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로즈 타입

[HL/드림/250314] Stockholm syndrome phenomenon

나비의 보관함 2025. 3. 16. 16:02

 

무너져가는 건물 잔해 속 홀로 서 있는 예희 앞으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다가왔다.

평화로운 아스테룸을 습격한 존재는 칼리고였다. 그들은 평화로운 것을 혐오라도 하는 듯 그늘진 곳에서 밝은 곳을 향해 무력을 행사했고, 따사로운 햇볕이 내려앉던 곳은 순식간에 어둠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그들의 침략에 플레이브가 나섰으나, 쉽지 않았다.

4대 다수의 전투는 그야말로 무의미했다.

예희가 뒤늦게 플레이브가 있는 곳으로 왔으나, 칼리고에 의해 괴멸된 상태였다. 뒤늦게 나타났던 하민이 마저 칼리고 테리에 의해 쓰러졌다.

칼리고 테리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예희뿐이었다.

 

 

뭐야? 말해, 이러는 이유. ”

“ ... ”

, 뭔데? ”

 

 

전투를 하다 당한 채 쓰러진 플레이브의 앞을 막아선 예희가 테리를 향해 당당히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도 칼리고 테리는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다. 시선조차 확인하기 힘든 가면으로 인해 예희는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던 그때, 칼리고 테리가 움직였다.

예희는 자신을 향해 점점 다가오는 그의 행동에 당황해 주춤 물러나려고 했다. 순식간에 훅 다가온 그는 예희가 무어라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녀를 기절시켰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예희조차도 방어를 할 수 없었다.

 

 

으음... 여긴... ”

일어났군. ”

칼리고...! ”

그건 팀의 이름일 뿐이지. 내 이름은... ... 테리라고 부르면 되겠어. ”

이유가 뭐야? 습격이나 한 주제에 통성명이나 하자고 날 납치한 건 아닐 테고. ”

 

 

예희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처음 보는 낯선 곳에서 눈을 떴다.

일어나자마자 눈앞에 있는 테리의 모습에 상황 파악을 끝낸 예희는 인상을 찡그리며 경계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팔짱을 낀 채 흉흉한 눈빛으로 테리를 향해 경계를 하면서도 생각에 잠겼다.

분명 자신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플레이브도 알게 되었을 테고, 잘 버티고만 있는다면 플레이브가 자신을 구하러 올 게 분명했다.

도저히 안 되면 여기서 스스로 탈출하는 것도 생각했다.

 

 

유감이지만, 이 철장 안에 있을 땐 네 그 능력도 쓸 수 없을걸. ”

? 그게 가능한... ... 안 되잖아? ”

실험실에서 직접 만든 거니 효과는 보장되겠지. ”

, ...? ”

 

 

예희에게 가까이 다가온 테리는 마치 예희의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

그의 말에 웃기지 말라는 듯 코웃음 치던 예희는 그의 말대로 능력이 사용되지 않는 모습에 당황했다. 테라도 아니고 아스테룸이라면 쓸 수 있어야만 했다.

생각지 못한 혼란스러움에 예희의 감정이 서서히 변해갔다.

두려움을 모르고, 항상 당당하며 독립적이던 그녀가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예희의 떨리는 눈동자가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녀의 두려움을 읽은 테리가 철장 앞까지 다가와 말했다.

 

 

보아하니 아직 대화를 나눌 상태가 아닌 것 같군. ”

“ ... ”

내일 오도록 하지. ”

“ ... 돌려놔! 돌려달라고, 내 힘!! ”

내일 보지. ”

 

 

철장을 붙잡고 외치는 예희의 말에도 테리는 무정하게 떠났다.

방 안의 철창 안에 갇힌 예희는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침대에 주저앉았다. 이러면 정말 구하러 와줄 왕주님을 마냥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처량한 공주의 신세와 다를 게 없다.

그렇다고 계속 기다리기만 하기엔 걸리는 게 많았다.

예희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첫 번째로 플레이브는 빠르게 오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야 정보가 부족해 칼리고의 위치나 자신이 있는 위치를 곧바로 알긴 힘들 테고, 무엇보다 그들은 칼리고와의 전투로 인해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기절까지 할 정도라면 말 다 했지.

 

 

“ ... 빨리 와, 봉구야... ”

 

 

예희는 칼리고에서 준비해 준 침대에 누워 자신의 연인인 밤비를 떠올렸다.

이불을 꽉 움켜쥐며 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아무리 속 좋은 사람이라도 적군의 한 가운데에서 태평하게 잘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저녁에서 아침까지, 그 긴 시간 동안 예희는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플레이브에게 도움이나 신호를 줄 수 있는 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정녕 자신이 도와줄 힘 따위 없는 건가? 머리를 굴려, 굴리고 또 굴려서 밤비에게 도움이 될 걸 떠올려.

선우예희, 고작 이 정도로 뜻을 꺾을 여자가 아니잖아.

잠을 자지 못한 탓에 눈가가 붉게 충혈되고, 눈 아래로 그림자가 졌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침대 위에서 한참을 뒤척거리며 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다음 날, 해가 떠오르고 아침 식사를 들고 테리가 방으로 들어왔다.

 

 

진정은 된 건가? ”

“ ... ”

아직 대화할 준비가 되지 않은 모양이지? ”

말해, 날 왜 데리고 온 거야? ”

적어도 그들보다 네가 더 대화할 가치가 있으니까. ”

? ”

 

 

테리는 잠들지 않고, 뜬눈으로 밤을 지샌 예희의 앞에 앉았다.

철장 사이로 들고 온 식사를 넣어주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예희는 테리가 건넨 식사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올곧은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며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사뭇 진지해진 테리가 자신의 손을 감싸 잡으며 말했다.

원하던 건 아니었지만, 테리의 이야기를 듣게 된 예희는 생각에 잠겼다. 그는 강화 인간 실험실 출신이었고, 플레이브의 은호 동생이었다. 지금은 범죄조직인 칼리고의 핵심 멤버가 되었고, 그들이 행하는 일에 가담하게 된 것까지 말했다.

예희는 힐끗, 테리를 보았다.

 

 

너도 알지? 네 과거가 그렇다고 한들, 범죄에 가담한 건 엄연히 죄야. ”

“ ... ”

그래...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나에게 뭘 어쩌라는 거야.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

적어도 진실을 외면하진 않겠지. ”

실험실의 진실? 그걸 말하는 거야? ”

 

 

예희는 테리와의 대화를 나눈 이후 경계를 조금 누그러트렸다.

실험체로 지내온 삶, 의도치 않았던 범죄, 그도 그 나름대로 고충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과거를 듣고 나니 동정과 연민이 생겨났다.

어린 나이에 실험체가 되어야만 했고, 자유를 얻은 형과 달리 그는 아직 자유롭지 않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플레이브가 곧장 예희를 구하러 오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제대로 된 위치를 알지 못해 시간이 걸렸다.

예희는 그곳에서 지내면서 매일 테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탈출한 거야? ”

물론이지. 다만... 살아남기 위해선 악착같이 버텨야만 했어. ”

“ ... 너도 고생이 많네, ... ”

 

 

그와 함께하며 이야기를 들었던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테리의 이야기에 감화되어 가던 예희가 그에게 감정을 가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가해자이자 또 다른 피해자인 그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를 동정하고, 이해하며 공감했다.

어쩌면, 자신이 그와 같은 상황이었더라면. 그런 상황까지 상상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녀에겐 엄연히 연인인 밤비가 있었으나, 테리를 향한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예희는 밤비를 사랑하고, 애정하며 원했지만, 테리 또한 사랑하게 되었고, 애정하고 있었다.

 

 

“ ...테리. 뭘 해주길 바라, 내가? ”

예희. 난 그저... 있는 그대로 날 봐주는 네가 내 곁에 있었으면 해. ”

자료 조사는 기본이잖아. 알잖아. 내가 봉구, 밤비의 연인이라는 거. ”

알고 있지. 하지만 마음은 언제든지 변하는 거 아니던가? 지금의 너는 이미 날 사랑하고 있을 텐데. ”

“ ... 뭘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어. ”

 

 

예희는 테리가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하자, 괜히 심술을 부렸다.

이곳에 납치된 이후 잠잠하던 외로움이 사무치기 시작했다. 억지로 눌러왔던 그 감정이 활개를 치고 다니니 유일하게 마주하는 테리를 향해 마음을 품는 건 당연했다.

예희와 테리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날이 어느새 일주일이 넘었다.

일주일이란 시간 속에서 예희는 여전히 밤비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테리와의 관계를 정확하게 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마음이 있었으니까.

때론 스스로를 탓하고, 어떨 땐 테리에게 네 탓이라며 몰아붙이기도 했다.

 

 

봉구야... ... 안 되는데, 이러면... ”

뭐가 안 된다는 거지? ”

알 거 없어, 너는. ”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정도로 술렁거리는 마음은 좀처럼 쉽게 진정되질 않았다.

테리를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밤비를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이 밤비의 연인이면서 테리를 마음에 담았다는 것에 큰 자책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마음을 놓지 못했다.

여전히 밤비를 사랑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테리를 사랑했다.

밤이 깊어질 때면 예희는 창가로 들어오는 달빛을 보며 밤비를 떠올렸다. 그에게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하지만, 사특한 마음이 두 사람을 품으라고 유혹했다.

테리와 대화를 하다가도 밤비를 이야기하는 일이 잦아졌다.

 

 

날 구하러 올 거야, 봉구가. ”

“ ... 밤비랬던가. ”

내 연인이니까. 알아? ”

 

 

예희는 납치되어 있는 상태에서 자신을 납치한 상대에게 연민을 품으면서도 그 마음을 애써 외면하려고 밤비를 더 찾았다.

그녀가 종일 밤비를 생각하고, 그를 그리며 떠올리고 있을 때.

그 사이에 플레이브는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된 준비를 마치며 칼리고의 본부를 찾았다. 대망의 당일, 플레이브 사이에서 긴장감이 맴돌았다.

정황상 칼리고에게 남치당한 예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예희가 밤비를 생각하는 만큼, 밤비 역시 예희를 그리워했다. 기절했던 플레이브 중 가장 먼저 깨어난 것도 그였으며, 예희를 구하기 위해 작전을 짠 것도 밤비였다.

밤비는 예희를 구하기 위해 일주일내리 쪽잠을 자며 그녀를 걱정했다.

 

 

예희 누나, 조금만 더... 기다려요. ”

 

 

오죽하면 밤비가 코피를 흘릴 정도였다.

일주일이 지나고, 칼리고의 위치를 알게 된 플레이브와 밤비는 예희를 찾기 위해 투입될 준비를 마쳤다. 플레이브는 두 팀으로 나누기로 했다. 1조는 소란을 피워 칼리고의 병력을 끌어모으고, 2조는 몰래 투입하여 예희를 구하기로 했다.

그들의 등장을 알아차리지 못한 테리와 예희는 여전히 대화를 이어갔다.

 

 

플레이브가 날 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 ”

아니. 그리 생각한다. 보아하니 너는 그들에게 소중한 인물인 것 같으니. ”

알면서 그래? ”

네가 날 선택해 주길 바랄 뿐이지. ”

당연하게 생각하는구나, 내가 널 선택할 거라고. ”

 

 

, 커다란 굉음과 함께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가만히 서 있던 테리의 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릴 정도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예희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테리를 불렀다.

테리는 괜찮다는 듯 예희에게 손을 내밀어 진정시켰다.

진동이 잠잠해지자, 뒤이어 굳게 닫혀있던 문이 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이 열리고, 뒤따라 들어온 사람이 예희를 불렀다. 예희의 눈에 봄꽃처럼 화사한 분홍빛이 들어왔다.

예희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어딘가 서글퍼 보이는 눈을 하고서 그를 보았다.

 

 

예희 누나!! ”

“ ... 봉구야. ”

벌써 온 건가, 생각보다 오래 걸렸군. ”

칼리고! ... 테리, 맞지? 내가 알던 테리랑은 다른데... ”

“ ... 데리고 가려면 데리고 가도록 해. 선택은 그녀의 몫이니. ”

예희 누나! 늦어서 미안해. 여길 알아내느라고... 이제 가자, 애들도 누나 기다려. ”

봉구야, 나는... ”

 

 

예희는 자신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어오는 밤비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괜스레 자신의 팔을 문지르며 밤비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해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예희의 행동에 의문스러워진 밤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예희를 보았다.

왜 그러냐고, 손을 붙잡으라고 하는 말에도 예희는 입술을 짓물고 있을 뿐이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자, 밤비는 조용히 예희를 보았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고 말해주길 기다렸다. 밤비의 의도를 알아차린 예희가 용기 내어 그에게 말했다.

그동안 이곳에 있으면서 테리를 사랑하고 말았다고.

 

 

“ ... ? ”

봉구야, 미안해. 하지만 너도 여전히 사랑해. ”

“ ... ”

어느 쪽도 택하지 못한 건가. ”

 

 

예희의 말에 진실을 알게 된 밤비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진실을 알리고 있을 때, 주변을 정리하고 들어온 은호와 하민, 노아, 예준까지 예희의 이야기를 들어버리고 말았다. 모두가 한곳에 모이자, 지켜보고 있던 테리가 발걸음을 돌렸다.

점점 멀어지는 테리의 모습에 예희는 고개를 더 푹 숙였다.

두 사람을 볼 낯이 없었다. 감히 두 사람을 한마음에 품은 탓이었다.

 

 

 

-fin.