붙잡았다. 바들바들, 그녀의 손이 잘게 떨려왔다.
니코틴 중독에 의한 현상이었다.
익숙하게 곽 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자연스럽게 라이터를 찾아 불을 붙였다. 그 일련의 과정 중에 기명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녀를 지켜볼 뿐이었다.
후읍, 후. 담배를 물고 길게 숨을 들이켜던 민채는 폐 안까지 들어오는 연기를 내뱉었다.
“ 오빠, 그냥 솔직하게 말해. 응? ”
“ ... ”
기명은 싸움이 아닌 연애는 참 여러모로 힘들었다.
특히 민채와 만난 이후부터 그녀와의 연애는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었고, 그로 인해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놓을 순 없었다.
민채를 사랑한다거나, 아낀다거나를 떠나서. 자신이 아니라면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구는 그녀를 두고 도저히 떠난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헤어지자고 말하면, 눈앞에서라도 죽어버릴 사람이었기에.
“ 오빠, 우리 연인사이잖아. ”
“ 그렇지. 그러니 네가 날 좀 더 믿어줬으면 좋겠는데. ”
“ 난 오빠 믿고 있어. 오빠가 날 못 믿는 거지. ”
“ 야, 내가 널 안 믿는다고? ”
“ 그러니까 지금 사실도 안 알려주는 거 아니야? ”
“ 하... ”
기명은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허리에 힘을 풀며 소파에 기댔다.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민채가 눈동자를 굴리더니 초조해 보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명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당겼다. 당기는 힘이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민채가 움찔거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의 반응에 기명의 인상이 다시 찡그려졌다.
“ 내가 손톱 물어뜯지 말라고 했지. ”
“ ... 읏! ”
“ ... 너 설마, 또... ”
“ 미, 미안해... 오빠... ”
기명이 민채의 소매를 확 걷어내자, 손목 위로 선명한 붉은 자국들이 수놓듯 이어졌다.
방금 움켜쥔 것 하나만으로 상처가 벌어진 듯 자국들 위로 핏방울이 맺혔다. 기명의 시선이 민채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순간 민채가 들고 있던 담배에서 불티가 붙어있는 재가 그녀의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분명 뜨거워서 날뛰어도 모자랄 판에 민채는 무덤덤하게 재를 탁탁 털어냈다. 재가 떨어진 허벅지 위로 붉은 점이 자국처럼 새겨졌다.
기명이 잔에서 얼음을 꺼내 그녀의 옆자리로 이동해 민채의 허벅지에 얼음을 문질렀다.
“ 미안할 짓을 하지 말던가. ”
“ ... 미안. ”
“ 나 진짜로 도망치는 거 아니고, 일 때문에 가는 거야. ”
“ 진짜로... 믿어도 돼? ”
“ 그렇다니까. ”
기명은 민채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민채가 힐끗, 기명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파사삭, 타들어 가는 재가 허공에 흩날려지고, 뿌연 연기가 민채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후, 천천히 숨을 내뱉던 민채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기명이 말하는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더 캐물을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기명은 답답한 마음에 커피를 마시며 그 안에 있던 얼음을 입안에 넣고 굴렸다.
시원한 감각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었다.
기명은 주변을 살펴보더니,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민채를 불렀다.
“ 민채야. ”
“ 응? ”
기명의 부름에 민채의 고개가 절로 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민채가 제대로 상황 파악하기도 힘든 상황을 겪었다. 기명이 민채에게 입을 맞춘 것이었다. 그녀가 먼저 요구하지 않는 이상 그는 절대 스킨십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기명과 입술이 맞닿자, 민채의 눈동자가 점점 커지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따져오던 민채가 조용해지자, 기명은 이게 맞는 방법이라고 기억했다. 뺨을 붉게 물들이며 만족스러워하는 민채를 보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는 순간, 기명은 적잖게 당황했다.
“ 오빠, 듣고 있어? ”
“ ... 어? ”
“ 솔직하게 말해달라니까?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오빠는 내 남자 친구잖아. 그런데 왜 자꾸 나한테서 도망치려고 해? 오빠가 생각하기엔 이게 정상적인 연인 사이라고 생각해? 난 아니라고 봐.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같이 있고, 함께 시간을 보내야지. 그런데 나는 오빠 여자 친구인데도 자꾸 혼자 시간을 보내고, 오빠만 기다리고 있잖아. ”
“ ... 우리 아까 그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
“ 오빠. 다른 년이라도 있어? 나 이거 오늘 처음으로 하는 말인데. ”
“ 이상하네. 넌 분명... ”
“ 다른 여자가 있으니까 그렇지? 딴마음이라도 품은 거야? 내가 못생겨서? 내가 꼴초라서? 아니다. 골초는... ”
“ 내가 못생겨서? 내가 골초라서? 아니다. 골초는... 내 근처에 있는 사람들만 해도 골초들 넘치잖아. ”
“ 방금 뭐야? ”
기명은 제대로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밀어붙여 오는 민채의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똑같은 분위기, 똑같은 상황, 심지어 풍겨오는 향까지도 똑같았다. 이상함을 느낀 기명이 민채에게 아까도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의 말에 다른 여자가 있다고 오해한 민채가 인상을 찡그리며 답했다.
그러다 민채가 하는 말을 기명이 똑같이 내뱉자, 이번에는 민채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냐고 물어보는데도 기명은 생각을 정리하느라 그 물음에 답을 주지 못했다.
민채는 마치 자신이 지금 혼자 덩그러니 놓인 기분이 들었다.
“ 오빠, 뭐냐니까! ”
“ ... 내가 지금 이상해진 건가, 아니면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한 건가? ”
“ 무슨 소리야? 오빠. ”
“ 아까 분명 네가... 그렇게 담배를 물면서 빨다가 재를 떨어트렸는데. ”
“ 앗, 따가! ”
“ ...이건 또 다르네. ”
참지 못한 민채가 기명을 향해 불안함이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기명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민채가 다시 물어보았고, 기명이 답을 이어갔다. 기명의 답을 들으면서도 민채의 떨리는 손은 테이블 위에 있는 담뱃갑을 잡았다.
담배를 하나 꺼내고, 입에 물더니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빠르게 연소한 담배는 재가 되었다. 불티가 남아있던 재가 민채의 허벅지 위로 툭 떨어졌다. 따끔거리는 감각에 놀란 민채가 화들짝 놀라며 다급하게 허벅지에 닿은 재를 털어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기명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겪었던 상황과는 미세하게 다른 쪽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 오빠, 아까부터 뭐 하자는 거야? ”
“ ... 야, 너 거짓 하나 없이 솔직하게 말해. 왼쪽 손목 보여줘 봐. ”
“ 어? 오, 오빠... 손목은 왜? ”
“ 얼른. ”
기명의 태도에 짜증을 내던 민채였지만, 그의 말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움찔거리며 의기소침하게 변했다. 괜스레 왼쪽 손을 등 뒤로 숨기며 어깨를 움츠렸다.
재촉하는 기명의 손에 버티고 있던 민채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기명을 보았다.
하지만 기명은 통하지 않는다는 듯 그녀의 손을 낚아채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녀의 손목은 기억에 남아있는 대로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그러나 그 자국은 조금 시간이 지난 것처럼 보였다. 절대 최근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상황이 기억하고 있는 것과 다름에 기명은 혼란스러웠다.
“ 이, 이건... 그러니까... ”
“ 언제 그랬어. ”
“ ... 저번에... 오빠가 나 두고 갔을 때... ”
“ ... ”
민채가 말하는 시간대는 적어도 3달 전이었다.
기명은 자신이 느끼고 있던 이상함을 의심했고, 그것을 확신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민채의 옆자리에 앉았다. 민채는 갑자기 자신의 옆에 앉는 기명을 보며 움찔거렸다.
잔뜩 겁을 먹고 있던 것과는 달리 기명이 민채에게 입을 맞췄다.
민채가 자연스럽게 팔을 올려 기명의 어깨에 걸치고 그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기명이 눈을 뜨고서 민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의심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의 눈앞에서 민채가, 아니 모든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순식간에 처음으로 돌아왔다.
“ 오빠, 이번에 일 어디로 간다고 했지? ”
“ ... 인천. ”
기명은 자신이 또렷하게 눈을 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뀐 상황에 어이가 없었다.
어쩌면 자각하지 못한 상태로 몇 차례나 같은 상황을 겪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 민채가 말하는 것이 매번 다른데도 들은 적 있다는 기시감이 느껴졌다.
작금의 상황에 기명의 입꼬리가 비틀어지면서 올라갔다.
그의 눈이 민채의 미세한 반응까지 따라가며 살폈다. 그는 이 상황을 만든 것이 다름 아닌 민채라고, 그녀가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계속 반복되는 그녀와의 데이트와 다시 돌아가는 계기가 키스라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확신을 믿고서, 민채가 바라는 만큼 따르기로 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