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로즈 타입

[BL/1차cp/250414] 평범한 하루의 일과

나비의 보관함 2025. 5. 4. 03:32

 

슥슥, 검은 먹을 머금은 붓이 하얀 종이 위로 유려하게 뻗어나갔다.

붓을 잡고 있던 자는 국선, 자하였다. 그는 밀린 일 처리를 하기 위해 붓을 잡았건만, 어찌 된 영문인지 술렁거리기 시작한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그러니 절로 인상이 찡그려지고, 집중하지 못했다.

자하가 붓을 내려두고,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 거지? 이렇게까지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때, 자하가 있는 방으로 문을 벌컥 열며 들어온 자가 있었다.

 

 

국선! 문제가 생겼습니다. ”

“ ... 이것 때문이었나. ”

? ”

아니다.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거지? ”

귀신들이 낭도들을 공격했다는데, 낭도들이 귀신을 없애려고 하니 이상한 녀석이 나타나 낭도들을 공격했습니다. 부상자가 생겼고요. 귀신들이 알려주긴 했지만... 귀마왕이라고 불리는 것 같습니다. ”

“ ... 일단 가볼까. ”

 

 

자하는 진림랑의 설명에도 가만히 종이만 뚫어지게 보았다.

그러다 귀마왕이라는 이름에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어냈다. 흐트러진 소매를 정리하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일렁거리는 푸른 불꽃과 소머리뼈로 만들어진 가면을 쓴 소년이 보였다.

그 모습이 자하의 호기심을 건드렸다.

나른하고, 심드렁하던 자하가 하품하다가 그 소년을 발견하고, 뚜렷한 시선으로 변했다. 그 날카로운 시선은 빠르게 움직이는 소년에게로 향했다.

소란은 자하가 등장하자, 손쉽게 진압되었다.

 

 

국선, 귀마왕이라는 자가 저 아이랍니다. ”

“ ... 그러지 않아도 그렇게 보인다. ”

조사를 하시겠습니까? ”

그래, 남은 일 처리 좀 부탁하지. ”

, 국선. ”

 

 

이후, 귀마왕이라 불리던 설영은 자하의 집에 묵으며 그의 조사에 참여해야만 했다.

설영은 국선이라 불리는 저 사내가 신분이 높다는 걸 눈치껏 알아차렸지만, 그 조사에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자하가 다가오기라도 하면 낮게 으르렁거리며 머리카락을 바싹 세우며 경계하기만 했다.

자하는 진림랑에게는 그리 유하게 구는 설영이 제가 오기라도 하는 날에는 이리 경계만 해대니, 그것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다 못해도 15, 지학 정도 보이는 소년이 제가 직접 키운 낭도들을 전부 쓰러트렸다는 것이 놀라웠다.

기껏 키운 녀석들이 저보다 어린 녀석에게 뻗어버렸다는 것이, 못마땅했다.

 

 

자꾸 그리 소란을 부릴 건가? 귀마왕님. ”

“ ... ”

나 참, 진림랑은 이 녀석이 어디가 얌전하다는 건지. ”

날 놓아줄 생각은 있는 거야? ”

당연하지, 그렇게 보면 좀 섭한데... 귀신들이 입힌 피해를 네가 채워야 할 것 아닌가. ”

웃기지 마! 저들이 먼저 공격한 거야! ”

그들도 반성하고 있는데, 귀마왕님은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군. ”

 

 

처음에는 갑을 채우고, 좁은 골방에서 생활했던 설영이었지만, 지금은 비교적 자유롭게 이리저리 쏘다녔다. 진림랑도 그렇고, 다른 낭도들과도 퍽 가깝게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유독 자하에게는 그 어설픈 이빨을 드러내며 경계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자하가 설영의 턱을 잡아당기고서 시선을 맞추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에 설영의 검은 눈동자가 들어왔다. 한참이나 작은 체구로 낭도들을 골탕 먹이고 사고 치기 일쑤인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렇다고 사고 치는 것이 골머리 아플 정도로 심각한 건 또 아니었다.

 

 

벌을 주자니 그 정도는 아니고... 그렇다고 그냥 두자니 자꾸 사고를 치는데. ”

“ ... , ”

귀마왕님을 어쩌면 좋을까? ? ”

 

 

자하가 설영의 턱을 붙잡아, 확 저에게로 당겼다.

두 사람의 거리가 바짝 붙으면서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거리였다. 당황한 설영이 바둥거리며 벗어나려고 하지만, 자하의 악력이 워낙 강해 벗어나지도 못했다.

그저 턱을 붙잡힌 채 바둥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설영의 눈꼬리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가며 자하를 향해 노려보았다. 바둥거리던 것에 지쳤는지,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딱 반항하는 고양이였다.

그 모습이 또 자하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자하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 ... 좋아, 결정했어. 당분간 화랑도에 머물며 내 일을 돕는 건 어떤가? ”

... 미친 거야? 내가 대체 왜 그래야 하는데? ”

내 말대로만 해준다면 토함산의 귀신들은 건들지 않기로 하지. ”

“ ... ? ”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화랑의 낭도들에게도 전해두도록 하지. 꽤 괜찮은 조건이라고 생각하는데? ”

“ ... 언제까지? ”

... 2년이면 되려나. ”

내가 당신 곁에서 일한다고 해도, 이득이 없잖아. ”

그건 내가 판단할 문제지. 귀마왕님이 판단할 문제는 아니야. ”

 

 

자하가 내민 조건에 설영의 눈동자가 데굴 굴러갔다.

그가 머리를 굴리는 것이 눈앞에 있는 자하가 알아차릴 정도였다. 열심히 눈을 굴리며 생각하는 그 모습도 꽤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짝 긴장하며 경계를 풀지 않으면서도 고민하는 게, 조금만 더하면 넘어올 것 같았다.

자하는 설영이 고민에 빠진 사이 턱을 어루만지다가 덜컥거리는 소의 머리뼈를 보았다. 아직도 고민하는 모양이지, 절로 생각이 들었다.

곁에 두고서 지켜보고 싶다고.

 

 

물론 2년 뒤에 떠난다고 해도 토함산의 귀신들은 건들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

정말이지? ”

속고만 살았던 모양인데, 나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지 않아. ”

“ ... 뭘 하면 되는 건데? ”

 

 

결국 자하의 조건에 고민하던 설영이 힐끗, 자하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그 말은 곧 승낙하겠다는 말이었다. 설영이 조건을 받아들이자, 자하의 입에는 은은한 미소가 걸쳐졌다. 자하가 설영에게 손을 내밀었고, 설영이 그 손을 붙잡았다.

그 순간 자하가 설영의 손을 붙잡고 확 당기며 그 뼈가면을 벗겼다.

검은색 눈동자가 맞닿자, 자하가 시선을 맞추고 웃었다.

 

 

잘 부탁하지. ”

약속이나 지켜. ”

물론. ”

 

 

방금보단 한풀 죽어버린 경계에 자하가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만하면 경계하는 것도 조금 누그러지겠지.

 

.

.

.

 

그렇게 생각했건만, 자하에게 설영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존재였다.

정말 고양이라도 되는 건지, 일을 하고 있을 때는 관심을 보였다가, 막상 관심을 주면 홱하니 떠나버리는 것이 영락없이 도도한 고양이 그 자체였다.

그게 싫었다기보단, 그래. 조금씩 티 나지 않게 감겨가는 기분이 들었다.

곁에 설영이 없으면 찾으러 나서기도 하고, 잠시 외출이라도 할 때면 설영에게 선물할 물건을 둘러본다든지. 평생 그러지 않을 사람이 그러고 있으니, 스스로에게 낯설었다.

 

 

, 미친 광인아...!! ”

어허, 지금 누구보고 광인이라는 건지. ”

이거 안 놔?! ”

아직도 귀마왕님이신 줄 아는 모양인데, 이제 그만 포기하는 게 어떤가? ”

놓으라니까! ”

놓으면 또 도망갈 텐데, 내가 뭐 하러? ”

 

 

화랑도에서 지내면서, 사고를 덜 칠 거라고 생각했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툭하면 산에 오르며 쏘다녔고,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땐 진림랑이나 다른 낭도들이 국선인 자하에게로 달려와 그 사실을 알리면, 자하가 나서서 설영을 데려왔다.

지금도 산에서 콕 박힌 채 귀신들과 노닐고 있던 설영을 자하가 발견한 상태였다.

대척점에 있는 두 사람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산에 올랐음에도 입고 있던 형색 그대로 유지하며 여유롭게 웃고 있는 자하와 오랜 산 생활에 잔뜩 헝클어지고, 지저분해진 설영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전투라고 부를 수 없는 다툼의 끝은 자하의 승리였다.

자하가 바둥거리는 설영을 어깨에 둘러메고 화랑도로 돌아왔다.

 

 

춘광아, 산에 가는 건 좋은데 시간 되면 알아서 내려오라고 했잖아. ”

내 마음이야! 이거나 빨리 내려줘! ”

그래, 그래. 우선 씻고 당과도 줄게. ”

어떤 당과인데? ”

 

 

한참을 바둥거리던 설영이 당과라는 말에 움찔거리며 바둥거림을 멈추었다.

자하와 지내면서 일이 잘 마치거나, 혹은 이렇게 산에서 찾으러 올 때마다 그는 설영에게 당과를 주었는데 당과는 매번 달라졌다.

매번 달라지는 당과는 호기심이 강한 설영의 흥미를 이끌기엔 충분했다.

색색 가지의 당과는 달콤했고, 입에 넣으면 행복한 감정을 불러와서 좋았다. 당과라는 말에 설영이 삼키지 못한 침이 그대로 주륵 흘렀다.

하필이면 그 침이 자하의 도포 자락을 축축하게 적셨다.

 

 

“ ... 옷도 빨아야겠군. ”

어떤 당과냐니까? ”

이번에는 모과라는 것인데, 먹어본 적 있어? ”

아니... 맛있어? ”

, 직접 먹어보면 알겠지. ”

 

 

자하는 바둥거리던 설영이 조용해지자, 아까보다 비교적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는 직접 설영을 씻겨주고 옷을 입혀준 뒤 두 손에 당과를 쥐어주었다. 씻고 나온 상태이니 설탕에 절인 당과를 잡으면 설탕물이 녹을 테니, 천에 감싸서 주기까지 했다.

자하는 설영을 씻기고 나니, 자신이 지금 육아를 한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모과를 행복하게 먹고 있는 설영의 모습을 보자마자 눈 녹듯 사라졌다. 설영의 표정은 무표정이었지만, 그의 눈빛에서는 행복이 느껴졌다.

자하는 탁상 위로 팔을 괴고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천천히 먹어라, 체할라. ”

당과로 체하면 그게 더 문제 아니야? ”

말 한마디도 안 지기는. ”

 

 

자하가 하는 말에 설영이 말꼬리를 붙이며 답했다.

설영이 아니라 다른 이가 그리 말꼬리를 붙였다면 분명 화부터 났을 텐데, 이상하게도 설영이 그러면 화가 나긴커녕 그저 그랬다.

자하는 시원한 밤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방에서 당과를 먹는 설영을 보았다.

이런 하루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복잡하고, 어려운 일 사이에 파묻혀 있다가 느지막하게 저녁이 되면, 설영과 함께 여유 넘치는 하루를 보내는 것이 어느새 일상이 되었다. 자하는 설영의 입가에 묻은 녹은 설탕을 닦아주었다.

그의 행동에 설영이 얼굴을 붉히며 쭈뼛거렸다.

그날, 자하의 큰 웃음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자하는 웃었지만, 설영은 웃는 자하를 이상하게 바라보며 남은 당과를 해치웠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